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라면

주정재는 선진화파에 오래 몸담았다. 오래 몸담았다는 말에는 제 주변 사람들이 속되게 말해 '물갈이' 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위치라는 의미도 있었다. 흐르는 시간은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잠입요원은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고 살아남는 것으로 안전을 보증받지 못한다. 신입이든 오래 물 먹은 놈이든, 진짜 수상한 놈이어서 꼬리가 밟힌 건지, 재수없는 상황에 몰린 끝에 연출된 거짓 누명인지도 당연히 중요하지 않았다. 두목조차 제낀 김성식은 앞만을 바라보며 일을 벌였고, 선진화파는 계속되는 테스트와 거래속에서 변화를 거듭했다. 주정재 역시도 그 안에서 변해가고 있었다. 무엇이든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느냐.

"여~ 총에 맞았던 녀석이잖아. 다 나았냐?"

휴게실에는 막 끓인 더운 라면 냄새가 진동했다. 허기졌다면 군침을 삼키거나 한 젓가락 맛 좀 보자고 했겠지만 주정재는 현재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아 식욕보다는 짜증이 솟았지만, 방에서 땅 파고 있는 것보다는 짜증스러워도 휴게실에 박혀있는 게 나을 것 같아 대강 멀찍하게 놓여있는 의자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휴게실을 라면에 담궈놨네. 담궈놨어."

"미안, 그..형님한테 환풍기 좀 바꿔달라고 해야겠어. 라면 막 끓인 건데, 너도 한입 할래?"

"됐어. 너 다 먹어."

후루루룩.

짧은 거절에 남자는 곧바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후루루룩. 아삭아삭. 후루룩. 꿀꺽. 꿀꺽. 후루루루루룩.

"......?"

후루룩거리는 소리야 이해 못할 것 없지만 그 소리는 한참동안 계속 됐다.

"야, 라면을 몇 개나 끓인 거냐?"

"2개 반."

"...다 먹을 수는 있냐?"

"난 2개가 기본이야. 몰랐냐?"

덩치가 좋아서 2개 반이 기본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보통 사람은 1개가 기본이다.

"어쩐지 라면 줄어드는 속도가 빠르더니, 네가 라면 소비의 주범이었구만."

"어, 아냐 아냐. 휴게실에 있는 건 거의 안ㅇ탕면인데, 난 ㅇ라면 먹는다고. 2개 반씩 먹으니까 5개입 하나 사면 두 번 먹거든."

어떤 라면 먹는지 알 게 뭐냐.

주정재는 남자가 라면 2개 반 분의 면을 잘도 먹은 뒤 밥솥에서 밥까지 한 그릇 떠서 야무지게 말아먹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남자는 그 이후로도 라면을 곧잘 먹었다. 백반집이나 해장국집,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도 밥을 두세 공기씩 먹는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은데, 최소한 주정재와는 반경이 그리 겹치지 않았다. 가끔은 계절에 따라 비ㅇ면을 사 먹거나 부드러운 게 먹고 싶을 때는 사리ㅇ탕면 같은 것을 사다가 끓여먹기도 했다.

주정재는 어느 날 툭 물었다.

"야, 넌 라면 물리지도 않냐?"

"최재석이야."

"뭐."

"최재석이라고. 넌?"

"주정재다."

"어, 그래. 정재. 그래도 얼굴 좀 익혔는데 맨날 야, 너 이러고 말이야. 나라고 라면을 맨날 먹지는 않아. 좋아하기도 하고."

"볼 때마다 라면 먹는 거 같던데."

"네가 그만큼 휴게실 자주 찾아와서 그렇지 뭐. 언제 같이 밥이라도 함 먹을래?"

"네가 사면."

"뭐 까이거 휴게실 동지인데 밥 한 번 못 살까."

동지는 얼어죽을 동지.

그 이후 최재석은 주정재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던 식당으로 안내했고, 밥은 맛있었다.

***

최재석은 선진화파에 오래 몸담았다. 오래 몸담았다는 말에는 위기 속에서도 외줄타기를 끝내주게 잘한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실없어 보이지만 시키는 일은 웬만해선 실패하지 않는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믿음직스러운 조직원. 그게 최재석이 대외적으로 꾸려놓은 이미지였다. 사람으로서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다. 또한 경찰인 이상 맡겨진 중책을 차질없이 소화해내고 오랜 조직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꼬리를 잡았다 하면 멀어지고, 주변 사람들의 얼굴은 계속해서 바뀌고 목숨의 위협을 여럿 받았다. 거기에 수사관으로서 자신은 실격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변해가고 있었다.

"......"

식욕이 나지 않았다.

오늘은 김성식의 명령으로 탈곡을 진행하고 오는 길이었다. 상대 조직원을 때려눕히는 건 차라리 나았다. 적이고, 적을 무력화 시키지 않으면 대개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정당방위라고 자위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탈곡은 같은 조직원으로 묶여있었고 또한 이미 제압당해 무방비한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적당히라는 것은 없었다. 최재석의 정신력은 급격히 깎여나갔고 뱀 같은 김성식이 모를 리 없었다. 짬 찼다고 적당히 하다가 모가지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적당히 얻어맞은 탓에 악다물었던 입술은 다시금 터졌고 피딱지가 앉았다. 하지만 소모된 심력에 비하면 신체의 아픔은 별것도 아니었다.

최재석은 숙소에서 몸을 쉬게 하고 싶지 않아서 휴게실 벽 근처에다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급격히 피곤함이 몰려와 눈을 잠깐 감았다가 그대로 잠들자니 죄스러워 힘겹게 눈을 떴다. 몇 놈들은 최재석의 그런 모습을 보다가 말을 붙이지 않고 지나갔고, 마음 붙이는 친구는 소식을 들었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고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죽상이네."

그리고 다른 친구가 휴게실에 들어왔다.

정재. 주정재.

"...죽겠다."

"말할 기운 있어서 좋겠네. 밥은."

"생각 없어."

"그럼 숙소에 박혀있지 왜 여기서 죽상으로 앉아있냐?"

"...숙소에 가기 싫으니까. 너도 그래서 여기 계속 들락날락하는 거 아니냐?"

"술이라도 진탕 퍼먹고 잠이라도 자던가 하지 그건 또 못하겠어?"

"그만 좀 빈정거려. 골 울린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진짜 형님한테 반말하는 싸가지들 하고는...아, 됐다. 내가 자비롭게 라면이나 하나 끓여줄 테니 먹고 짜기나 해라."

"내가 치약이냐? 짜게?"

최재석이 그늘진 눈빛으로 코웃음 비슷한 것을 치거나 말거나 주정재는 찬장을 열어 라면 개수를 체크했다. 하나다. ㅇ라면도 아니다.

하지만 주정재가 알 바는 아니었다. 라면 종류 따져서 끓여줄 만큼 친밀한 것도 아니고 끓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마음 써주는 거니까. 컵라면 보다는 느렸지만 라면 하나 끓이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먹어라. 사람이 애써서 기깔나게 끓여줬으니까."

"......"

"야, 내가 끓여는 줬지만 먹여주는 취미까지는 없다고."

"....고마워."

"어우 씨, 죽상인 사내 새끼한테 고맙단 소리 들으니까 닭살이 다 돋네."

지금의 최재석은 눈빛으로 라면을 보다 빠르게 식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젓가락을 들었다 놓았다가를 반복하다가 면을 집어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후루룩거리던 소리 없이 조용했다.

조용히 입에 담은 라면을 씹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맛있네."

"......"

"맛있어."

"....."

그러고는 제 큰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었다.

상대 조직원은 있는 힘껏 패대기쳐 온 놈이 같은 조직원 때려눕혔다고 엉엉 울기는.

주정재는 속으로만 빈정거렸지만 이해 못할 것도 없었다. 그 역시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당시 엉엉 울고 싶어했었다. 분노든, 슬픔이든, 자괴감이든, 무력감이든 엉엉 울며 마구잡이로 토해내고 싶어했다. 주정재는 재수없게도, 혹은 유감스럽게도 그럴 만한 판을 깔아줄 사람이 없었다는 차이가 있었다. 제 코가 석 자인데 친하지도 않은 놈 챙기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여자였다면 눈물을 닦아주면서 작업이라도 걸었을 텐데, 괜히 옆에 있어주다가 같이 목놓아 울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야, 형님 도리는 했다.

주정재의 말은 최재석의 울음소리에 묻혀 그 귓속에 박히지 않았을 것이다.

라면이 불어터진다면 그 라면의 운이겠지. 주정재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휴게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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