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2

양시백 생축글

양시백이 태권도장 일을 오랫동안 하면서 태권도 이외에 는 게 있다면 종이 공작 실력이었다. 자르고, 접고, 붙이고. 성인반이나 특기생들의 비중도 꽤 있었지만 아이들이 제일 많았기 때문에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면 일찍 마치고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갖곤 했다. 작은 트리와 꼬마전구뿐만으론 다소 휑한 구석이 있어서 반짝반짝 빛나는 (일반 색종이에 비해 300원 씩이나 하는) 종이를 길게 4등분해서 고리를 잇고 붙였고, 종이를 꽃처럼 겹쳐 접은 다음 눈꽃 모양처럼 잘라 전구 옆에 장식하기도 했다. 최재석도 도와주려 애를 썼으나 그런 손재주는 또 없어서 도장 내 환경미화는 온전히 양시백의 몫이었다. 도장이 문을 닫아도, 최재석이 없어도 마찬가지였다.

끄트머리만 살랑거리던 겨울은 기세를 더하며 깊어가고 있었고, 양시백의 생일과 크리스마스는 선뜻 다가와 있었다. 양시백은 침잠할 것 같은 기분을 전환해보기 위해 겨울 이맘때쯤 하던 종이공작의 부산물을 꺼냈다. 자투리 종이조각들이 많았지만 남은 종이들이 꽤 있어서 나름 힘써볼만 했다. 전기세가 조금 걱정되기는 했으나 이런 때 아니면 또 언제 꺼내서 써볼까 싶어 가장 짧은 꼬마전구선을 하나 꺼낸 뒤 연결해서 창가에 걸어두었다. 빨강, 노랑, 초록, 흰빛이 교차하며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담요를 매트릭스 위에 깐 뒤 온갖 종이를 펼쳐놓고 이것저것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금색 색종이를 4등분해 작은 금색 별과 크리스마스만 되면 카페 같은 곳에 장식되는 붉은 꽃을 접어보기도 하고, 종이 자체의 내구도를 제외하면 양시백 자신을 꽁꽁 묶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종이 고리의 끈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려 보고, 갈색 종이부터 노란 종이, 녹색 종이를 큼직하게 자른 다음 나뭇잎을 덧붙여 작은 나무 비슷한 것에 도전해보는 등 이전보다 더 정성을 쏟고 있었다.

통통통.

닫힌 도장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양시백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집중해 앉아있었다고 쥐가 나 저릿한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짠! 양시백이! 우리 왔다!"

"설희도 왔어요!"

"저도요!"

"뭐, 뭐에요 다들 갑자기?"

"뭐긴 뭐야, 놀러왔지. 보통 날도 아니고."

"안 들여보내줄 거에요, 시백 씨?"

"아, 들어오세요!"

양시백은 펼쳐놓기 바빠 치우지 못한 것들을 떠올렸지만 사람들을 추운 바깥에 계속 세워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겨울 분위기 좀 내보고 있었죠."

"시백 씨가 다 한 거에요? 솜씨 좋으시네요."

"네..뭐..감사합니다."

"저녁 먹고 다 같이 해요, 오빠."

"그럴까?"

"네!"

양시백은 재빠르게 종이와 가위들을 모아 한쪽에 몰아둔 다음, 큰 상을 가져와 서재호가 사온 피자와 치킨 박스를 척척 펄쳐놓았다.

권혜연이 홍설희와 마실 컵과 포크를 챙기는 와중에 양시백이 만든 것을 살펴보던 서재호가 물었다.

"양시백이, 나름 손재주가 있어."

"나름은 뭐에요, 나름은."

"격투 솜씨 말고도 뭔가 만드는데 솜씨가 있다는 말이었어."

"웬일이에요? 먹을 거 사온 다음에 칭찬도 하시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니 어깨춤 좀 추게 해주려고 했지 뭘. 그보다 우리가 왜 왔는지 모르겠어?"

"모르겠는데요."

"자네 오늘 생일이잖아."

"......"

크리스마스보다 이른 제 생일이 그저 다가오고 있는 줄 알았지, 바로 옆에 다가온 줄은 몰랐다. 양시백은 문득 깊은 잠의 꿈에서 깬 듯 작은 현기증을 느꼈다. 열흘하고도 며칠이 지나면 또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날들을 보내리라는 걸 받아들여야했다.

"그랬군요."

"모르고 장식한 거긴 하지만 잘 꾸몄어. 크리스마스 때까지 분발해 보는 건 어때?"

"밥 먹고 다같이 해봐야죠. 설희도 하고 싶어하잖아요."

"이런, 난 종이 자르고 붙이는데에는 젬병인데."

"그래도 한 번 해보세요. 아, 권혜연 씨는 어때요?"

"전 잘해요. 꽃도 잘 접고, 장식하는 것도 좋아해요."

"그래요? 저 못 접는 거 많은데 있다가 물어봐도 될까요?"

"다음에 종이접기 가져올게요."

"설희는 종이접기 잘 해?"

"네! 반에서 두 번째로 잘 접어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밥 먹고 합시다!"

"양시백이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서재호가 서두를 트자 권혜연이 따라 외쳤고, 홍설희가 어리둥절해하며 따라했다. 피자며 치킨을 배불리 먹고 배를 통통 두드린 채 잠시 밍기적거렸으나 권혜연이 같이 온 두 사람도 모르게 가져온 케이크를 만천하에 드러내 -생일에는 역시 케이크죠!- 맛을 본 뒤에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숨을 돌린 뒤에는 약속된 종이공작 시간이었다.

"자, 그럼 다 같이 해 봐요."

"네, 네, 사범님!"

양시백은 가위를 장난스레 찰칵거리며 움직였고, 홍설희는 가르쳐 준 것에 모양을 조금 다르게 해서 잘라보는 등 응용하고 있었다. 권혜연과 서재호는 캐럴을 닮은 콧노래를 작게 흥얼거리며 색색깔 종이로 작은 꽃이며 깜찍한 양말을 만들어냈다. 앞으로도 쭉 깊어갈 겨울이라도 지금같은 순간이 있다면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양시백은 생각했다.

문득 말간 창밖에 흰 그림자가 설핏 스쳤는데 누군가 손을 불쑥 내민 것 같았다. 좌우로 흔들리는 손은 스산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어쩐지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양시백은 가위를 쥔 손가락을 풀어낸 뒤 작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시백 오빠, 이건 어떻게 만들어요?"

"어? 아, 리본은 말야..."

양지 태권도장은 새로이 깃든 따스함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겨울도 이제까지처럼 잘 버텨낼 것이다.

흰 그림자들이 달 그림자에 묻히듯 웃으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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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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