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8

정은창 생축글

정은창은 종종 반추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찍 돌아갔더라면, 복수를 다짐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거라고.

정은창은 꿈을 꾸고 있었다.

***

"대기업 경호원 일자리 거절하고 하는 일은 좀 어때?"

"매일같이 찾아와주는 단골손님 덕분에 그럭저럭 풀칠하고 있어."

"나 말고 다른 단골손님도 있나 보지?"

"유감스럽게도."

강재인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북적이는 사람들을 흘끗 보며 작게 웃었다. 정은창이 작은 가게를 얻게 된 건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번듯한 양지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죄인인 자신이 감히 이렇게 평화로이 살아가도 되는지 때때로 극심히 두려워 할 만큼. 그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엔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장 큰 은혜를 입은 권현석에게조차도. 하지만 선진화파에 몸담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강산도 바뀔 만큼 흐른 시간이 조금이나마 정은창의 마음의 약이 되어준 것인지 고민을 품고 있음에도 이전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 새 명함."

강재인은 술을 마시다 말고 정은창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백석 그룹 비서실장 강재인.

모서리가 금박이 멋드러지게 장식된 걸로 봐서는 이번에 승진을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명함 멋진데."

"지금도 사람 하나는 꽂을 순 있으니까 언제고 연락해."

"나 이제 싸움 못 해. 무리야."

"쌈할 줄 알아도 안 할 거 다 아네요. 그냥 잘 갖고 있으라는 말이야."

"네네, 알겠습니다. 한 잔 더 드릴까요?"

"그럼, 가득!"

마지막 손님이 자리를 떴다.

강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영업 끝이었다. 정리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손사래를 친 정은창은 얼른 택시를 잡아 강재인을 태워보냈다. 내일은 쉬는 날이기에 정리할 것이 좀 많았다. 재고 및 실온 체크를 마치고 사용한 식기를 삶은 뒤 떨어진 물기를 말끔히 제거했다. 홀에 나와 의자를 모두 치운 뒤 바닥을 쓸고 닦고, 테이블까지 정리하면 끝이었다. 셔터를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

"점심 먹으러 오라더니..?"

"내가 말했지. 저 놈 올해도 지 생일 까맣게 잊고 있을 거라고."

"10년 동안 한 번도 자기 입으로 나 생일이요, 하는 걸 듣질 못 하냐...정은창. 다른 사람 생일은 그럭저럭 잘 챙겨주면서."

"이봐, 너희들 여기 정은창 생일 축하하는 자리야, 타박 주는 자리야?"

최재석은 종종 같이 밥이나 먹자며 정은창을 불러내곤 했는데, 고깃집에 도착해 보니 유상일과 주정재까지 있었다. 불렀냐고 눈짓하는 것에 생일 축하한다며 폭죽을 터트리는 것에 얼떨떨해 하는 것도 잠시 주정재의 타박과 최재석의 동정을 한몸에 받았고 유상일은 재빨리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주문을 마친 주정재가 턱을 괴고 물었다.

"야, 정은창. 내기할래?"

"내기? 무슨 내기?"

"네가 내년에도 네 생일 까맣게 모르고 넘어간다에 10만원 건다."

"돈 많냐? 형사 봉급 얼마 안 된다더니."

"쥐꼬리 형사도 생일은 챙기거든. 아, 그래서 내기 할 거야, 안 할 거야?"

"안 까먹도록 노력해 보지."

"오, 그럼 나도 안 까먹는다에 10만원!"

최재석은 고기를 구우며 으쓱였고, 유상일도 이 내기에 끼냐는 듯 세 사람의 시선이 잠시 모였다.

경찰로서 돈 내기는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내기에 꼭 참가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린지라 유상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한다에 걸지."

"좋아, 배당률 낮아야 할 맛 나지."

"나 같으면 정재 저 녀석 저러는 거 약올라서라도 꼭 기억해두겠다."

"누가 아니래. 내가 내년 달력받으면 내 생일부터 체크한다."

"야, 달력에 체크하는 건 반칙이지!!"

고기가 익는 동안 시킨 소주와 맥주가 테이블에 놓였고 네 개의 소주잔과 네 개의 맥주잔이 가득 채워졌다.

세 사람은 정은창을 위하여, 건배! 하며 잔을 들었다.

"..매번 까먹는 내 생일 축하해줘서 고맙다."

-은서가 기다릴 테니 생일상 술잔이라고 과음은 금물이다. 정은창은 처음 두세 잔을 제외하고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

생일에는 생일 케이크를 먹는다.

어린 시절엔 그게 잘 안 됐었기에 생일날 케이크를 먹는 게 큰 사치가 아니게 된 지금은 꼬박꼬박 챙겼다.

동생인 정은서가 좋아하는 맛으로 사 가기도 했고, 깔끔한 생크림 케이크를 사 가기도 했다. 오늘은 초콜릿 케이크였다.

"은서야, 오빠 왔어, 문 좀 열어줘."

통통통. 정은창은 한 손으로 문을 두드렸고 조금 기다렸다.

곧 잠금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빠끔히 열렸다.

"왔어..?"

"응, 은서 보고 싶어서 밥만 먹고 얼른 왔어."

"그거는..?"

"케이크야. 오늘 오빠 생일이거든. 은서랑 같이 생일 케이크 먹고 싶어서 사 왔어."

정은서가 몇 걸음 물러섰고, 정은창은 문을 여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식탁에 케이크 상자를 올려놓은 다음 손을 씻고 접시 두 개를 준비한 뒤 내용물을 꺼냈다. 정은서는 늘 자기 자리에 앉아 먹음직스런 케이크를 바라보았고, 정은창은 바로 케이크를 잘라 접시에 덜었다.

"천천히 먹어. 우유 줄 테니까."

"응..오빠, 생일 축하해."

"고마워. 우리 은서가 축하해주는 게 최고야."

잘 먹겠습니다.

정은창의 생일은 별 거 없었다. 시간이 되는 사람들과 생일 핑계로 만나 밥 좀 먹고 적당히 이야기 나누다 헤어진 다음 돌아오는 길에 생일 케이크를 사 와서 정은서와 나눠먹고 일찍 잠든다. 그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이거..맛있어, 오빠."

"이번 은서 생일엔 초코 케이크가 좋겠네."

정은서가 방긋방긋 웃는 것에 정은창 역시 웃어보였다.

***

정은창은 종종 반추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찍 돌아갔더라면, 복수를 다짐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거라고.

정은창은 계속해서 긴 꿈을 꾸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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