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2
양시백 생축글. 다같이 중식당 코스요리 먹어라
죽다 살아난 이후 종종 복권을 샀던 서재호는 거짓말처럼 간소한 금액에 당첨됐다.
"체, 저도 아저씨 따라서 복권 사볼 걸."
"헹, 자동으로 뽑힌 거라 안 됐을 걸?"
"당첨금으론 뭐하실 거예요? 컴퓨터 바꾸시나?"
당첨금 수령하지도 않았건만 권혜연과 양시백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세금 떼고 나면 실수령액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아직까지는 복권하면 일획천금 이미지니 당연한가 싶으면서도 서재호는 볼을 긁적였다.
"내 컴퓨터 잘 돌아가. 그거보다, 이걸로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고. 다같이 연말을 마무리 하는 겸해서 말이야. 날은...다다음주 일요일로 하지."
"예약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좀 도와드릴까요?"
"괜찮아. 봐둔 데가 있어."
"...믿어도 되겠죠?"
양시백의 물음에 서재호는 씨익 웃었다. 양시백은 고개를 돌려 권혜연과 눈을 맞추었고 어디든 마음의 준비를 해두자는 텔레파시를 빠르게 주고받았다.
***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괜찮고 말고."
"아니, 의외다 싶어서요. 다같이 비싼 밥을 먹자고 하시니까."
"감사합니다!"
"헤헤, 잘 먹을게요."
"설희도요!"
학생 둘에 아이 하나, 성인 셋이 모여 어디를 가고 있는가 하면, 서재호가 전부터 눈여겨 봐둔 고급 중식당이었다. 맛, 위치, 서비스 등을 알아보고 알아본 결과 정말로 복권이라도 맞지 않는 이상 가볼 일이 전혀 없을 것 같은 곳! 식당으로 들어서자 말끔한 베이지색과 어두운 갈색과 붉은색과 금색을 포인트로 꾸민 입구가 나타났다. 겨울의 추위를 누그러뜨리는 온기며 은은한 조명들은 몹시도 휘황찬란했다.
"어서오세요, 예약하고 오셨을까요?"
"학생 셋에 성인 셋. 서재호라는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아, 네.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크진 않았지만 방 중앙에는 모두가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둥근 식탁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창가로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제나름의 야경이 보였다. 안내를 마친 종업원은 곧 코스를 준비하겠다며 인사하며 나갔고, 주춤주춤 자리에 앉은 뒤 양시백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으악, 가슴 떨려. 되게...그...이렇게 넓은데 저희끼리만 있으니까 엄청 낯선데요."
"양시백 씨...얼굴 무서워요."
"그그그, 그래요? 아, 좀, 낯설어서 그래요. 낯설어서!"
"이런 곳도 와보고 그래야지. 설희야, 많이 먹어라. 알았지?"
"네!"
"호진이 넌 어때?"
"어, 음...나도 솔직히 자주는 안 와 봐서. 그보다 여기 분위기 되게 좋다. 그치? 현아야."
식탁 위에는 인수에 맞는 수저와 접시, 컵들과 단무지, 땅콩, 짜사이가 준비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콜라와 사이다, 맥주 한 병씩에 묵직한 찻주전자가 놓여있었다. 여섯 개의 빈 잔들을 채운 뒤에야 주전자에 든 것이 물이 아니라 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연말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한 마디씩 덕담이나 나눠볼까. 자, 먼저 우리 학생 세 명! 내년 다짐 같은 거 말해보는 건 어떤가?"
"어...여차저차 일이 많았었지만 다들 이렇게 알고 지내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저랑 현아는 내년에 고3이 되는데 학생의 본분을 다 해볼게요."
"멋진 말 혼자 다하네..음. 큼..그래도 호진이 말처럼 언니랑 오빠, 기자 아저씨랑 설희를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했고, 홍설희는 무얼 말해야할지 짧게 고민했다. 양시백이 얼른 선수를 쳤다.
"설희는, 중학생 될 때까지는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고 그래. 중학생 되어서 조오기 언니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되니까."
"알았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혜연이 언니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될 거에요."
"고마워, 설희야."
"...기자랑 사범은 역시 폼이 안 나나?"
"아저씨, 모처럼 애가 진지하게 말하는데..."
"난 언제나 진지하다고. 자, 그럼 근신 먹었다 풀린 권혜연 순경."
"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 뭔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 수 있었던 해였어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다 모두 덕분이에요. 늘 고마워요."
"저도...말도 많고 탈도 많았어서 혼자였다면 영 버티기 힘들었을 겁니다. 이렇게 가끔씩이나마 복닥복닥 어울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내년에도 힘내봅시다!"
이제 다섯 사람의 시선이 모조리 서재호에게 꽂혔다. 눈총이 그지없구만.
"그래, 유독 다사다난했던 연말도 곧 지나고 새해가 밝을 거야. 올해보다 더 나은 새해가 오길 바라며 올해의 남은 날들도 잘 부탁하네. 오늘은 이 아저씨가 쏠 테니 잔뜩 먹고 마시자고."
좋아요!
합창처럼 입을 모으자 닫혔던 문이 빠끔히 열리며 카트 끄는 소리와 함께 음식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
제일 처음 나온 건 작고 오목한 그릇에 담겨 나온 게살 스프였다. 주린 배에게 놀라지 말라는 듯 뜨겁지 않고 따끈한 온기에 간이 세지 않고 고소한 맛이 입에 감돌았다. 음~ 누가 냈는지 알 수 없는 콧소리와 함께 작은 그릇은 순식간에 비워졌고, 곧 첫번쨰 요리인 쇼기 냉채가 나왔다.
"차가운 것부터 시작해서 뜨거운 걸로 마무리 짓는 게 코스긴 하지. 다들 못 먹지는 않겠지?"
"헤헤, 저흰 다 잘 먹어요."
"저도 가리는 거 없어요."
"설희도요."
"아저씨도 많이 드세요, 못 드실라."
"덜어드릴까요?"
"예끼, 애들이나 덜어줘."
먼저 아이들에게 듬뿍 덜어준 뒤 각자 먹을 몫을 덜고 나서야 식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냉채답게 아삭한 오이와 새큼한 식초로 버무려 손질한 닭고기와 함께 집어먹으니 스프로 달래놨던 속에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맛있구만."
"원래 외식하면 시끌시끌했는데 여긴 저희 얘기하는 거 뺴면 조용하네요."
"뭐, 그래도 음악도 은은~하게 흐르고 있고 좋지 않은가?"
"너무 좋아서 기자 아저씨가 복권을 또 맞았으면 할 정도로요."
"에헤이, 요즘 애들은..."
킥킥거리며 웃는 와중에도 문은 열렸다 닫히며 상의 빈 자리에 다음 요리가 차례로 놓였다. 유산슬과 칠리새우, 크림새우, 꿔바로우였다. 정말 조리가 되자마자 바로 날라졌는지 꿔바로우는 보기만 해도 뜨거워보일 정도의 김이 펄펄 나고 있었다.
"자, 본 메뉴들이 나왔군. 건배나 할까?"
"좋아요."
"저흰 콜라로 괜찮아요. 세 분은 맥주?"
"아니, 나도 콜라."
"나도."
"맥주는 나만 먹겠구만..."
각자 잔에 콜라와 맥주를 채운 뒤 서재호가 잔을 들며 양시백을 바라보았다.
서재호 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 모두 잔을 든 채 양시백을 바라보았다. 얼결에 큼직한 크림 새우를 한입에 먹던 것을 꿀떡 삼키고 얼른 잔을 들었던 양시백은 어리둥절하기 짝이 없었다.
"뭐야, 갑자기 왜 다들 절 보고 그래요?"
"자, 그럼 양시백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에서, 건배!"
"양시백 씨,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해요, 형!"
"생일 축하드려요, 오빠!"
옆에 앉은 권혜연에게 뭔데요? 하고 눈으로 물었으나 권헤연은 눈을 찡긋하며 어서 잔을 들라고 고갯짓할 뿐이었다.
"건배..!"
양시백이 작게 외치며 잔을 들어올리자 다들 잔을 번쩍 들고 옆에 있는 사람과 잔을 몇 번 부딪쳤다.
"이렇게 거한 생일상은 또 처음이네..."
"마음에 들었어?"
"어....음....황송하죠."
"뭐, 양시백이 생일 맞아서 맛있는 것도 먹고 축하도 하고 그런거지."
"저 빼고 다 알고 있었던 거에요?"
"음, 아마도?"
"다들 연기 잘 하시네."
"그래도 기분 좋죠 오빠?"
"그럼 당연하지."
양시백은 콜라를 쭉 들이킨 뒤 꿔바로우를 집어먹었다.
맞은편에서 돌도 씹어먹을 기세인 신호진과 문현아, 옆쪽에서 자매처럼 보이는 권혜연과 홍설희의 모습들을 보니 문득 관장님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갔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
"좋은 날에 그리 슬픈 얼굴이어서 되나. 자. 한 잔 받아."
"뭔 콜라를 술처럼 따라주신대요?"
"왜, 맥주 줘?"
"됐어요. 콜라랑 맥주 같이 마시면 건강에 안 좋대요."
"아니 그런 비극적인..맥콜은 더 이상 못 먹겠군. 여튼 자."
"예에."
빈 잔에 콜라가 또 가득 찼다. 양시백은 곧 씩 웃었다.
"맛있는 밥이라서 좋기만 한 걸요."
"나도 그래. 얼마만의 회식인지 몰라."
"오늘 저녁 감사합니다. 아저씨 덕분에 배 터지게 먹고 있어요."
"암, 그래야지."
양시백 역시 서재호의 빈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짧게 건배를 짠 한 뒤 잠시 쉰 젓가락을 마저 놀리기 시작했다.
***
마지막으로 나온 고추잡채와 꽃빵까지 야무지게 먹고 식후에 나온 매실차까지 아낌없이 마신 뒤 나온 여섯 명은 전에 없이 빵빵한 배를 통통 두드리며 나왔다.
"자, 시간이 살살 늦어가니, 학생들은 어서 귀가하도록 해."
"잘 먹었습니다. 현아는 제가 잘 바래다 줄게요."
"정말 잘 먹었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잘 들어가라!"
"잘 가요~!"
둘을 먼저 보낸 뒤 서재호가 홍설희에게 물었다.
"설희는? 혜연이네 가니?"
"네! 언니가 내일 데려다준다고 했어요."
"잘 먹어서 볼이 탱글하구만. 잘 들어가고, 설희를 부탁하지."
"뭘요. 저도 설희와 있으면 적적하지 않고 좋은 걸요. 재호 씨. 잘 먹었어요."
"나중에 한 판 거하게 사달라고."
"네. 노력해볼게요."
홍설희와 손을 잡은 권혜연도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생일날인데 케이크 한 조각 먹어줘야지."
"...배 안 부르세요?"
"그야 배부르지만, 한국인은 밥 배랑 디저트 배는 따로 있지 않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실거죠?"
"자넨 바닐라 라뗴고."
"모십죠."
혼자긴 하지만 사람들이 있어주어서 외롭지 않았다.
오늘처럼 배불리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의 생일날도 이렇지 않을까?
양시백은 오늘따라 달도 참 밝다고 생각하며 서재호와 잠시 앉았다 갈 카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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