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도시 전력90분
평평하게 서 있던 몸이 사선으로 턱 기울어졌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 짧은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 딱 멎었다가, 거짓말처럼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시커매졌다. 귓가를 매섭게 하는 소리도, 쿵 하는 소리도, 뜨뜻한 것이 콸콸 쏟겨지는 축축하고 기분 나쁜 소리도, 무어라 소리지르는 것도 모조리 휙휙 지나가 사라지고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
최재석이 높은 곳에서 내동댕이 쳐진 것처럼 소스라치며 몸을 파득 떨었다. 가만히 서 있었음에도 몸의 떨림은 멎지 않고 계속되었다.
"뭐, 뭐지, 방금 그건..."
양동 작전을 제안하고 배준혁과 함께 옥상으로 도로 올라온 최재석은 빌딩 옥상에서 1층에 집결한 패거리들을 향해 외치다가 막 등을 돌려 몸을 피하려던 순간 배준혁에게 밀려 떨어졌고, 쿵, 철퍽하고 제대로 된 인식조차 하지 못 하고 끝이 났었다. 죽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최재석은 지금 분명히 살아있었다.
배준혁 씨가 나를? 왜?
내가 본 것이 꿈이나 환상 같은 게 아니라면, 이미 겪은 것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뭐지?
최재석은 도무지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최재석 씨."
유독 서늘하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배준혁이 옥상 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재석은 흠칫했지만 곧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병색이 깃든 얼굴만 보면 살의를 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되지 않았다.
"아래 상황이 어떤지 봐주시겠습니까?"
"....."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최재석 자신은 옥상 난간 아래 1층을 내려다 보았다가 그대로 밀려 떨어지는 끝을 맞이하게 되고 만다. 그래서는 안 됐다. 그에게는 해야할 일이 있었다. 유상일을 막는 것, 양시백과 함께 돌아가는 것, 이제야말로 감추어왔던 모든 일들을 털어놓는 것. 최재석은 그러기 위해 선택했다.
"방금 봤습니다. 1층에 양시가 먼저 내려가 있더군요. 시간을 어느 정도 끌어줄 테니 저희도 얼른 내려갑시다."
"호진 군과 혜연 씨는 괜찮을까요?"
"괜찮길 바라야지요. 서두릅시다. 옥상까지는 외길이라 막히면 끝이에요!"
일단 모른 척 하고 이 장소를 벗어나자고.
최재석은 얼른 다가가 배준혁의 어깨를 툭 치며 자엳스레 옥상 계단을 뛰어내려갔고, 배준혁은 멈칫하는 듯 하다가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갔다.
제가 과민반응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두 아이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점, 친구가 선을 넘어 영영 돌아오지 못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박근태가 사람을 동원해 시시각각 압박해오는 것 그 모든 것에 예민해져 있어서 압도된 나머지 깨어있는 상태에서 그런 괴상한 환각을 본 것일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목숨이 꺼져가던 감각이 너무도 선명했다. 무엇보다, 미세하게나마 멈칫하던 배준혁의 반응이 최재석의 등골을 더할 나위 없이 서늘하게 했다.
진짜다.
최재석은 어떻게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배준혁이 조금 전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만 저릿하게 실감했다. 이마에 어린 땀을 훔치며 배준혁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것도, 무어라 이야기를 청하며 붙잡거나 이동을 지체시키려 할 때마다 짐짓 서두른 것도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밀치거나 몸으로 부딪쳐 올 수도 있겠다 싶어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최재석은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1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관장님!"
"양시!"
"늦게 나와서 걱정했잖아요!"
"그래, 미안하다. 녀석들은?"
"몇 놈은 제가 쓰러뜨렸어요. 다행히 대부분은 아직 건물 안에 있나봐요."
살았다.
최재석은 내심 안도하며 한숨을 뱉었다. 양시백이 얼른 외쳤다.
"아, 준혁 선생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다행이다. 그럼 일단, 도장으로 가요. 지금 일도 있고 관장님이 돌아온 이상, 함부로 쳐들어오진 못 할 거에요!"
위용위용 하는 경찰차 특유의 사이렌 소리에 최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뒤의 배준혁의 얼굴을 보았다.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이었다. 헌데 표정을, 감정을 읽어내기 몹시 어려웠다.
"저도 같이 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시죠. 자, 갑시다!"
최재석은 되도록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주 힘든 일이었다.
***
도장에 온 세 사람은 한숨을 돌렸다.
양시백은 권혜연에게 무사히 빠져나왔다면 도장으로 오라며 문자를 보내고 있었고, 최재석은 휴대폰을 충전시키며 제가 메모한 연락처에 통화 시도를 했다. 배준혁은 잠시 근처 편의점에서 요기할 것을 사 오겠다며 나간 참이었다. 양시백이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손에서 놓자 최재석이 얼른 손짓했다. 말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러주어야 할 것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의 기희는 없을 것 같았다.
"양시."
"네, 관장님."
"..가만히 잘 들어라. 내가 만약에..만약에 죽거나 크게 잘못되면, 네가 해 줘야 하는 일이 있다."
"그런 약한 말씀 마세요!"
"가만히 들으라니까."
".....알았어요. 뭔데요?"
"관장실 창문이랑 면해 있는 우리 책상을 들어내보면 편지봉투가 테이프로 붙어있을 거다. 그걸 읽어봐라."
"뭔지 몰라도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니까, 약한 소리 마세요."
양시백은 호언장담하듯 말했지만 최재석은 배준혁이 제게 품은 연고 없는 무색의 살의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이번 일이 조용히 잘 끝나면, 내가 직접 그 봉투 안에 있는 게 뭔지 네게 직접 읽어주며 이야기 해 줄거야. 유언장 같은 거 아니니 쫄지 말고!"
"알았어요.."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작게 나더니 배준혁과 권혜연이 도장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무사히 탈출하셔서 다행이에요!"
"권혜연 씨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최재석 씨. 아까 통화하시는 것 같던데, 상일 선배와 통화했던 자가 누구인지 파악된 겁니까?"
"..예.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야할 곳을 알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게 어딘데요?"
양시백이 튕기듯 말했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자동응답기가 대신 받더구나. 오미정 미용실입니다. 현재 영업 시간이 아니므로 다시 연락해 달라고."
배준혁의 낯빛이, 조금 바뀌었다.
***
결과적으로 날이 밝은 뒤의 행적은 연달아 헛방이었다. 오미정은 유상일의 계획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최재석이 알고 있는 유상일의 쪽방을 뒤져보았지만 출입한 흔적이 없었다. 최재석이 동훈 빌딩에서 풀려나오면 쪽방으로 바로 올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돌아오지 않은 듯 했다. 건진 단서라고는 성중경찰서 1930, 박근태 자료 전달이라는 메모뿐이었다. 그 외에는 마땅히 뒤를 쫓을 만한 단서가 없어 권혜연이 7시 30분 경 성중경찰서의 정보를 얻는 것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저녁까지 체력을 아끼고 주변을 경계하며 시간을 보낸 넷은 메모된 시간 7시 30분에 가까워지자 신겅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권혜연이 주정재에게 연락을 취하는 동안 배준혁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 했다.
"..네. 아저씨. 저에요. 무슨 일...있으세요?"
"......"
"네? 탈출요? 네, 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럼 끊을게요, 네, 네."
권혜연이 통화를 마친 뒤 속사포처럼 얘기했다.
"큰일이에요..! 거리에서 목격된 유상일이 체포되었다가지금 보호소에서 막 탈출했다고 해요! 문제는, 지금 속보가..속보가 떴다고 해요."
"속보요?"
양시백이 얼른 리모콘을 집어들어 고물 TV의 전원을 켰다. 화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지지직 거리는 소음과 함께 소리만이 도장 안에 울렸다.
-.....유 모 씨가 당시 책임자였던 박 의원의 딸 모 양을 납치해 협박 중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인데요. 박 의원은 현재 종적을 감춘 상태라고 합니다.
싸악, 도장 안의 온도가 단숨에 내려가 버리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충격적인 뉴스 속보 내용이 네 사람을 후려쳤다.
***
"...준혁 씨가 박근태의 은신처를 안다니 다행이었어요. 상일이도..거기 있겠죠?"
"..예. 상일 선배는 박근태가 있는 곳에 있을 겁니다. 보호소 탈출 사건과 인질극이 익명 제보로 사건이 완전히 물 위로 떠오른 이상,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이미 한참 지났으니까요."
백석 빌딩 내로 진입한 최재석, 양시백, 배준혁은 펜트하우스를 목적으로 움직였다. 어두운 지하실을 지나고 마침내 안으로 진입하기까지 제발 늦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듯 외던 최재석은, 어둡고 긴 통로를 지나 마침내 펜트하우스 안에 발을 들이밀었다.
"..준혁이, 재석이..!"
"유상일!"
"박근태.."
"네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밑도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거냐..!"
박근태의 말에 최재석은 욱하는 것을 꾹 참고 유상일을 바라보았다.
"제발..여기서 그만둬라, 상일아. 네가 어떤 심정인지 알지만..그렇다고 두 아이들의 생명을 거는 건 옳지 않아. 부탁이다."
"난 멈출 생각이 없어. 그러기엔 너무 늦었고."
유상일은 아랑곳않고 박근태를 보며 점퍼 주머니에서 장치박스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박근태에게 내밀었다.
"자, 근태 형님. 하던 얘기를 마저 해야지. 아이들에게 아연이 때와 똑같은 폭탄을 설치했어! 버튼을 누르면 홍설희의 폭탄이 폭발하고, 누르지 않으면 두 아이의 목숨이 위험해 질 거야. 형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유상일! 너, 정말...!"
"..내게 그 선택이 무슨 득이 있지?"
"선택받지 못 한 아이의 목숨값을 영원히 지게 되겠지. 자, 용감히 누르겠다면 박수정의 위치를 알려주고 안전도 보장하겠어."
유상일은 으쓱이며 장치박스를 내보인 채 웃었다.
양시백은 분노에 이를 북 갈며 몸을 떠는 채로 유상일을 바라보았고, 낯빛이 좋지 못 한 배준혁은 당장이라도 나설 듯 했다. 박근태가 장치를 받아들고 버튼을 누르면 끝이었다. 하지만, 박근태는.
최재석은 그 순간 자신이 왜 이 곳에 서 있을 수 있었는지 알았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그것을 위한 모든 것이었다.
"위험해!!"
박근태는 내렸던 손을 거짓말처럼 빠르게 유상일에게 총을 겨누고, 갈기듯 쏘았다. 탕, 하는 두 개의 소리가 겹치듯 울렸다.
"관장님!!"
푸른 옷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등에서부터 가슴을 꿰뚫은 총상. 치명상이었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가만히 있는 유상일을 밀쳐내고 총알을 몸으로 받아낸 최재석은 쓰러지면서 피를 토해냈고, 꿰뚫린 자리에서도 피가 울컥거리며 솟아올렸다. 양시백은 얼른 달려와 유상일도 박근태도 본 체 만 체 하며 쓰러진 최재석을 안아올렸다.
"아, 아, 안 돼, 관장님, 관장님!! 안 돼요.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 이렇게..이럴 수가 있어요!!"
박근태!!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주변이 한 차례 더 시끄러웠지만 최재석은 빠르게 분간할 힘을 잃고 있었다. 겨우 양시백에게 초점을 고정시키고는 말했다.
"..울지 마라, 양시. 내가..쿨럭, 다, 미안하잖아..난..나는..죽어서라도 상일이를 막아설 생각이었어..그뿐이야, 그러니.."
죽음을 피해 최대한 달아나 온 거라면, 더 이상 피하지 못 하고 죽을 목숨이라면, 마지막은 제가 선택하겠다고 마음 먹은 결과가 지금 이 순간이라는 모진 말을 눈물 짓는 양시백에게 들려줄 수는 없었다. 유상일은 제 앞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친구의 모습에 한 마디도 하지 못 했다.
"사, 상, 일아. 미안...미안하면...마음에, 거, 걸리면, 부탁..부탁 하나만.."
숨쉬기 힘들 만큼 피로 끅끅거리면서도 최재석은 말을 쥐어짜냈다.
"죽지 마, 죽지..마라. 알겠지? 죽지...."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죽어서 오면, 가만 안 둔다.
유상일이 반사적으로 알았으니 죽지 말라며 중얼거렸다. 최재석은 힘겹게 양시백에게 말했다.
"...양시. 너도..꼭 살아남....거다. 알겠지.."
다시금 탕, 하는 소리가 번쩍 들렸다. 양시백은 최재석을 감싸듯 꼭 안았다.
제가 유상일을 돕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납치될 일도, 이런 끝을 맞이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모를 일. 모를 일이었다. 최재석은 제 죽음에서 달아났던 것처럼, 시간을 되돌려 사건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제가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애초에 없는 기회를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이었다. 다만, 더 이상 제 손이 닿지 못 할 앞으로의 급박한 상황에서, 두 사람과 두 아이가 살아남기를, 또 살아가기를 빌었다.
"...아저씨..."
나, 잘 한 거지?
그렇지...?
최재석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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