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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경찰대는 떨어졌구나."

"..네. 하지만 순경 시험을 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꼭 경찰이 되겠다는 의욕만큼은 합격점이구나. 왜, 아저씨한테 맡기지 않고? 못 미더우냐?"

권혜연은 주정재를 바라보았다. 두 눈동자는 아버지의 것과 꼭 닮은 다갈색이었다. 고개를 저은 권혜연이 말했다.

"정재 아저씨를 못 믿긴요. 다만 제 힘으로 진실에 다가서고 싶은 것뿐이에요. 아빠가 몸담았던 조직에 속해봐야만 과거 사건을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무엇보다, 아빠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 구구절절하게 말 안 해도 잘 알겠다."

"일단 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공부할 거에요."

"그러다 낙제하지는 않을지 걱정되는구나. 허허.."

"적어도 장학금을 받아서 학비 부담을 덜도록 노력하려구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라, 원참 포부 하나는 야무지구나."

"정재 아저씨가 도와주실 거잖아요. 네?"

주정재는 환히 웃는 권혜연의 얼굴을 보며 등을 토닥였지만 한 켠으로는 가슴이 쌔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권혜연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의 관계가 지속될까. 아니면 모든 걸 알고도 자신을 받아들일까. 권현석의 애잔한 눈동자가 가슴에 박힌 듯 아른거렸다. 권혜연조차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본다면, 그 때는 단순한 붕괴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원망하고 증오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소녀의 티를 벗고 성인을 앞둔 권혜연은 하나뿐인 목표를 위해 제가 지녔던 나약함을 차츰 극복하고 있었다. 권혜연은 언제고 반드시 경찰이 될 것이었다. 권현석의 죽음에 대한 진실 역시 알 게 될 것이다. 주정재가 해 온 모든 거짓말과 위선을 낱낱이 밝혀낼 것이다.

"그런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구나."

주정재는 그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권혜연이 원하는 결말을 움켜쥘 수 있기를 소망했다.

***

"그래. 사범 일 하는 건 괜찮냐?"

"내참 누가 들으면 하루 이틀 일한 줄 알겠어요. 벌써 몇 년 됐거든요, 관장님."

"어허,복지 차원에서 물어보는 거다. 양시."

"불만사항을 말해봐도 안 이루어질 건데 뭐하러 물어봐요?"

"불만사항이 뭔데?"

"수강료 입금일이 가까워질수록 식생활이 수직낙하하는 거라던가.."

"찔끔."

"관장님이 불규칙적으로 나가선 외박하고 오는 일이라던가.."

"뜨끔!"

"청소, 빨래, 설거지 당번일을 철저히 안 지켜주시는 것 정도요."

"크앗!"

최재석은 양시백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신음소리를 냈다.

양시백은 이럴줄 알았어, 하며 허리에 손을 짚고는 고개를 저었다.

"복지, 못 하겠죠?"

"큭...내가 졌다, 양시..!"

"그래도 두번째거 빼면 괜찮아요. 수강료 건은 어쩔 수 없는 거고 세번째는 저도 가끔 그러니까."

언제 한숨 쉬었냐는 듯 방긋 웃은 양시백은 매트 위로 털썩 앉았다. 최재석도 장난조로 대답하던 것을 그만 두고 그 옆에 앉았다.

진지한 표정이어서 양시백은 조금 긴장했다.

"양시."

"왜요?"

"혹시, 도장 사범일 말고 따로 하고 싶은 없냐?"

"왜, 왜 그런 걸...설마, 도장 문 닫아요?!"

"얌마, 문 닫기는 무슨! 그냥 물어본 거야, 그냥."

"어우,놀래라..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거에요?"

"적응 잘 하는 거 보니 참 기쁘다만, 너도 이제 성인이고 내가 도장에 억지로 붙잡아 두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서 말이다."

"처음이야 워낙 얼렁뚱땅이라 그런 생각을 안 해보지 않았던 건 아닌데..지금은 안 그래요. 반듯한 일, 좋은 일, 넓지는 않아도 늘 거기 있는 집이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당연히..관장님께 감사한 마음도 있고요. 그러니까 그런 얘기 마세요."

최재석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양태수의 부탁으로 양시백을 거둬 함께 살고 있지만, 양시백에게 그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고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자신의 부족함에 실망하거나, 다른 이들처럼 자신을 신뢰하지 못 하고 또 다시 누구의 눈길 닿지 않는 곳으로 영영 떠나가 버릴까봐. 양시백은 제게도 아들 같은 녀석이 된 지라,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되어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시백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자, 그럼..밥 먹자."

"라면이잖아요."

"햇반 사 왔다."

"당장 먹죠."

***

새 신분을 꾸미고 자리를 잡은 뒤 남자가 알아보고자 했던 건 권혜연과 옛 친구 최재석에 대한 것이었다. 주정재 역시 둘에 대한 것을 알아봤기 때문에 곁에 있었던 남자 역시 해당 정보에 접촉할 수 있었다. 주정재의 손이 닿아있는 정보이므로 직접 찾아가서 얼굴을 확인하거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의외의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다. 양시백. 눈매가 날카로운 백석 그룹 경호원, 양태수의 아들이 최재석과 함께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남자는 몇 번 스친 인연이지만 가족을 간절히 찾던 양태수가 흐릿하게 생각나 혀를 찼다. 백석 내에 양태수란 경호원의 존재가 사라진 것, 최재석 일행과도 함께하고 있지 않다는 점으로 좁혀지는 단 하나의 결론. 양태수 역시 현 시점에서 사망했을 것이다. (저처럼 죽어서 산 케이스가 있을지 모르지만 노구치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게 흔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가능성이 낮았다.)

그 모든 것의 뒤에 백석이 있었다. 권현석을 죽이고 유상일을 부순 자들. 그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뒤틀어버린 자들.

남자는 그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모습을 바꾸고 숨어들었다. 이제 막 3년이었다. 오랫동안 권세를 누리고 휘둘러온 자들이기에 고작 3년으로는 부족했다. 누려온 세월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한 시간을 필요로 할 지 모른다. 끝없이 이어지는 굴레와, 약속과, 부탁.

'..스스로 선택해..할 수..있잖아..?'

선택했으니, 집중한다. 그뿐.

은인의 유언과, 그 말버릇을 작게 곱씹던 남자는 지켜보아야 할 사람들의 주변이라도 지나가듯 서성이기 위해 도시의 밤거리로 나섰다. 회색의 도시가 색색의 불빛들로 숱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분명 아름다운 광경이었으나 남자는 이 도시가 내포한 위험성과 암투를 이미 알고 있었다. 마냥 보는 것처럼 아름답지 않은 도시를, 남자는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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