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1

하성철 생축글

"생신, 축하드립니다."

하성철은 박근태의 말에 눈을 깜빡인 채로 대답이 없었다. 일견 무표정하게 보였지만 오랜 시간 그 옆에서 함께한 박근태는 그 얼굴이 무시가 아닌 의아함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생일을 인지하지 못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벌써 날이 그렇게 됐나?"

"국장님의 생신은 딱 한 해를 열흘 남긴 날이어서 일정을 체크하다 보면 알게 되더군요."

"..그랬지."

박근태는 소파쪽에 내려놓았던 종이봉투를 가져와 하성철의 앞에 내밀었다.
부담을 갖지 않을 정도의 소소한 선물. 하성철은 제 생일이 다가올 때쯤엔 한 해가 모두 가 버린 뒤라는 사실을 곱씹곤 했고, 그 다음에 오는 건 이루지 못 한 것들이 빚어내는 씁쓸한 기분이었다. 떨쳐내기 힘든 감정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그런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건 처량하고 주책맞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그런 것들이 내뱉어진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성철은 종이봉투를 받아 제 가방의 옆에 내려놓으며 가볍게 턱을 괴고 말했다.

"팀원들과 함께 마련한 겁니다."

"..받기만 하니 미안한 기분까지 드는군. 난 자네 생일을 자주 챙겨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저도 국장님의 생신을 매번 챙겨드리는 건 아닙니다."

"방금 전 일정을 체크하다 보면 안다고 하지 않았나?"

"달력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날에는 축하인사조차 못 드릴 때가 많으니까요."

"근태, 농담이 늘었어."

"국장님이야말로 농담이라곤 전혀 못 하실 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짧게 웃었다.

***

박근태와 권현석은 괜찮다면 같이 저녁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하성철은 오늘의 남은 시간은 가족들과 보내겠다며 올해가 가기 전 자리를 갖자는 말을 덧붙이며 제안을 거절했다. 비교적 일찍 귀갓길에 오른 하성철은 생일을 맞은 자신을 배려해 준 것일까 생각하다가 곧 걸음을 옮겼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꽤 오래 걸어가야 도착하는 집이었다. 하성철은 감상에 젖어 주위를 둘러보며 집을 향해 걸어가던 도중 들어가야 하는 골목 어귀를 턱 막은 검은 세단을 발견하곤 잠시 멈춰섰다. 그가 살고 있는 이 동네는 전체적으로 살림살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저런 고급 승용차를 끌고 여기까지 들어오기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지나치게 눈에 띄기도 했고. 수고스럽더라고 주변에 세워둔 채 걸어올 수도 있었을 텐데 최대한 차로 비집고 들어와 세워둔 것을 보면 영락없이 온 동네에 행차를 알리려고 광고를 하는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자 그다지 좋은 감정이 드는 건 아니었다. 세워진 차를 빙 돌아 골목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끼익, 하고 차의 문이 열리고 노신사가 밖으로 나왔다.

하성철이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방금 전 품은 좋지 않은 감정이 속에서 배로 들끓어대자 하성철은 제가 무슨 얼굴로 눈앞의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힘들어 침묵했다.

아니, 하성철은 사실 알고 있었기에 멈춰섰던 것이었다. 그 검은 세단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그 안에는 누가 타고 있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도. 노신사는 제 손등으로 턱을 가볍게 쓸며 하성철을 훑어보듯 시선을 주다가 입을 열었다.

"생일이라고 들었네."

"......"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생일이라는 건 행복함보다는 먹먹하고 외로운 기분만 던져줄 뿐이지. 성철이, 자네 생일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 축하인사라도 건네고 싶어 조금 먼 산책을 나왔어. 경찰서에서 마주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낫지 않은가?"

"헛걸음 하셨습니다."

"정복을 벗은 자네 모습을 본 걸 생각한다면 그리 헛걸음한 것도 아닐 거야. 쫓기듯, 혹은 마지막인 것처럼 담아두듯 주위를 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네."

그럴 리 없겠지만 서를 나온 순간부터 감시당한 것 같아 하성철은 인상을 찡그렸다.

"솔직히 말해 저는 그리 기쁘지 않습니다."

"생일 자체가? 아니면, 내 방문이?"

정곡이다.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성철은 그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던져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후자를 택했다.

무엇보다 전자에 비하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불쾌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소한 배려가 있으셨다면 이렇게 무신경하게 찾아오시지는 않았겠지요. 제게도, 동네 사람들에게도 민폐입니다."

"내가, 그런 사소한 걸 따지는 것 같던가?"

"그러지 않으니 제게서 좋은 대답을 듣지 못 하시는 겁니다, 장희준 회장님."

"까탈스럽군. 자네는 내가 배려를 갖춘들 듣기 좋은 대답 같은 걸 해줄 생각이 없잖나. 그렇다면 내키는 대로 밀고 들어갈 뿐일세."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제-"

입술을 비틀며 웃은 장희준은 차의 문을 열고 그 안에서 준비해 온 듯한 꽃다발을 꺼내 하성철에게 건넸다. 하성철은 얼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보편적인 축하의 의미, 붉은 장미와 안개꽃 무리가 한데 얽혀있는 흔한 꽃다발이었다. 찬 공기에 장미향마저 따끔하게 느껴졌다.

"남은 시간, 가족들과 즐겁게 보내게."

장희준은 하성철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가 곧 거둬들였다.

하성철이 뻣뻣하고 무표정을 고수하며 가만히 있는 것을 잠시 보다가 타고 온 검은 세단에 올라타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하성철은 잠시 제 품에 들려진 꽃다발을 내려다 보며 버릴지, 말지 고민하다가 준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로 그것을 -좋은 쪽으로는- 기대하지 않은 선물처럼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