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방

강무강_빗속의 빗속의 비

2017.04.09-2020.06.27

난간에 고인 빗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빗속에서 내리는 비였다. 그 너머 가로등 불빛이며 건물의 형체가 빗물에 번지고 흘러내렸다. 그래, 저 속을 헤맨 소감이 어떠신가. 비꼬는 말처럼 담배연기가 입김과 꼬여 흩어졌다. 다시 저녁공기와 섞였고 형사의 옷에 배었다. 셔츠 소매가 살에 쩍 달라붙었다. 손에 쥐자 빗물이 배어나왔다. 종일 입었으나 물비린내가 냄새를 덮어버렸다.

비는 혼자 숨어 뭘 하기 좋다지만 나는 사절이네.

제가 걷던 거리는 복잡하지도, 비가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형사는 몽당연필이 된 담배를 버렸다. 그리곤 옷장인지 서랍인지를 뒤적였다. 언젠가 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잘 개어 정리한 옷이 있는가 하면 한편은 아무렇게나 쑤셔넣어 난리였다. 정돈된 옷은 대개 색이 바랬다. 바로 옆에 두지 않더라도 내 옷장 속의 것들과 대조되었다. 그가 자주 입는 건 마구잡이인 쪽이었다. 어제 입지 않았으면서 그럭저럭 봐줄만한 차림을 고르다 엉망이 되었단다. 정리를 한들 아침이면 원상복귀라고, 굳이 묻지않아도 대답했다. 사필귀정과 거리가 먼 사람이 이런 것까지. 옷을 살피는 형사를 보니 어떤 걱정이 들었다. 그가 하는 걱정과 비슷하리라.

한 번은 누나가 새빨간 티셔츠를 사왔다. 내가 늘 어두운 색만 입는단 이유였다. 형사가 되어서 눈에 띄는 차림은 할 수 없단 핑계로 집에서나 입었다. 그마저도 가끔이었다. 형사의 잠옷은 여전히 흰 반팔티였다.

우리는 시간을 넘나들었다. 길을 걷다 주변 소음이 바뀌거나 마주 오던 자전거가 사라지면 다행이었다. 오늘처럼 장대비 한가운데 휩싸이면곤란했다. 아는 얼굴을 만나는 게 제일이지만 편리한 법칙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낯선 말을 잔뜩 붙인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사람부터, 어깨를부딪친 사람까지 거리처럼 생소했다. 길이 아니더라도 눈을 꿈뻑였다가 내 방이 그의 방이 되기도 했다. 그도 그렇단다. 변함 없는 건 집의 소재所在였다. 나는 스물아홉, 그는 서른아홉이니 십 년이었다. 딱 십 년 전의 오늘, 십 년 후의 오늘. 본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시간을 넘기 직전으로 돌아가거든 짙은 담배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찰나로 느끼는지도. 실험이라며 식사를 해도 돌아와선 허기가 졌고, 입에 머금고 있던 물이 사라졌다. 줄인 밥과 반찬, 여하간 모두 원상복귀 되었다. 형사가 장난처럼 넘겨준 복권번호도 쪽지는 고사하고 머릿속에서사라졌다. 서로의 기억만큼은 사라지지 않으니 신경쓰지 않는 척 넘어갔다.

오늘의 기억은 회색 반팔이었다. 그가 넘겨준 옷은 기성복임에도 딱 맞았다. 형사도 나도 성장기가 애저녁에 끝났으니 당연한가. 달갑지는 않았다. 그의 팔뚝 어디까지 소매가 닿고 구김이 지는지, 한눈에 알아차릴라 시선을 돌렸다. 하늘. 허공. 난간에서 내리는 빗속의 빗속의 비. 속으로만 말을꾸몄다. 방을 나서는 소리에 고개를 바로했다. 무릎을 세워 가슴에 바짝 붙였다. 접은 무릎만 생각하기 좋았다. 눅눅한 날씨에, 오금 사이 땀이차기까지 했다. 다른 껄끄러운 것을 더 떠올려야지. 엄지로 검지 끝을 긁었다. 발가락을 오므리고 발목을 접었다. 그럴수록 면의 서늘한 감촉이 등에 목덜미에 감겼다. 아무리 맞는 옷이라 하더라도 내가 신경쓰지 않으면 될 터인데. 어차피 우리는, 십 년을 가졌더라도 같은 사람이었다. 형사의 식탁엔 물때며 먼지가 덮인 유리잔이 하나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 그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었다. 과거니 과오니 하는 것들로부터 빠져나온 미래로 곡해한 게다. 그를 마주하고선 지금껏 보고 닿았던 것들을 되새김질했다. 형사들은 이런 생각을 했겠지. ‘나’는 계속해서 십 년을 빌어, 한 발자국이라도 뗀 그를 기다릴 테다. 빗속의 빗속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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