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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세 사람은 여행을 가게 됐다. 느닷없이 여행을 가게 된 이유는 많았다.

첫째로는 당분간 서울에 있고 싶지 않았고, 둘째로는 팔자에도 없었던 여행이란 것에 치유받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다. 셋째로는.

"거 이렇게 된 거 핫바를 비롯해 부산에서 맛난 거 먹으면서 방바닥이나 뺀질나게 긁어보자는 거지."

허건오가 적극적으로 부산 여행에 대한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었다. 핫바는 편의점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거든. 김주황이 한 마디 얹었으나 허건오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몰라? 하며 투덜거렸다. 하태성은 조용히 좀 말하라는 눈빛을 했으나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잖아도 어머니께서 이것저것 많이 먹고 잘 놀다오라고 하셨습니다."

"부산이면 역시 회를 먹어야지. 물회라던가."

"난 밀면도 좋아."

"2박 3일이니 메뉴 같은 건 넉넉하게 정해보죠."

어머니와 함께여도 좋았을 텐데. 제아무리 열차를 탄다지만 서울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피로한 여정이라며 한사코 사양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 하태성의 마음은 조금 무거웠다. 하지만 징글징글하게만 느껴지는 서울을 뒤로 한다는 점에서는 또 마음을 가볍게 했다. 김주황과 허건오는 나름의 여행 코스를 짜려는 듯 의견을 내고 또 옥신각신했다. 하지만 하태성은 모처럼 즉흥적으로 도착하고 나서 생각해보자는, 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덜컹거리는 작은 소음과 함께 졸음이 밀려온 탓이기도 했다. 두 사람에게는 잠시 눈을 붙이겠다고 말한 뒤 눈을 감았다.

***

".....나리."

"음...으으음..."

"대장 나리! 일어나! 부산이라고."

"살살 깨워라, 살살."

"벌써 도착했습니까?"

"엉. 우리가 도시락 까먹을 때도 안 일어나서 대장 나리 몫까지 우리가 다 먹었다고. 어제 늦게라도 잔 거야?"

"아닙니다. 그...학교 다닐 때 빼고 여행 간 게 처음이라 그런지 조금 긴장이 풀렸나 봅니다."

"뭐, 저렇게 말하는 허건오나 나도 한숨 자긴 했어."

"창밖 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럼 안 자고 배기나?"

"자, 그만 내리죠."

세 사람은 짐을 챙기고 열차에서 내렸다. 역사를 나온 뒤 예약한 숙소로 바로 가기엔 체크인 시간이 있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했으나 답은 간단하게 나왔다.

"도시락을 걸러서 그런지 배가 고픈데, 두 분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물론이지. 형씨, 도시락이 은근히 배가 빨리 꺼진다고."

"뭐 먹을까? 뜨끈한 국밥? 아님 밀면?"

"일단 적당히 눈에 띄는 곳을 봐보죠. 다들 오래 서서 기다리기는 싫으니까."

"콜!"

서울은 꽤 추웠는데, 부산은 남쪽에 있어서인지 놀라울 정도로 덜 추웠다. 여차저차 발품을 판 끝에 정해진 첫 메뉴는 돼지국밥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몇몇 사람들이 국밥을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산에 왔으면 역시 돼지국밥 한 그릇 먹어줘야지."

"애송이, 부산에 와 본 적 있냐?"

"아까는 이름 잘만 불러놓고서 또 애송이래. 부산하면 돼지국밥이라고 많이들 하잖아. 고릴라는 그것도 몰라?"

"알기야 알거든. 그보다 넌 언제까지 날 고릴라라고 부를 거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 아, 이모~! 여기 국밥 셋에 수육 중 짜리로 하나요!"

"예~!"

오래 지나지 않아 쟁반으로 담아온 깍두기, 부추, 김치, 상추, 새우젓과 쌈장 등의 밑반찬이 차례로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이렇게 다같이 오니...좋군요."

"혼자 왔으면 기분 쳐졌을 걸?"

"그래, 셋이 이러고 있으니까 좀 놀러온 기분 난다."

"이번에 부산에서 잘 놀고 나중에는 딴 데도 가보자."

"형씨, 요즘 호텔들은 아예 백화점이나 공원 등 편의시설로 둘러싼 경우도 많다고 해. 어머님이 멀리 가기 힘들어 하시면 그쪽도 괜찮을 거야. 비용이야...우리가 여기 온 거보단 좀 나가겠지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황 씨."

"우, 우리만 가자니 괜히 가슴이 짜르르 해져서 그렇지!"

"안 어울리게 부끄러워하기는..."

밥 먹고 뭐 할지 얘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국밥과 수육이 나왔다. 펄펄 끓는 국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은 허기진 하태성은 물론 도시락으로 배를 조금 채운 허건오와 김주황에게도 식욕을 돋게 했다.

"잘 먹겠습니다."

세 사람은 음식을 앞에 두고 입을 모아 인사한 뒤 새우젓으로 저마다 간을 맞췄다.

"크아....차가운 도시락으로 채웠던 속이 녹는다, 녹아."

"부추들 넣으라고."

"아 부산 왔으면 정구지지!"

"수육도 맛있습니다."

"이야, 대장 나리 쌈 제대로 싸 먹네. 나 저렇게 잘 먹는 사람인 거 이제야 알았네."

"하태성 씨의 저 튼실한 하체를 보라고. 경찰일 하려면 잘 먹고 단련해야 하는 법이야."

하태성의 집에서 인근 역까지의 까마득한 거리를 가늠하던 두 사람은 그 길을 계속 오가면 저런 하체가 될 수 없다는 것에 극구 공강했다. 하태성은 허건오라면 모를까 꽤 튼실한 체격을 가진 김주황이 그렇게 말하는 것에 주황 씨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고는 밥을 먹는데 집중했다. 국밥은 잡내가 없었고 국물 맛이 진했다. 밥 한 그릇 뚝딱 말아 수육을 함께 한 숟갈 뜬 뒤 잘 익은 김치를 하나 얹고 입으로 가져가면 그만한 것이 없었다. 입가심하고 싶다면 수육에 쌈장 조금 찍고 마늘 얹어서 쌈을 싸면 산뜻하면서도 수육의 야들한 맛이 입 안에 가득했다.

"수육 안 시켰으면 큰일 났을 뻔..."

"정말."

"동감입니다."

세 사람은 밥 한 공기 더 시켜야 하는 거 아닌지 고민했으나 국밥과 수육을 모두 동낸 뒤에는 양이 적지 않았구만,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국밥집을 나오니 주변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밥도 먹었고, 당장 할 게 생각나진 않으니..부산 바다나 보러 갈까요?"

***

부산 지하철을 탄 세 사람은 노선도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서울 지하철 노선도가 지나치게 복잡하구나. 다소의 시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세 사람은 얼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배도 부르고, 무계획 여행치고는 누구도 무계획에 속 끓이지 않아 마음이 편안하기만 했다. 광안역에서 내려 해수욕장까지 이동하는데 겨울 바다라는 점 덕분인지 생각한 것보다 사람이 많진 않았다. 물론 해수욕장에 도착한 건 포차에 들러 물떡이랑 오뎅, 핫도그까지 야무지게 먹은 뒤였다.

"어쩐지 오자마자 맨 먹기만 하는 것 같은데요."

"대장 나리, 원래 여행은 먹으러 오는 거야."

"우리가 관광지 돌아볼 사람들은 아니잖아."

"잘 먹고 잘 놀다 서울 가면 되는 거지. 있다 숙소 가면 싹 씻고 잠 좀 잔 다음에 보드게임이나 한 판 떄려보자고. 내가 몇 개 가져왔으니까."

"내가 뺐는데."

"아 왜~! 하지만 고릴라가 그럴 줄 알고 내가 가방 까본 다음에 없길래 도로 넣었어."

"나이 스물여섯 먹은 놈이 여행 와서 부루마불 하자는 게 말이야, 막걸리야?"

"고릴라, 그렇게 먹고서 막걸리를 또 마시고 싶어?"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건 이제 일상이었다. 하태성은 적당히들 하세요. 하고는 앞을 보았다. 바다였다. 당연하게도, 한강 둔치에서 듣던 물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따갑지 않은 겨울 햇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회색 물결, 고요를 잔잔히 꺠뜨리는 파도치는 소리, 모래사장에 발자국 대신 손자국을 남기는 사람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날이 나빠지지 않는 이상 적당히 자리를 깔고 앉아 시간을 조금 보내도 될 것처럼 보였다.

"우리 대장 나리 우수에 젖는 얼굴 봐. 얼굴은 정말 배우 감이네."

"하태성 씨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니까 너무 툭툭 건드리지 말라고."

"아, 나도 가슴에 담아둔 거 많은데 자꾸 그렇게 무시할래?"

"무시 안 했는데. 그럼 너도 저 옆에 가서 같이 감성에 젖어보던가."

"못할 것도 없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런 건 나랑 안 맞아."

"맞아. 모처럼 바다에 왔는데 사진이라도 한 장 찍죠."

"카메라 가져왔어?"

"일회용이지만요. 오기 전에 역에서 샀는데 까먹을 뻔했지만요."

"다른 사람한테 찍어달라고 하자. 내가 부탁하고 올게."

허건오가 카메라를 건네받고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에게 말을 붙였다.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친구들이랑~ 하는 소리가 아주 약하게 들렸다. 곧 남자가 와서 자리를 잡았고, 세 사람은 바다를 등지고 저마다 포즈를 취했다. 잘 찍혔는지는 나머지 필름을 모두 다 쓴 뒤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 두 번 사진을 찍은 뒤 하태성은 남자에게서 카메라를 건네받고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파도 치는 바다를 찍었다.

"이번엔 제가 찍어볼 테니, 두 분도 다시 한번 포즈를 취해보세요."

"대장 나리, 잘 찍어?"

"하하, 처음입니다."

"여기 사진작가들 없으니까 너무 기대만 안 하면 된다고."

"돌아가면서 찍어보면 알겠지!"

하태성은 일회용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김주황과 허건오의 얼굴이 퍽 낯설었지만, 그건 서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밝은 표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나, 둘, 셋, 김치, 하고는 셔터를 눌렀다.

"대장 나리도 고릴라랑 찍어봐! 내가 근사하게 찍어볼게."

"알겠습니다."

"얼굴 안 짤려서 나오게 잘 찍으라고."

"계속 그러면 열과 성을 다해 안 나오게 해 준다, 고릴라."

"그러지 않도록 부탁하지요, 허건오 씨."

고릴라는 나 긁을 때만 허건오 씨 하는 거지?

그걸 이제 알았냐?

정말 사이가 좋구나. 실없이 웃음을 흘리고 있으려니 두 사람의 말이 어느샌가 뚝 그쳤고, 쥐도 새도 없이 눌려진 셔터와 잠깐의 반짝임이 하태성의 얼굴에 서렸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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