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성인이 되고, 일자리를 찾고, 거기에 익숙해져 비로소 정착하고, 또 다시 바뀌고.

스물 남짓, 사회로의 첫 걸음과 함께 철이 들었을 즈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평소에 더 잘해드리지 못 한 것이 슬펐지만 산 목숨, 마냥 울기만 할 순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삐걱거리던 몸과 마음을 수습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날이면, 더없이 생각나는 날이면 종종 찾아가 세상 사는 게 이리도 척박하다고 이야기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셋이 함께하던 밤에서 홀로 나가떨어진 밤을 보내는 건 외로웠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나 역시 인간이기에 시간을 들이며 익숙해졌다.

혼자이던 시간을 어느새 가득 채워준 이들이 있었다.

'살아있어요?'

'재호 씨, 문병 왔습니다.'

'...산 거 같아, 죽은 거 같아?'

'죽은 거 같은데요.'

'일단 실례하겠습니다. 환자가 찬 바람 많이 쐬면 좋지 않습니다.'

'재호, 들어가서 죽 먹자. 아무 것도 못 먹은 얼굴이야.'

말이 아닌 몰골을 보며 웃다가도 걱정했던 동료들.

'재호, 혼자 사는 집치고 청소를 무척 깔끔하게 해놨는 걸?'

'형님네만 하겠어요?'

'뭐, 우리 집도 깔끔하긴 하지...가 아니라. 이거, 나랑 혜연이랑 담근 김치야. 좀 먹어.'

'매번 신세지네요.'

'서로 도우며 사는 거지 뭐.'

혼자인 사람이 외로워 눈물 흘리지 않도록, 길을 잃지 않도록 염려하며 앞을 부드럽게 비추던 별빛 달빛 같았던 사람이 있었다.

좋아합니다. 좋아합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말조차 건네지 못 하고 해바라기처럼 바라만 보던 사람이 있었다.

있었다. 이제는 없다. 낮 같이 환하게 나의 밤을 밝히고, 듬성듬성 비어있는 나의 많은 시간들을 채우던 그들이 이제 곁에 있지 않았다.

짧은 백야 이후 더욱 어두운 밤이 나를 도로 맞이했다. 별빛도 달빛도 없는 밤이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

"아저씨."

"......."

"아저씨!"

"뭐야, 뭐! 불 났어? 전기 나갔어? 아님 빨래 널어놨는데 밖에 장대비라도 쏟아져?"

"어이구, 내가 더 놀랐네..죽은듯이 잠만 자서 깨웠어요. 밥 먹었어요?"

소리치는 것에 경련하듯 벌떡 눈 뜨자 마주친 얼굴에 -적응은 됐지만 정신없는 상태에서 맞딱뜨리는 건 좀 달랐다- 더 놀랬다는 건 예의상 참아주기로 했다.

"새벽 3시까지 키보드 두드리다가 잠들었으니 어련할까. 양시백이는 밥 먹었어?"

"같이 먹으려고 라면 가져왔죠."

"예끼, 빈 속에 라면만 부으면 안 좋아."

"그렇게 말할까봐, 양시백 씨랑 시장 다녀왔죠."

"오, 혜연이도 왔구나. 흠냐..좀 엉망이긴 하지만 어서오라고."

"늘 엉망이잖아요."

"마, 혼돈속의 조화라는 말 몰라?"

"저희 도장이 100배는 깨끗하겠네요."

조 말하는 입을 살짝 꼬집어주려고 했는데, 양시백이가 예상했다는 듯 메롱, 하고 한 발 물러섰다.

"아저씨, 저도 왔어요."

"설희도 왔구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설희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인원이 넷인데 점심은 뭐가 좋을까요? 의견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배달 음식?"

"방금 라면은 싫다고 하셨으면서..."

"라면하고 배달 음식하고 같은 선상은 아니니까 말이지."

"체."

"하지만, 방금 장 봐온 걸요?"

"어차피 오늘 느긋하게 저녁까지 있다 갈 거 아냐. 점심엔 간단하게 탕수육이랑 몇 개 더 얹어서 시켜먹자고."

"아이구, 못 말려."

"뭐, 그래요. 그럼 다들 돈 좀 모아봐요!"

양시백은 배달음식 책자를 뒤지고 있었고 권혜연은 아주 익숙하게 총액 계산부터 했다. 서재호는 느긋하게 지갑을 열 타이밍을 쟀다.

혼자였던 낮, 혼자였던 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루.

다시금 하루하루를 채워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주었다.

혼자였던 사람들이니 만큼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서로 손을 꼭 잡아 주는 것처럼.

손에 손을 잡고 먼 밤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가족 만들 일이 요원한 나로서는 곁에 있는 녀석들이 꼭 가족처럼 느껴졌다.

녀석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이 꿉꿉한 회색 가득한 도시속에서 살만한 가치가 조금 늘지도 모르겠다.

"아, 여기 좋아요. 적당히 가깝고, 탕수육도 많이 얹어주고."

"역시 전문가는 다르구만. 그나저나 부먹파야, 찍먹파야?"

"부먹이요."

"찍먹인 나와는 저기 떨어져서 앉게나. 그럼 설희는?"

"전 찍어먹는 게 더 좋아요."

"아이고, 우리 예쁜 설희."

"네네, 그래서 메뉴는 정하셨어요? 저는 짬뽕할게요."

"전 볶음밥이요!"

"짜장면!"

책자를 양시백이로부터 건네받았다.

전화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주 즐거워진 일과 중 하나였다.

"아, 배달 좀 시키려는데요, 여기 주소가..."

혼자 아닌 하루가 절반쯤 지나가서 또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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