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03

장희준 생축글

한 해가 밝았다.

연말에 감회에 젖는 것도, 목도한 새해에 두근거려하면 부푼 마음을 말로서 풀어놓는 것도 백석 저택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이 곳은 그저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고 적적했다. 장희준은 번드레한 말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 심성 때문에 좁지도 않은 집이 더욱 적적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아이가 태어나야 해."

장지연이 낳은 아이. 백석의 적통. 모든 것을 물려줄 후계자.

백석의 일원이 된 박근태는 창잡이이자 그 권위를 일부 물려받은 후계자이긴 했으나,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과 확실하게 갈라놓았음에도 장지연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비즈니스적으로는 신뢰가 어느 정도 갔지만 한 가족, 장지연의 남편이라는 부분에서는 신뢰가 가지 않았다. 박근태도 엇비슷하게 생각할 거라는 것에까지 미치니 입이 썼다.

"..인생 헛살았군."

날짜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변하지 않은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식사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했다.

장희준은 오늘따라 식탁 위 찬들이 한층 더 요란하다고 생각했다. 주방장의 기분이 좋은 건가 싶었지만 장희준 자신도, 장지연도, 박근태도, 가끔 같이 먹곤 하는 양태수나 강재인도 입이 짧은 편이어서 호화스러운 찬들은 인기가 좋지 않았다. 크게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대화는 없었다. 박근태와는 접견실에서 공적인 대화를 종종 나누었고 사적인 대화는 없었다. 장지연과는 공적인 대화도, 사적인 대화도 끊어진 지 오래였다. 아버지와 딸, 부녀 관계였지만 남보다도 대화가 적었다. 그 부분이 안타까웠으나 자승자박인 꼴이었다.

"아, 아버..지."

"그래, 왜 그러냐, 지연아."

놀랍게도, 식사가 끝난 뒤 장지연이 장희준에게 말을 붙여왔다.

장희준은 상냥하게끔 노력하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장지연은 우물쭈물해 하면서도 말했다.

"오, 오늘, 생신..추, 축하..드려요."

"아.."

"괘, 괜찮, 으시면..오늘은, 바, 바깥에서..다, 다 같이...먹, 어요."

"그래..고맙구나. 노력해보도록 하마."

"..죄송합니다. 오늘이 생신이신 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괜찮네. 나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오늘 저녁은 지연이가 제안한 대로 바깥에서 근사하게 먹고 싶은데, 자네 의향은 어떤가?"

"회장님 생신인데 그냥 넘어가면 되겠습니까,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씀만 해 주십시오. 되도록 일찍 귀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재인이 편으로 연락을 보내지."

"알겠습니다."

"지연이 너도. 저녁 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네, 네...아, 알겠..어요."

장지연과 박근태가 식사를 마치고 인사한 뒤 나가자 저마다 식사 후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강재인과 양태수가 다가와 인사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늙은이가 되었는데도 생일 축하는 꼬박꼬박 받는다니, 어쩐지 부끄럽군.."

"아가씨가 말씀하시지 않았으면 깜빡 넘어가실 뻔 했네요."

"그래, 나도 몰라서 그럴 뻔 했지. 지연이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회장님도 아가씨의 생일은 빠짐없이 챙기시니까요. 아가씨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

장희준은 진정으로 딸의 생일을 챙겼다 말할 수 있는지 말을 아꼈다.

허나 장지연이 죽 제 생일을 기억해주고, 먼저 선뜻 바깥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자고 한 것에 가슴이 짜르르 한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 예전에는 느끼지 못 했던 것, 느꼈으나 무시했던 것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다. 장지연에게 표하지 못 했던 나름의 애정과 애환도 거기에 속했다.

"못된 아비로군."

"예?"

"아니, 아니야. 재인이. 오늘은 많이 바쁜가?"

"아닙니다. 사장님과는 지난주에 지시하신 바가 있고, 김 시...김 사장님이 방문하는 주기도 아니니까 지금 출발하셔서 일들을 처리하면 저녁 시간대에는 알맞으실 것 같습니다."

"좋군. 가세나."

"회장님, 전 먼저 차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천천히 나오십시오."

"그래. 고맙군."

12월이었던 지난주만 해도 날이 쌀쌀했으나 새해의 여파인지, 아니면 단순히 계절의 흐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준비를 마치고 저택을 나온 장희준은 오늘따라 햇살이 눈부시지 않고 찬 공기 역시 한층 수그러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푹하다곤 할 수 없었지만 썩 좋은 날씨였다.

***

회장이라고 해서 경영에 전적으로 나서지 않지는 않았다.

연말에 세웠던 기획들을 차근차근 추진하기 위해 팀을 배치하고, 묶어놓았던 자금을 굴리고, 며칠 지났다고 그새 작년 물품이 된 창고 내 잔고의 처리방안들이 속속들이 올라와 결재를 기다린다. 사장 자리가 비어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희준은 세세하게 지시하고 또 행동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뒤집어 말하면 그 사장도 그리 신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바쁘기 그지없었다.

"회장님, 점심 드시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바깥에서 드실 것을 조금 사 왔습니다."

"아침에 든든히 먹어 괜찮아. 지금은 생각이 없으니 자네가 먹게. 재인이 자네도 아직 끼니를 못 때우지 않았나?"

"저만 먹어서 되겠습니까."

"나야 저녁 때 가족들과 번드르르한 식사를 하러 갈 테니 그 때까지 부른 배를 꺼뜨리는데 주력하지. 하루 이틀 일 아니잖나. 먹고 오게나."

"..알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강재인이 인사하고 나가자 드넓은 회장실에는 장희준 홀로 발하는 인기척과 책상에 어지럽게 쌓인 서류철들이 풍기는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나름 손꼽히는 건물 중 하나인 백석 그룹 본사 건물, 그 중에서도 고층에 속하는 회장실에서 보이는 서울의 광경은 멋드러졌지만 또 아득했다.

"울산에 작은 상회를 꾸리던 내가 이렇게 높은 건물에서 그럴 듯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자신도, 아내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결과였다. 백석 상회를 꾸렸을 때의 장희준은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그 젊음에 비례해 야망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야망은 단순히 이름만 있는 작은 상회로 남지 않겠다는, 이른바 누구나 가질 법한 그런 크기의 야망이었다. 서울에 올라와 세를 이토록 불리게 되고, 무너지지 않을 권력의 성을 구축한 것은 그 야망이 작은 야망으로서만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야망에 몸을 던진 대신 아내는 더 이상 세상에 없게 되었고, 딸은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장희준은 야망도 야망이지만 좀 더 가족의 곁에, 장지연의 곁에 있어주어야 하지 않았는지 가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랬다면, 집은 집으로, 새로이 짜맞춰진 가족의 관계는 지금의 삐걱대는 양상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생일날이랍시고 깨달아 혼자 있으면 이렇게나 주책이지. 이런 때 당신이 나이들어서 약한 소리나 한다고 잔소리 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허허, 웃던 장희준은 잡은 펜을 놓았다. 급한 건은 그럭저럭 지시 사항을 아래로 전달한 뒤였다. 남은 것은 당장 급한 일들이 아니었다. 장희준은 갑작스레 피로감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 쉬이 들어올 사람 없는 회장실은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기 좋은 공간이었다.

***

"회장님, 아가씨와 경무관님께는 말씀해주셨던 레스토랑으로 와 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바로 레스토랑으로 가시겠습니까?"

"그래. 오늘따라 집중이 안 되더군."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지요."

"나만큼 고생하는 게 자네인 것도 알고 있지."

"별말씀을요."

강재인은 수화기를 들어 본사 앞에 차를 대기시키라고 말하고는 짧게 무어라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자네와 태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무엇보다..오늘 같은 날은 온전히 가족들과 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저녁 다 되어서 그런 말 해봤자 영양가가 없지만 말이지."

"어머.."

"언제나 고생이 많아. 오늘은 자네도 일찍 들어가게나."

"생일날이셔서 그런가, 오늘따라 많이 부드러워지신 것 같으세요."

"아아, 새해에 나이를 먹고 생일 되어 또 나이 먹는 기분이니 두 배로 늙어가는 기분이거든."

엘리베이터로 내려온 뒤 장희준과 강재인은 회사 입구로 나왔다.

깊은 밤처럼 어두운 사방을 건물에서 나오는 빛과 가로등 불빛, 도시 내 자동차들의 라이트들이 비추어 어둡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래, 오늘 같은 기분을 계속 느끼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일년에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아."

장희준은 자동차 뒷좌석의 문을 열고 들어갔고, 강재인은 인사를 한 뒤 자동차가 출발하자 등을 돌려 걸어갔다. 지금 가는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은 비록 엇나간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단란한 척해도 괜찮을 것이다. 더 이상 이런 생일날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 장희준은 창밖을 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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