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주황건오

"아, 대장 나리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광수대에 복귀해서 시간이 통 나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지, 어머님도 사양했고."

"할머니, 체력이 많이 떨어지셔서 여행 이전에 가벼운 운동부터 하셔야 겠더라."

캡 모자를 쓴 김주황과 허건오는 기차 안 좌석에 앉아 조곤조곤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말한 것처럼 본래는 하태성과 그의 어머니 박재분과도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둘 모두 사정이 되지 않아 여행 인원은 김주황과 허건오 단 둘뿐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적적할 줄 알았으면 태권도나 순경 누님 껴서 인원수라도 불릴 걸 그랬어."

"내가 있는데 뭐가 적적하냐?"

"고릴라가 재미있기를 해, 유쾌하기를 해. 여행동무로는 영 빵점이야."

"내참, 너는 재미있는 놈이고?"

"아니, 나처럼 잘생기고 귀여운데다 센스있기까지 한 남자가 또 어딨는데?"

"센스가 얼어죽었다냐.."

그렇게 말은 했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허건오는 다른 이들과 투닥거리면서도 적당히 가볍고 이야기 상대로 그럭저럭 점수를 먹고 들어가는 게 보이긴 했으니까. 상대가 자신이기 때문에 그게 영 안 먹히는 거라면 재미없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문제점은 제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김주황이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허건오는 기차 안에서 파는 삶은 달걀과 음료수, 과자며 소시지 같은 것을 잔뜩 사고는 김주황에게도 반쪽 분을 나눠주었다.

"고릴라, 뭐해, 나 옆에 두고 도 닦아?"

"잠시, 생각 좀."

"무슨 생각?"

"네 말마따나 여행 분위기 재미없는 게 내 탓인가 하는 생각."

"웩, 안 어울리게 뭐 그딴 생각을 하고 있어? 내가 쌈바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즐겁게 해 줄 테니 그런 칙칙한 생각 따위 집어 치우라고. 훠이, 훠이."

"말은 잘 해요."

김주황은 픽 웃으면서 삶은 달걀을 쥐고 톡톡 두드려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

역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운 뒤 눈을 잠시 붙이기도 하고, 시시각각 바뀌는 바깥 풍경을 창으로 바라보기도 하다가 겨우 목적지에 도착한 허건오와 김주황은 기지개를 펴며 몸을 푼 뒤 내렸다.

"아으~ 아주 그냥 몸이 찌뿌둥하네."

"바다 가고 싶어했는데, 바다 먼저 갈 거냐? 아니면 다른 데 갈 데 있으면 말해봐."

"그래도 둘이 여행 왔는데 따로 움직일 생각은 아닐테고, 고릴라는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음?"

"바다도 같이 보겠지만, 거 고릴라도 기껏 내려왔는데 어디어디가 보고 싶다~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걸 먹어보자~ 같은 희망사항이 있을 거 아냐. 생각해보니 계획 짤 때도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다만 들었던 거 같아서."

허건오가 모자 끝을 쥐며 묻는 것에 김주황은 크게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여행이라고 해 봐야 별 거 없어. 그냥 평소 있던 곳과 다른 풍경을 담아두고 맛있는 거 먹고, 느긋하게 쉬다가 남이 청소해 주는 방에서 잠드는 걸 즐기는 거지. 여튼 나도 바다 말고 갈 데 많으니 걱정 마셔."

"그렇다면야 뭐..."

햇볕을 맞으며 길을 걷다가 그새 또 배고프다고 핫바 하나, 호떡 둘, 계란빵 둘을 순식간에 해치운 두 사람은 숙소에 짐을 두고 옷차림을 다듬은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버스를 타고 걸기도 하면서 하얗고 노란 빛이 섞인 은회색 바닷가에 당도했다. 볕이 뜨거웠던지라 그늘에서 바닷가를 바라보기만 했지만 먼 거리에서도 철썩거리는 작은 파도소리와 솨아아 하고 들리는 물소리는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밤에 와도 괜찮을 거 같네."

"쌍쌍이 데이트 하기 좋을 거 같긴 하네. 모래사장도 넓고."

"데이트 하고 싶다고?"

"나 같은 핸섬 가이가 혼자 걷고 있으면 괜히 애 먼 사람들이 내 매력에 뿅 갈지도 모르니까 주의하라는 소리라고."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햇볕이 너무 따가우니 그럼 밤에 저녁 먹고 산책 겸 오자고."

"또 어디 가 보게?"

"버스 타고 이 주변을 빙 돌아다닐 수도 있고, 관광 명소로 이름 높은 곳들 몇 들러서 눈도 조금 높이고 기념품도 사고 그럴 수도 있지. 어느쪽?"

"둘 다 좋지만 딱히 관광 명소는 크게 가까운 거 아님 됐어."

"테디베어 박물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나 가볼까."

"웬 곰인형? 고릴라, 곰인형 좋아해?"

"나름 명소 중 하나라고. 뭣보다 사서 갖고 있을 정돈 아니지만 곰인형 정도면 귀엽지 않냐?"

"안 어울려."

"어울리라고 좋아하는 거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투나, 생각할 법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그 정도 대화는 싸우는 축에도 못 꼈다.

허건오는 그럼 거기 가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 배고파, 배고파."

"곰인형, 어땠냐?"

"귀엽더라. 나 정도는 아니지만."

"못 말리는군."

"여튼, 생각지도 못 했는데, 의외로 귀엽고 좋았어. 고릴라."

"알면 됐어."

박물관까지 가는 길이 멀었고 어찌됐건 점심은 먹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몹시 허기져 있었다. 늦은 점심이긴 했지만 일단 밥부터 먹자며 뭘 먹을지 고민하던 그 때였다.

"저기...잠시만요."

허건오와 김주황, 두 사람 모두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빙글 돌렸다.

긴 머리의 여자였는데 우물쭈물하는 것에 혹 길이라도 묻는 건가 싶어 서로 어쩌지, 묻는 순간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허건오가 너스레 떨지 않고 나서려는데, 여자가 김주황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고개를 푹 숙였다.

"......."

"......."

"......."

침묵 끝에 김주황이 얼른 입을 열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애인이 있어서..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되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작에 웃어보인 김주황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것에 여자는 죄송합니다, 하며 인사하고는 등을 돌려 거리로 향했다.

"인기 좋으셔, 고릴라. 엉?"

"내참, 너야말로 당연하게 나서려고 했으면서."

"그래도 저렇게 연락처 달라고 하면 기분 좋지 않아?"

"질투하는 누구누구 씨가 있는데 어떻게 기분 좋겠냐."

"지일투우? 내가? 하!"

허건오가 콧방귀를 뀌더니 팔짱을 척 꼈다.

"알면 됐어."

"..더운데 팔은 좀 빼지."

"아 몰라, 이런 일 없게 식당 들어갈 때까지만 이러고 있어."

"못 말려."

김주황은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어디로 들어갈까 고민하며 길을 걸었다.

고된 일상속에서 사치라고만 생각했던 여름 휴가의 첫 단추가 그렇게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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