뒷풀이 이후 크리스마스
회도전력 60분/올캐러?
정은창은 우편물 확인을 드문드문하는 편이었고, 그때문에 제게로 온 우편물이 꽤 희끗하게 꼬리를 보일 즈음에야 회수하곤 했다.
발신인은 적혀있지 않고 정은창 씨에게, 라고만 간결히 적혀있는 흰 편지 봉투는 보통 문방구나 우체국에서 파는 것과는 달리 안내 카드를 넣으면 알맞은 크기였고, 종이 재질 자체도 좋았다. 그의 거처를 아는 사람들은 편지를 수고스레 보내기보다는 통화나 직접 만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정은창은 호기심에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었다.
요약하면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대체 누가? 하고 의문을 갖다가 말미에 작은 약도와 주소가 적혀져 있는 것에 발신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쩔까, 하다가 제게도 보냈다는 건 그 외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미 발송된 후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정은창은 남은 우편물들을 방 한 구석에 던져두고 초대 받은 장소로 향했다.
***
정은창은 입구를 지키던 듬직해 보이는 경호원에게 초대장을 보여줄 것도 없이 단박에 통과되었다. 시작 시간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기에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노란빛을 뿌리는 조명빛을 받아 베이지색과 고동색으로 칠해지고 꾸며진 내부가 은은한 금빛을 띠었다. 중앙에는 뷔페 식으로 꾸며진 음식들이 줄지어 있었고, 주변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된 것이 보였다.
"왔군."
"아, 응. 웬일로 그쪽의 회장님이 이런 연회를 벌이셨대?"
"지난번 뒷풀이를 고깃집에서 보냈던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크리스마스를 맞아 백석의 힘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더군.
"...쪼잔하지만 규모 자체는 대범한데?"
"...동감이다."
"아들 찾은 거, 축하해."
정은창은 시선을 돌리며 양태수에게 넌지시 말했고, 양태수는 작게 놀란 듯 말을 하지 않다가 눈매의 날카로움을 스러지게 할 정도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고맙다."
"애는?"
"저기."
양태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 정은창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접시에 이것저것 넘치게 담아 테이블에 늘어놓고 먹는 양시백의 모습을 보곤 잠시 관찰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걸리적거리는지 귓가로 잔머리를 슬쩍 넘긴 사이로 풋내나는 얼굴이 드러나보였다. 참 복스럽고 공격적으로 먹는 것에 정은창은 어쩐지 픽 웃음이 나왔다. 양시백은 두 사람의 시선, 정확히는 아버지인 양태수의 시선을 느꼈는지 포크를 입에 문 채 손을 흔들었다.
"좋아보여 다행이야, 수고하라고."
정은창은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접시를 들고 아무 거나 대충 집었다.
"조금 늦었네, 정은창."
앞에서 마악 테이블로 가려던 권현석과 유상일이 잠시 멈춰서 있었다.
"그 누구도 저한테 연락을 안 줘서 말이죠. 지금이 어느 시댄데, 꼴랑 편지 하나 가지고 되겠어요? 제 때 확인 못 한 제 탓도 있다지만.."
"어?"
"..연락, 했는데?"
"엉?"
"내가 자동응답기에 메시지 남겨놨을 텐데."
"나도 몇 번이나 전화 걸어봤는 걸?"
두 사람의 지긋한 눈초리에 정은창은 졸지에 연락에 무신경한 남자로 못 박히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됐어, 이 정도면 늦은 것도 아니고."
"혜연이랑 아연이는?"
"테이블 붙여서 합석했지. 음식은 우리가 나르고 있고."
"용케 저 할아버지가 초대했는데 또 왔어 그래?"
"초대 받았는데 안 오면 그렇잖아?"
"기름칠도 하고 말이지."
얘기가 길어지려고 하자 앉아있던 권혜연이 다가와 권현석에게 핀잔을 주었다.
"갑니다, 가요!"
"오빠도 저쪽에 같이 앉아요!"
"있다가."
정은창은 대충 빈 테이블 위에다가 제 접시를 내려놓았다.
배고픈 것보다 목이 타 음료수를 찾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억 컵을 막 집던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런 돈지랄도 벌일 줄도 알고..돈도 여유도 만만이시라니까."
"여전히 말투는 천박하구만."
"천박하게 태어났으니 말투도 천박하지. 제가 고상하면 그게 더 웃길 노릇 아니겠습니까?"
"자네의 지론은 자네의 지론이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아나?"
"하, 그딴 거 제가 알게 뭡니까? 적당히 먹고 마시며 회장님의 부나 축내보렵니다."
"그런 걸로 축날리가 있나. 김성식이 자네만큼 할라고."
김성식은 와인잔에 입을 갖다대며 물었다. 용케도 참석 중이다.
뭣보다 주최자에게 썩 좋게 들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어서 제삼자인 정은창은 어쩐지 뒤통수가 째릿한 느낌을 받았다.
"야~ 정은창!"
주정재와 최재석이 마침 김성식과 장희준이 있던 쪽에서 다가온 것에 일종의 방음벽처럼 작용한 덕에 정은창은 겨우 음료를 컵에 담았다.
"죽이지 않냐? 규모 한 번 끝내주네."
"언제 왔냐? 여기 음식 진짜 맛있어!"
"밥 생각은 별로 없고, 주위 보면서 다른 사람 보는 중이야."
"밥 생각이 왜 없는데?"
반대편에서 와인잔을 든 강재인이 걸어와 물었다.
"배가 안 고프니까."
"음식에 독이라도 탔을까 봐?"
"켁!"
"그런 거 아니거든."
"어머, 옆의 두 사람은 표정이 볼만한데?"
"바보라서 그래."
"술이라도 한 잔 할래?"
졸지에 바보로 지칭된 최재석과 주정재가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지만 정은창은 팔로 슬쩍슬쩍 밀었다.
둘은 그림 좋다, 눈치 없는 놈 등의 말을 투덜거리며 멀어졌다.
"아니. 됐어."
"재미없기는."
"원래 재미없거든..그보다, 얼마나들 온 거야?"
"김 실장님, 아니 김 사장님 쪽과 저기 박근태 경무관님과 그 휘하 수사반들까지. 지난번이랑 엇비슷해."
"즐거워보이네, 다들."
"크리스마스니까. 정은창 씨는 이 이후에 뭔가 약속 있어?"
"딱히 없어도 나쁠 거 없잖아?"
"없으면..나랑 보내는 건 어때?"
정은창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
"역시 부잣집이 좋긴 좋아."
"많이 드십시오."
"준혁이는 그걸로 끝이야?"
서재호는 몇 접시 먹지 않은 배준혁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입이 짧은 편인 것을 감안해도 식사량이 지나치게 적어 한 말이었다.
"식욕 없습니다. 두 분은 맛있게 드십시오."
배준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서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긴 머리의 여자, 장지연에게 다가갔고, 서재호는 그제서야 수긍하고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고쳐잡았다.
"아니 근데, 미정 형사는 왜 좋아하는 상일 형님 근처에 안 가고 여기 있는 거야?"
좋아하는, 에 이르러 타오르는 불같이 째려보는 오미정의 눈빛에 서재호는 깨갱하며 잠시 시선을 돌렸다.
파스타에 포크를 꽂고 빙글빙글 돌리던 오미정은 사나운 표정을 풀고 말했다.
"..부담..스러워 하실까 봐."
"....저런."
"무엇보다 아연이와 함께 팀장님 가족과 합석했는데 내가 어떻게 끼어들겠어."
"..힘내라고.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게 미정 형사 장점 아냐?"
"웬일로 그런 도움 되는 소릴 한대요?"
"나 원래 도움 많이 되는 사람이거든?!"
서재호는 제 접시에 담긴 미트볼을 쿡 찍어 한 입에 씹어삼키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에서 안경을 쓴 여인과 도란도란 이야기 중인 박근태의 뒷모습을 포착하곤 곧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여기저기서 핑크빛이 만발한데 왜 나만..."
"서 형사, 소개시켜줘도 썩 성적이 안 좋던 걸요."
"패션..패션이 문젠가..?!"
"꼭 옷차림 문제만도 아닐걸요?"
"뭐야?"
서재호는 반박하던 것을 멈추고 빈 접시를 둔 채 일어났다. 이 기회에 비싼 와인을 먹어볼까 했으나 김성식과 장희준의 심도 있는 대화에 휘말릴까 두려워 곧 돌아섰다. 음료수나 뽑아 마실 생각으로 터덜거리다 묘한 기류를 풍기는 정은창과 강재인의 모습을 본 서재호는 여기도냐며 한숨을 쉬며 잠시 창가쪽에 붙었다.
"거, 이 상태에서 일 안 터지고 조용히 눈만 내리면 멋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으려나."
바깥에 관심을 두지 않은 서재호는 알지 못 했지만 저택 밖에 강렬하게 부는 바람을 따라 가느다란 눈발이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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