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讚美)

권현석이 죽었다.

박근태 자신의 선택, 자신의 결단이었다. 그 결정 과정에 장희준은 없었다. 말을 보탠 적은 있었지만 유상일처럼 격양시켜 자멸시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도세훈 경사를 죽인 것은 오인 사격이었다. 장희준이 덮고 스스로 묵인해 오인으로도 자신이 죽였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박근태에게 권현석의 죽음이야말로 최초의 살해나 다름없었다. 살의를 내재하고, 계획적으로 장기말을 굴려 권현석을 사지로 불러내 숨통을 끊는다. 결과적으로 주정재, 타인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박근태가 그간의 연에 순간적으로 준하는 살의를 품고 그곳으로 향하게끔 등을 떠밀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아무 것도 아닌 목소리가 박근태의 속내에 말을 붙였다. 권현석을 애증했기에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그 곧음이 더 이상 자신과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죽여버린 것이 아니냐고. 애증 따위가 아니었다. 우습게도 박근태는 그 물음에 곧바로 반박할 수 있었다. 질투나 시샘 따위도 아니었다. 단순한 어느 하나의 감정 때문이었다면 이토록 자해하듯 괴로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왜. 박근태는 물음을 던졌다.

권현석을 죽이면서까지 선택한 길이었다.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자수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박근태는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또 극복해내야 했다. 목숨줄을 쥔 장희준에게 처분되지 않으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결말이었다. 권현석을 죽인 게 최악은 아니었다는 거군, 하는 목소리가 다시금 마음을 때렸다. 괴로워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면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불면의 밤 눈밑으로 졸음 아닌 것들이 매달려 마지막으로 들은 것을 강제적으로 재회상하며 끝없이 시달리는 것이 최악이 아니라고? 함부로 말을 던지는 목소리에 박근태는 분노했다. 하지만 곧 혼란스러워했다. 권현석의 죽음이 자신의 괴로움에 얕잡히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인지, 자신의 괴로움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에 분노하는 것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정리하자.

목소리. 목소리였다.

아무 것도 아닌 내면의 환청이 아닌, 권현석의 목소리였다. 박근태는 어둠속에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없었다.

실체 없는 목소리라고 하기엔 또렷하고 선명했다.

...무엇을 정리하지?

박근태는 신통한 대답 같은 것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권현석의 목소리-권현석을 닮은 목소리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대답했다.

나에 대한 것을.

그렇게, 박근태의 권현석에 대한 최후의 정리가 시작되었다.

***

권현석은 경찰이 된 이후 오랫동안 박근태의 곁을 지켜주었다. 잠입요원 작전의 발효 이후 유상일이 떠나면서 더더욱 제 자리를 지켰다. 박근태가 강경한 칼을 쥐고 휘두르는 역할이었다면, 권현석은 최강의 방패이자 유일하게 자신과 그 주변인들을 감싸 안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누군가를 포용한다는 것이야말로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박근태가 '자신만의' 사람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부터였다. 장희준에게 인양받은 장기말이 아닌 박근태의 장기말이 될 사람이. 애초에 장기말과 사람은 동일선상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었다. 권현석이 그랬듯 진심으로 더 나은 지점을 바라보며 자신과 모두를 위하고 함께 나아가려는 마음조차 없었으니, 연기할 기력조차 없었으니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장기말이 된 상일이와 나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

권현석. 권현석을 닮은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박근태의 귓전을 두드렸다. 박근태는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상상하기 싫었다. 장희준을, 큰 그림을 알게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두 사람의 모습 같은 건. 한때 유상일을 장기말처럼 다룬 적이 있었다 한들 지금 언급하는 장기말처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랬다면 장희준의 명령을 주저없이 이행해 자멸케 했을 것이다. 이미 선을 넘었음에도 상상조차 경멸하는 것은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박근태는 웃지 않았고, 권현석을 닮은 목소리도 그런 심중을 비웃지 않았다.

근태 형은 내가 되고 싶은 거야? 나 대신?

그저 물어볼 뿐이었다.

아니. 그런 마음은 내게 없어. 그럴 수도 없고.

박근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신이 죽여버린 권현석에게 무얼 바라고 있는 건가. 이미 없는 자를 평생토록 그리며 살 것도 아니고, 자수할 생각도 없으면서 대체 무엇을 위해 자신을 가둬두는가. 박근태는 지금까지 알아왔던 권현석에 대한 모든 기억들을 되새겨 보았다. 어린 날의 첫 대면. 두번째 대면. 그의 딸. 그의 목표. 바람. 그의 인간관계. 되새겨 보아도 마땅찮은 것이 없었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마저 더듬어 어떻게든 갈피를 잡아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권현석 경감의 시작은 박근태 경위로부터 시작됐어.

......

사람은 성인이 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미약하게 인정받지. 나의 생이 부모님에게서 주어졌지만, 나의 삶의 기조는 그 때 근태 형에게서 시작된 건지도 몰라.

시작.

박근태는 제가 한 서 푼 가치도 없는 연설을 떠올렸다. 감히 새롭게 태어나기로 마음을 먹었던 자신. 그걸 위해 죽는 누군가. 그걸 위해 죽은 권현석. 권현석은 지금까지의 박근태가 지금의 박근태와 결별하기 위해서 죽었어야 했다. 잊었던, 외면했던 것들이 들이닥치자 박근태는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안에서 죽음으로 떠나야만 하느냐. 나는 무엇이기에 네 죽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거냐. 이 태어남으로 박근태라는 사람은 껍데기만 남고 속은 권현석이 있는 곳으로, 그게 아니면 아무 곳도 아닌 어딘가로 떠나지 않을까. 박근태는 두려웠다. 박근태가, 박근태조차 아니게 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권현석의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도 달도 별도 없는 지독한 어둠속에서 박근태는 완전히 혼자가 되고 말았다. 권현석의 시작에는 박근태가 있었다. 그러니 박근태의 시작에도 권현석이 있어야 함은 당연했다. 다만 그것이 박근태가 얻은 새로운 삶의 시작인지, 삶을 얻은 자가 필연적으로 품어야 하는 마침표를 향한 시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박근태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며, 제가 모욕당한 것을 자신이 모욕당한 양 분개하던 권현석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은 그 파편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다가 눈을 떴다.

권현석에 대한 박근태의 최후의 정리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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