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2

회도전력 60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냐, 양시.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시백이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아빠는 품에서 흰 봉투를 하나 꺼냈다. 스무살이 넘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빠는 늘 세뱃돈 겸이라며 조금씩 돈을 주었다. 세배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구정도 아닌데. 전에 챙겨주지 못 한 것들이 미안해서 많은 걸 챙겨주고 싶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내가 줘도 모자를 판에 매 새해마다 받고만 있는 게 불효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안 받으면 또 시무룩해하셔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큰일이 없는 이상 받은 돈들은 저금했다.)

"아저씨..매번 양시만 용돈 주고..난 뭐 없어?"

"....."

"진짜 너무한 거 아냐? 10년 넘게 농담 되게 안 받아주고..."

"전 좀 나갔다 올게요."

"잘 다녀와라."

투닥거리는 관장님과 아빠를 뒤로하고 도장을 나왔다. 평소라면 저금했겠지만 올해는 꽤 돈 쓸 곳이 많았다. 설희에게도 과자나 좋아할 만한 걸 사 주고, 선생님께도 감사의 의미로 작은 선물도 드리고 싶고 또...

다들 뭐하나 싶어 연락을 취해보니, 권혜연 씨도 새해 인사차 재호 아저씨네 있다고 해서 간단힌게 먹을 거랑 신세졌던 만큼 생필품들을 조금 사다가 정류장으로 향했다. 올해 뭔가 잘 풀리려는지 정류장에서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버스가 곧장 왔다.

***

딩동-

벨을 누르자 아저씨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저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양시백이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별거 아니지만 받으세요."

"웬 거야? 연초부터 무슨 돈이 있어서?"

"세뱃돈 겸 용돈 받았거든요."

"..자네, 그 나이에 아직도 세뱃돈 받나?"

"..제가 조른 거 아니거든요..그렇게 말하는 아저씨는 세뱃돈 주시고나 말씀하시라고요."

"절부터 하고 말해."

재호 아저씨의 눈빛에 깃든 감정은 명백한 놀림이었다. 새해가 되어도 여전하단 생각을 하며 봉투들을 건네고 안으로 들어가니 권혜연 씨가 침대 쪽에서 무릎 위에 설희를 앉힌 채였다.

"권혜연 씨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희도, 새해 복 많이 받고."

"고마워요. 양시백 씨도요."

"오빠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야지. 아, 권혜연 씨도 이거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 게요."

"설희도 이거."

설희에게는 나름대로 귀여워보이는 삔이라거나 머리끈이나 장식 같은 걸 준비했다. 옷을 사 줄까, 하다가 사이즈를 모르는 데다가 안목도 없고 옷 가게도 열지 않아서 곤란해서 대신 선택한 결과였다. 과자를 사 줘도 좋아하겠지만 과자는 언제나 흔하게 사 줄 수 있는 것이어서 선택지에서 과감하게 빼 버렸다.

"고맙습니다!"

"설희야, 언니가 머리 다시 묶어줄까?"

"네!"

다행스럽게도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권혜연 씨는 빗을 가져다가 설희의 묶은 머리를 빗어주었다.

"식사는 했어?"

"아직요."

"떡국은?"

"아직요.."

"한 그릇 들겠나?"

"아서요. 둘이서 밥 먹을 때도 꽉 차는데 여기 넷이나 있으면 어떻게 먹겠어요? 아저씨 방에 널린 책들도 정리 안 하면서."

"혜연인 설희랑 먹었는데."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었다.

"그래, 관장님이랑 아버님이랑 같이 먹는 게 낫겠지."

"아, 그러고보니 물어볼 거 있었네. 아저씨, 준혁 선생님이 좋아하는 선물같은 거 아세요?"

"글쎄..선물을 줘 봤어야 알지. 받은 걸 본 적도 없고..왜, 선물 주게?"

"선생님껜 폐를 많이 끼쳤었으니까요."

"준혁이 그 친구, 주는 선물이라면 마다하지 않을 거야. 정 모르겠으면 넥타이라도 선물해주던가."

"넥타이...알겠어요, 그럼 먼저 갈게요!"

설희와 권혜연 씨에게도 인사했다.

선생님께는 연락을 드려봤지만 답이 없으셔서 나중에 찾아가기로 했다.

***

"......"

"......"

"뭐야?"

"지나가던 길이거든."

나도 단골이 되어가는 포장마차 -당연하지만 새해 날에도 열려있지는 않았다- 근처를 서성이는 허건오가 보여서 조용히 지나가려다가 그만 눈이 마주쳤다.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고 또 고개를 홱 돌리기는 뭐했다.

"됐고,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엥?"

허건오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내 쪽을 봤다.

들을 줄 몰랐겠지. 나도 멱살잡이 할 정도로 몸싸움했던 전적이 있는 녀석에게 한가롭게 새해 인사를 건넬 줄은 몰랐다.

사람 얼굴 너무 뚫어져라 쳐다봐서 민망해질 즈음, 허건오 녀석이 입을 움직였다.

"야, 태권도, 잠깐 가만히 있어라. 어디 가지 말고."

"뭐?"

"아, 가만히 있어보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녀석은 큰길가로 쌩하고 달려갔다. 그걸 또 얌전히 기다려주고 있으니 허건오 녀석이 뭔가를 들고 오더니 내 쪽으로 휙 던졌다.

혹시나 해서 순간적으로 콱 낚아채는데 따끈따끈한 느낌에 쥔 것을 똑바로 봤다. 핫바였다.

"뭐야, 먹으라고 주는 거냐?"

"너도 그, 새해 복 많이 받던가."

"어..잘 먹을게. 하태성이랑 빡빡이에게 안부 전해주던가."

"뭐래. 됐으니까 간다!"

***

여차저차 새해 인사 듬뿍하고 돌아오니 한창 떡국 냄새가 도장 안에 그득했다.

"아, 왔냐, 양시!"

"다녀왔습니다!"

"밥은? 먹었고?"

"아직. 둘은? 벌써 먹었으려나?"

"아, 재석이 녀석이 떡국 재료 사 오는 걸 깜빡했다고 해서 급히 사 와서 끓이는 중이야."

"라면은 관장님이 잘 끓이시는데, 떡국은 아빠가 끓여주는 게 제일 먓있더라."

아빠가 웃는 모습에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짜르르 했다. 아빠가 마저 국을 끓이는 동안 관장님과 함께 상을 준비했다.

(매번 식사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아빠와도 같이 먹게 되면서 신문지로는 자리가 좀 많이 모자랐다.)

"그래, 새해 인사는 많이 했고?"

"그럭저럭요. 그나저나 아직까지 밥도 안 먹고 뭐했어요?"

"어허, 내가 어제 떡국을 사 오지 않은 것은 네가 식사도 거르고 새해 인사를 다닐 걸 생각한 나의 안배...!"

"새해부터 되도 않는 말 마라."

"아, 아저씨 진짜 나한테만 박하다니까.."

아빠는 쟁반에다 떡국 세 그릇을 들고 왔다.

떡, 김, 계란과 고기를 포함한 고명까지 완벽했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그제서야 허기가 막 올라왔다.

"크, 배고프다..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 아저씨!"

"그래. 어서들 먹자."

밖에서 묻어온 추위가 떡국 한 숟가락에 사르르 떨어져나갔다. 여태까지의 새해는 달리 평화로웠고 느긋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새해는 있을지도 모르는 뭔가가 잘 풀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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