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1
어느 다섯번째 21일
"모두...꼭 이래야만 했던 겁니까?"
으득, 남자가 이를 갈았다. 육신의 상처만이 모든 상처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 점에 입각한다면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죄다 엉망진창이었다. 죽어가는 자와, 그의 옆에 선 자. 그 이전에 마주 보았던 자들 모두가. 목숨이 아깝지 않느냐는 중년의 말과 함께 철커덕 하는 쇳소리가 강압적으로 눌린 침묵에 울려퍼졌다. 남자는 몇 번, 몇 십번, 몇 백번을 되뇌던 말을 다시금 풀어놓았다.
"나는...난...인정할 수 없어!!"
그리고 고함 섞인 말과 함께 총성이 울렸다. 동시에 울려 증폭된 두 발의 총성이 귀가 떨어질 만큼 넓은 공간을 채웠다.
하나의 총탄은 남자의 다리를 꿰뚫을 예정이었다.
...예정이 '었' 다.
허공에 떠 있는 총탄 -남자가 볼 수 있는, 혹은 인식할 수 있는 총탄은 일단은 이것뿐이었다- 이 총구로 되돌아가고, 사출되기까지의 과정이 태엽 감기듯 거꾸로 되돌려졌다. 찰칵, 하고 눌려졌던 방아쇠가 되돌아가고 탄창 역시 말려들어가 총탄을 도로 채웠다. 상황은 이제 총탄이 발사되기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더 이상 되돌아가지도, 더 이상 흐르지도 않는 상황에서 남자는 움직였다.
오직 남자만이 그 속에서 움직였다.
죽은 자는 마지막 숨을 붙이고는 있지만 채 내뱉지 않는 채 멈춰있었고, 살아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지난 수십년을 모욕 받은 것처럼 격양되어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죽은 자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모든 상황이 정지하기 전부터 멎어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상황과 꼭 같았다. 바꾸고 싶었다. 되도록이면, 되도록이면 그 누구도 죽지 않도록. 누구도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비약적이지만 조용히 끝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던 모든 일의 끝은 남자가 아는 대로, 그리고 눈앞에서 보는 그대로였다. 남자는 매번 같은 상황을 저도 모르게 되풀이하곤 했으나, 끝은 어떻게든 이렇게 되고야 만다는 것을 마지막 순간에야 깨닫곤 했다. 그것이 패인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자신이 아는 연결고리나마 자를 수 있었을 텐데, 적어도 망가뜨리기라도 해서 결코 닿지 않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그런 후회의 감정은 이제 셀 수도 없이 많은 횟수를 지나칠 뿐이었다.
남자는 이 마지막 순간에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금 모든 걸 잊은 채로, 잃어버리지 않았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잃어버리는 과정까지를 반복하기를. 정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포기라도 할 텐데. 남자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아이들이 만드는 간단한 팝업북처럼, 펜트하우스 안이 중앙에서부터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곧 반으로 접혔다. 그 속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함께 없던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 남자의 눈앞은 시커멓기만 했다. 남자는 펜트하우스가 있었던 곳을 등지고 끝없는 암흑속을 향해 걸어가려 했다.
남자의 등 뒤에서 하얀 것이 반짝거렸다. 흰 셔츠. 그 위로 살짝 덮인 검은 코트의 소매 끄트머리.
소리없이 나타난 하나의 팔이, 남자의 팔을 붙잡았고, 남자는 동그래진 눈으로 자신을 잡은 팔과 그 팔 너머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다.
***
"헉....헉..."
젠장. 양시백은 가쁜 숨을 쉬면서 달렸다.
도장에서부터 쫓아온 -결코 선량함과 호의로 접근하는 것 같지는 않은- 무리들을 따돌리기 위해 횡단보도를 아슬아슬하게 건넌 게 시작이었다. 없는 지갑에 택시를 타는 건 절대 무리였고, 겨우겨우 있는 동전 없는 동전 다 털어서 버스를 겨우 타서 괜찮나 했더니 자동차를 타고 따라오지를 않나, 지하철 역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떨쳐내 보려 끼어든 뒤 따돌렸나 싶더니 나가는 출구에서 덮쳐오지 않나. 양시백은 한두 개가 아닌 아찔한 순간들을 떠올리면서도 착실하게 지나온 곳을 되는 대로 걷어찼다. 어깨나 팔에 부딪힌 사람이나 쏟겨진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분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하면서.
거리의 불빛이 하나하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인파나 거리적으로 휙 따돌려보려 했건만 잘 되지 않아서 빼곡한 골목길과 그 사이로 스며드는 어둠을 틈타 달아날 생각이었다. 주황색 가로등 옆에 남자가 서 있었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꽁초를 던지고는 길 중앙에 섰다. 양시백은 그 의도를 확실히 알았다. 남자가 뒤에 따라오는 자와 같은 패거리건 아니건, 양시백이 주욱 달려나가려는 것을 저지하겠다는 것은 분명했다. 탄탄한 어깨와 검은 코트를 입은 모습과 그의 의도가 적잖은 경계와 부담감을 자아냈다.
"이봐, 거기! 안 비키면...!"
몸통 박치기를 해서라도 밀고 나간다! 라고 말할 참이었다. 남자가 갑자기 샥, 몸을 옆으로 세우더니 한 발짝 물러났다.
비키란다고 진짜 비키다니, 양시백은 달리다가 잠시 주춤했다. 안 붙잡으면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남자가 막 양시백이 제 근처를 지날 때쯤 팔을 붙잡아왔다.
'역시 저 뒤의 덩치들이랑 한 패였나..!'
잡힌 팔을 얼른 뿌리치려는데 남자가 길 옆에 세워둔 차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남자 역시 양시백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힘이 꽤 들어가 있었다.
"어차피 저 안으로 들어가봐야 문이 잠겨 있어서 막힌 길이나 다름없어."
"......."
"내 차를 타. 여길 벗어나기 전까지 뒷좌석에서 누운 채로 일어나지 말고."
앞. 양시백이 몸을 피하려던 곳은 한눈에 봐도 사람 없는 공사장이었다.
쫓아오는 자들의 인원수가 많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잘 숨으면 쫓던 녀석들을 죄 따돌리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다. 뭣보다 남자가 누군 줄 알고 그 말을 냉큼 믿으란 말인가? 양시백이 짧게 망설이는 동안 골목길에서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차량용 리모콘을 꺼내 차의 문을 열고는 뇌까렸다.
"..빨리!"
양시백은 에라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며 검은 승용차에 올라탔다. 창문은 썬팅이 되어있어서 굳이 몸을 눕힐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지만 양시백은 남자가 말한 대로 뒷좌석에 몸을 푹 구겨 눌렀다. 곧 남자가 운전석에 타며 차를 몰았다.
***
얼마나 내달렸을까, 남자가 나와. 하고 짧게 말했다.
양시백은 빨리도 말한다며 투덜거리고는 몸을 바로 했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당신, 누구야? 지금 이 차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고? 폭력배들 피하려고 납치범이나 다른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차 탄 거 아냐."
"나도 어디 업자들처럼 네 뱃속 내장 파티 하자고 태운 거 아니다."
"그럼 뭔데?"
"네 뒤에 따라붙은 놈들은 유감스럽게도 잘 아는 놈들이다. 왜 쫓았는지도 알고."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피하게 해 주는데?"
"유상일과 최재석. 전자는 네가 아직 모르겠지만 최재석을 찾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이름이지. 후자의 경우는..그 녀석 표현을 빌리면 나는 녀석의 친구라서, 가족처럼 살아온 네 위기를 모른 척 하기에도 뭐해서라고 하자."
"관장님을 안다고? 우리 관장님은 범죄를 저지르거나 거기에 가담할 사람이 아니라서, 스스로 뒤 구리다는 사람 친구로는 안 보이는데."
자신을 구해준 것은 정말 고마웠지만 꺼림칙한 데가 있는 구석이 있는 남자가 최재석의 친구라고 하는 것에 거부감이 울컥 드는 양시백이었다. 최재석과 어떤 사이인지, 잠적해서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어떻게 물어야 할지, 제 믿음을 저버리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전전긍하기도 했었다. 답지않게 남자를 향한 말이 가시 돋친 투로 나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남자는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것도 유분수지, 라던가 안 믿어도 상관없다는 등으로 답하지 않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은신처에 데려다 주고 싶지만 억지로 데려다 봐야 역효과만 나겠지. 도장으로 데려다 주면 되겠지?"
"....."
"대답한 걸로 알지.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해. 이번에는 널 잡지 못 했지만, 최재석..정확히는 유상일의 소재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그 다음 순위인 최재석을 노릴 거고, 최재석에게 있어 가족인 너는 인질로 삼기 충분한 요건을 충족하고 있으니까."
"왜..날 도와주는 건데?"
"넌 최재석에게 볼일이 있고, 난 두 녀석 전부에게 볼일이 있어. 그런 걸 다 제쳐둬도, 누군가를 인질로 삼아서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걸 두고 볼 수 없으니까."
운전석 위의 작은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눈에, 양시백은 지금까지 몰랐으나 남자의 뺨에 흉터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늘한 눈빛이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그 외에 주변에 흐르는 분위기가 신뢰를 퍼 올리게 하지는 못 했지만 은인임은 틀림이 없었다. 정면의 차창 너머로 익숙한 사거리가 보였다. 양시백의 집, 양지 태권도장 앞이었다.
'..하긴, 내가 누군지, 관장님이 누군지도 아는데 도장 주소 하나를 모르려고.'
남자가 차를 반듯하게 세우자 양시백은 뻐근한 몸을 풀고는 뒷문을 열었다.
도장 주변과 안을 살펴보는데 쫓겼을 때와 같은 기척은 없었다. 뒷문을 닫기 전 몸을 숙여보인 양시백은 인사를 짧게 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도와줘서...고맙..아, 고맙다고."
"...정은창이다."
"아는 것 같지만..양시백이라고 해."
"그래, 양시백."
남자의 눈빛에서 서늘함이 없어지자, 양시백은 잠시 남자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유상일을 만나면 이번에는 크게 싸우지 말고 최재석에 대해서라도 얘기를 해 봐라. 그러는 편이 더 낫겠지."
그렇게 말하고는 까딱, 인사를 했다.
양시백이 뒷문을 닫자 남자, 정은창은 차를 몰아 사라졌다.
"..이번에는, 이라고?"
최재석과 더불어 여러 번 나온 유상일이라는 이름.
그에 대해 묻지도 못했는데 싸우긴 뭘 싸워, 하고 중얼거린 양시백은 도장 안으로 들어섰다. 전등을 켜니 불빛 아래로 참혹한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쫓기지 않았을 때에도 마찬가지기는 했다.) 도장이고 관장실이고 죄다 어질러져서, 당장 치우지 않는 한은 잠도 못 이룰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양시백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째깍.
시간은 막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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