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30

5주년 기념글

비 한 번 긋고 나니 지독한 무더위가 조금 누그러진 기분이 들었다.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와라, 양시. 친구 데려올 거면 미리 말하고."

"관장님도 참, 제가 애에요?"

"헉...설마 우리 양시, 친구 없냐?"

"나 참, 농담 그만 하세요."

말은 그렇게 주고받았지만 모처럼의 외출이었다.

빠르게 다가와 길게 지속되는 무더위에 관장님은 여름 휴가를 조금 앞당겼고, 또 길게 잡았다. 좋지 않았지만 뉴스를 타면서 되려 유명세를 조금 탔고, 도장은 넉넉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이전보다는 확실히 수입이 는 상태여서 긴 여름 휴가를 견딜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도 여유롭게 아르바이트 자리 구하지 않고 이렇게 마음 놓고 외출할 수 있게 됐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대충 꾹 넣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

카페에 들어와 있자 익숙한 뒷모습들이 보여서 얼른 다가갔는데, 돌아보는 사람이 셋이 아니라 넷이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고개 숙여 인사 한 뒤 허건오에게 물었다.

"그, 여기 계신 이 분은 너랑 많이 닮았는데 혹시..형이신가..요?"

"아, 그래, 뭐...내 형이야."

"형이..있었구나. 가족 얘기는 통 안 해주니까 몰랐네 응."

"뭐, 불만 있어?"

"소개해 달라는 말을 그렇게 고깝게 듣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정말."

누가 보면 싸우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몇몇은 나를 돌아봤다- 하태성이나 김주황은 그런 상황에 몹시 익숙해져서 시킨 음료수를 홀짝 마시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결국 그 허건오네 형 쪽에서 먼저 인사했다.

"허현오입니다. 말한대로, 이 녀석, 건오의 형입니다. 하태성 씨가 딱히 할 일 없으면 다 같이 노는 게 어떻냐고 권유해서..건오랑 같이 왔습니다."

"허 '연' 오가 아니라, 허 '현!' 오니까, 발음 주의하도록 해라."

"아, 저는 양시백이라고 합니다. 저, 동생인 허건오와는 그럭저럭 아는 사이입니다."

"양시백 씨, 저희끼리는 인사 나눴습니다. 음료 주문하고 오세요."

"아 그럼 음료수 좀 주문하고 올게."

녹차 라떼 아이스를 주문하고, 그걸 픽업한 뒤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다들 이렇게 모였으니 근황 얘기나 좀 해 볼까."

김주황이 입을 뗐다.

"이쪽은 검정고시 합격하고 알바 뛰면서 한숨 돌리는중."

"저야 뭐..광수대에 복귀해서 일 없으면 다른 부서 일 떼어다 도와주고 일이 있으면 동료들과 함께 장기 수사에 투입되거나 합니다. 아, 어머니는 정정하게 잘 계십니다."

"나도 요번에 일자리 구해서 반년 넘게 자알 다니고 있다."

"우리 도장도 별일 없어. 그냥 라면 먹던 시절은 벗어난 정도."

"어유, 팔자 폈네, 양시백이?"

"그 관장님, 사람 좋은 만큼만 잘 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헹, 그러면 우리 도장 백만장자 되어야지."

"형, 형도 근황 얘기 좀 해 봐."

"건오가 집에 들어와서 가끔 어머니에게 애교를 부리는데, 딱 제 퇴근시간에 칼 같이 맞춘 듯 절묘해서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아이 씨, 누가 그딴 걸 근황이라고 나열하고 앉아있어?! 일이 힘드네, 날이 덥네 같은 걸 말하란 말야!"

형제가 -정확히는 허건오만 일방적으로- 투닥거리는 동안 나는 하태성을 보았다.

"좋아보이네."

"덕분에요."

"아주 가끔 그 때 생각이 나는데, 이렇게..다 지난 일 떠들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저도요. 아찔한 순간이 한둘이 아니었잖습니까."

"재수가 억세게 좋았던 거지, 뭐."

"빡빡이, 김주황. 사채 일 손 뗀 거 축하."

"너도 불법 사채 뒤집어 쓸 뻔한 거 벗어난 거 축하. 그보다, 그놈의 빡빡이 호칭은 어떻게 안 되나? 머리도 길렀는데."

"아, 실수. 입에 붙어서."

김주황은 몰라보게 머리를 길러서 가끔 못 알아볼 정도였다. 어깨를 으쓱하던 김주황이 화제를 돌렸다.

"거 카페에 계속 죽치고 있을 것도 아닌데 자리 옮기자. 남자 다섯이서 갈 수 있는 곳들 각자 좀 말해봐."

"PC방! PC방 가서 다같이 게임 때리는 건 어때?

허건오가 눈을 빛내며 말하는 것에 하태성과 김주황은 그 형이라는 허현오 씨까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컴퓨터 게임 좋아하긴 하지만 돈 주고 PC방에 갈 만큼 좋아하지는 않아서 전원 만장일치로 반대를 외쳤다.

"기각."

"애송이, 너만 여기서 PC 게임하는 거 누가 모를 줄 아냐."

"노래방은 어때?"

"못 불러."

"아, 저도 좀..."

여러가지 안이 휙휙 나왔지만 다섯의 의견이 취합되기가 영 쉽지 않았다.

재호 아저씨에게 들었던 것을 떠올린 내가 스스로도 참 신통방통하고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

내 의견은 바로, 보드게임 카페였다.

결국 또 카페냐. 음료수로 물배 차겠다. 컴퓨터 게임하러 가자고 할 때는 싫다더니 보드게임은 괜찮냐. 상관없다.

...등등의 말이 나왔지만 막상 오니 다들 보드게임 카페를 몰라서 안 왔던 게 아닐까 의심될 만큼 흥미진진해했다.

"아싸! 더블! 한 번 더 굴린다?"

에어컨 빵빵하게 돌아가는 데다가 룸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다소 시끌벅적했지만 독립된 공간에서 놀고 떠들고 마실 수 있어서 괜찮았다. 돌아가면서 젠가도 하고, 통아저씨 게임도 하고, 원카드에 인생게임까지 알차게 할 즈음, 시간을 간간이 확인하는데, 그 때마다 시간이 훌쩍 흘러있곤 했다. 6시를 넘겼음을 확인한 순간 배가 짜르르 고파왔다.

"크아, 벌써 6시네. 슬슬 밥 먹을까 하는데, 어때?"

"아이씨, 대장 나리의 돈을 갈퀴로 쓸어담으려는 이 순간에 산통을 딱! 깨네 그냥."

"어쩔 수 없지. 나도 배고프고. 이만 정리하자고."

"체. 담엔 이겨줄 거야, 대장 나리!"

"..알겠습니다."

하태성과 허현오 씨가 펼쳐두었던 인생게임 말들이며 판들을 차곡차곡 정리할 즈음 나와 김주황은 마신 음료수며 디저트의 빈 접시들을 가져다 놓았다.

"아, 막상 또 나오니 거짓말처럼 배고프네. 형, 형은 어때?"

"먹어도 안 먹어도 괜찮아."

"황희 정승이세요? 이놈도 저놈도 괜찮게."

두 사람은 아까 싸웠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나란히 걸어갔고, 나와 하태성, 김주황이 뒤를 따랐다.

"거 솔직히 3인조 중에 허건오 저 녀석이 제일 걱정됐는데, 그럴 필요 없었나 봐."

"저래봬도 멜로 드라마 보면 질질 짜는 거 보니 영 마음 약하더만?"

"..그건 저도 몰랐는데..주황 씨, 언제 그런 사실을 안 겁니까?"

"별 건 아니고..가끔 나랑 술 진탕 마시고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가거든? 근데 밤중에 우는 소리 나서 들 깬 와중에 나와보니까 저 녀석이 드라마 보면서 흑흑 울지 뭐겠어."

"아, 나도 가끔 그래."

"거기 뒤에! 내 욕했지?! 지방방송 그만하고 얼른 따라오라고!"

그 순간 느꼈다.

내 옆에 있는 둘은 물론이고, 저 만치 떨어져있는 허현오 씨까지 들릴 리 없는 마음의 목소리가 하나되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귀신이네.'

***

저녁밥을 먹고 또 떠들다보니 하늘이 훅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요. 허현오 씨도 즐거웠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주책맞게 끼어든 게 아닌가 싶었는데요..저도 즐거웠습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 참, 살다보니 형이 내숭부리는 걸 다 보네? 별일이야~"

하태성이 웃으며 허건오의 옆구리를 꽉 꼬집었고, 허건오는 우악! 하는 소리를 터트리며 몸을 뒤틀었다.

"아욱, 옆구리야...그래서, 슬슬 파하는 분위기인데, 2차 가?"

"카페만 2번 들른데다 밥도 배불리 먹어서..무리야, 건오."

"그렇죠."

"그렇네요."

"그럼 남은 건 해산이네. 다들 여름 가기 전에 더위먹지들 않게 조심하라고!"

김주황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것을 신호로, 하태성과 허 씨 형제와도 인사를 나눈 뒤 등을 돌려 종로구 거리를 걸었다.

시간을 보니 7시 30분이었는데, 버스 타면 20분, 걸어가면 30~40분쯤 걸리니까 적어도 8시 언저리에는 도장에 도착하고도 남았다.

걸어갈까, 도 생각했지만 에어컨을 쐬지 못 한 피부가 덥다고 땀을 뱉어내고 있었다.

이동하는 에어컨 버스를 타고 얼른 또 다른 에어컨이 기다리는 도장으로 빨리 돌아가기로 했다.

***

도장에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이 살랑였고, 난 아주 새삼스럽게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오, 돌아왔냐, 양시! 의외로 일찍 돌아왔네."

"뭐 그렇죠. 밥 잘 먹고 놀다가 해 지니까 다들 얼른 헤어지게 되더라고요. 다들 새나라의 어린이도 아니고.."

"즐거웠음 됐지!"

"아무렴요."

"내일은 내 차례다. 상일이랑, 준혁 씨랑, 재호 씨랑 다같이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먹기로 했거든."

"우리 관장님, 신나셨네요. 제 안부 잘 좀 전해주세요."

"오냐."

창문에 블라인드를 친 뒤 옷을 갈아입고 막 씻으러 들어가려는데 관장님이 불러세웠다.

"양시."

"네."

"오늘 줄거웠냐?"

"네."

"내일도 즐겁게 보내자."

"네."

"그 다음날도."

"왜 이렇게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그러실까, 우리 관장님?"

"원래 나이 먹으면 세상 걱정하는 일이 많아져서 그래."

"즐겁지 않은 날이 오더라도 관장님이랑,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괜찮을 거에요. 그러니까 미리 사서 걱정하지 말라고요."

"암, 그래야지. 예전보다 밝고 씩씩해서 관장님은 참 마음이 훈훈하다, 양시."

"하, 우리 관장님 실없으시긴."

씻은 몸을 에어컨 바람에 뽀송하게 말리면서 대충 자리를 잡고 TV를 보는 일은 어느 집에서나 있을 법했다. 우리 모두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흔한 행복이 깃든 일상이 깨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임을 깨달았고, 지금의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가끔 이렇게 약한 소리를 하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울고, 웃고, 화도 내고, 농담도 주고받는 그런 일상. 나는 문득 TV에 집중하는 관장님의 옆얼굴을 보았다.

"관장님."

"엉야."

"내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면 도장 문 안 열어줄 거에요."

"아이고, 누구 말씀이라고 안 조심할까용. 명심하지요."

졸려올 때까지 TV를 보다가 잠들고, 일어나면 또 아침이겠지. 어쩐지, 갑자기 피곤해져왔다. 기분 좋은 졸음이 스륵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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