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촛불. 빛 한 줄기
똑똑똑.
똑똑똑.
노크 소리. 소리쳐 부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는 휴식 시간이다.
상대는 누굴까. 언제부터 노크를 계속 했을까? 예상은 가지만 문 옆으로 다가가 낮게 물었다.
"누구야?"
"...저예요. 양수연."
"...수연 씨? 별일이군.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게 있어서.."
"지금 문을 열지. 들어오라고."
"브릿지 쪽은 어떤가요? 객실에서 나오는 걸 보이기는..."
"남자친구처럼 말이지.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마침 잘 됐다. 그 말마따나 객실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지금처럼 누가 복도에 나와있으면 단숨에 포착되고 만다. 총성이 들렸을 때 복도에 나와있었던 강수혁과 장혜진이 적잖게 받은 눈총을 기억했다. 물건을 품속에 챙기고 복도로 나왔다. 양수연은 내가 나오자 몸을 돌린 뒤 PDA 불빛으로 어두운 복도를 비추며 걸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브릿지에 가면 절로 알게 될 터다. 서준용, 우희경, 허대수. 멍석을 깔아줬다지만 단시간 내 세 명이나 뚝딱 해치운 사람치고 양수연은 무방비하게 등을 노출하고 있었다. 저를 살인자라고 점찍고 따라가는 걸 인지한 상태라면 이만한 도발은 없을 것이고, 감쪽같이 모른다고 생각하고 안심하는 거라면 그 오만으로 인해 발목이 붙잡힐 것이다. 양수연은 중앙복도에서 망설임 없이 B블럭 브릿지로 향했다. 자신이 방문했던 A블럭으로 유도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면 의외였다.
긴 복도와 방을 지나 마침내, B블럭 브릿지에 도착했고 양수연은 마침내 등을 돌렸다.
"얘기해 봐."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사실 재하 씨를 알고 있었어요. 예전 인연이지만."
"......"
"억울하게 약혼자를 잃은 저는 그 사람을 죽게 한 사람들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하려 했어요. 화제성만 뒷받침 된다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든다는 재하 씨를 만나게 됐고, 모든 것을 맡겼었죠."
"결과는 실패였지."
양수연의 고요하기만 했던 하얀 얼굴에 작은 놀라움이 스쳤다.
"알고 계셨군요."
"나도 기억해낸지 얼마 안 됐어. 이토록 차분하고 얌전해 보이는 양수연 씨가 사람 잡은 살인자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
"......"
양수연은 시선을 내리깔다가 반시계반향으로 걸음을 자박, 자박, 옮기기 시작했다. 스위치가 있는 벽면 쪽이었다. 도망칠 거라면 진즉에 자리를 내뺐을 것이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을 것이고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초기 목적이 처단이었다면, 이제는 범행이 탄로나기 전에 입막음이 될 테니까. 하지만 살인자가 거리를 좁혀 오는 건 경계해야 마땅한 지라 나도 원을 그리듯 안쪽으로 걸었다.
"이제 다 끝났어, 수연 씨. 수연 씨가 전 약혼자의 죽음에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인 건 잘 알았으니..여길 나가면 후속 조치를 취해보도록 노력할게. 그러니까, 우린 서로 입 다물고 탈출에만 집중하자고. 수연 씨도 발목 잡히는 거보다 지금의 남자친구랑 무탈하게 사는 게 좋잖아?"
"그럴듯 하지만, 말의 앞뒤가 안 맞네요. 약혼자와 관련된 일이면 물불 안 가린다는 걸 아신다는 분이, 지금의 남자친구랑 무탈하게 사는 게 좋다, 고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만들면 모순도 없어지는 법이지. 내가 아까 B블럭을 조사하면서 아주 좋은 걸 얻었거든. 자."
마침내 써먹을 시간이 왔다. 양수연은 떡밥을 물까.
"마침 총알도 멋지게 들어있더군. 하지만 난 수연 씨처럼 살인자가 아니라서...굳이 총을 쓰고 싶지 않거든. 지금 우리 거리라면 빗맞는 게 더 어렵고. 어때, 이제 좀 생각해 볼 마음이 들었나?"
"......"
양수연은 처음으로 내 시선을 피하며 다시금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얼마든지, 라고 대답하며 총신으로 뻣뻣해진 목을 통통 두드렸다.
이겼다.
마땅히 흉기로 쓸만한 물건도 없고, 손에 든 것을 실총이라고 믿는 이상 어찌 달려들 수도 없을 것이다. 더 말을 섞을 것 없이 패배를 인정하고 조용히 제 객실로 사라져 주면 게임 끝이다. 아니면 이쪽을 먼저 보내줘도 좋겠고. 살풍경한 브릿지 내부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까랑.
금속이 끌리는 소리와 함께 바람처럼 무언가가 스치는 소리.
뻑.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새까맣게 뒤덮였다.
***
머리를 얻어맞은 김재하는 주춤거리며 제 머리를 떄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려는 듯 갈곳잃은 시선을 마구 던져대다가 힘을 잃고 제 뒤에 있는 철제 박스 프레임에 기대듯 털썩 쓰러졌다. 양수연은 김재하가 저를 보려고 고개를 힘겹게 꺼덕이는 모습을 두 눈에 깊이 담았다. 말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지. 머잖아 곧 끊어질 숨을 굳이 추가타를 날려 고통을 줄여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김재하는 위협사격을 하지 않았다. 마주하는 사람이 셋이나 죽인 살인자임을 알았고, 그가 마지막 타겟으로 자신을 노릴 것이라고 직감했다면, 제 내력을 까발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진정으로 목숨을 보전하고 싶었다면. 김재하가 가진 것이 진짜 총이었다면 자칫 동귀어진 꼴이 날 수도 있었다.
확률은 반반이었다. 죽이거나, 죽이지 못 하거나.
자신과 얽혔던 것을 기억해 낸다면 강수혁에게 접근하려 들거나 반격하려 들 수 있다고 염두에 둔 상태였고 흉기로 쓸 부지깽이도 미리 뽑아두었다. 양수연은 한순간이어도 좋으니 김재하가 등 뒤를 내보일 정도로 방심해주기를 바랐다. 이변은 없었다. 오히려, 저 '권총' 이 그 방심을 만들어주었으니 전화위복이 따로 없었다.
양수연은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들었다.
방아쇠 부분을 당기자 총구 끝에서 작은 불꽃이 타올랐다. 손을 떼자 불꽃이 사라졌다. 진짜 총이 제게 있음에도 생김새가 실총 같아서 주춤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
"고작 이런 것으로 절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다니요."
양수연은 권총 라이터의 총신을 제 목가에 걸듯 하다가 곧 목을 통, 통, 두드리더니 김재하에게 그것을 겨누고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 대신 작은 불꽃이 일었다.
동그란 불꽃. 동그란 빛.
숨이 끊어지기 직전 암흑에 잠기는 시야 속에서
김재하의 볼 수 있는 마지막 빛 한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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