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9

서재호 생축글

경찰을 그만 두고 기자가 된 뒤로 이토록 완연한 봄을 느낀 적이 또 있었을까.

나 생일이요, 하고 자랑하는 일은 없지만 한 번 알려주고 난 뒤 달력에 적어두기라도 하는지 12시 땡하자마자 예약이라도 해놓은 듯 문자로 생일 축하한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생일날 시간 비어있으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말에 고맙다고 인사하고 너무 늦게 자지 말라며 답장을 보내두었다. 생일. 3월 29일. 때때로 부는 바람이 차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봄이었다. 최근에는 일감을 줄여나가고 있었고 모처럼 생일이기도 하니 일 생각은 뒷전으로 넘기고 끝내주게 느긋해져볼까 생각하며 침대에 누웠다.

***

아침에 눈을 뜨니 맑고 쩅한 햇빛이 새어들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요즘은 연이어 날이 맑고 햇빛 역시 따스했다. 작은 창문을 열어놓으니 그 사이로 바람도 들락날락했다. 철야나 마감 치는 일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반찬가게에서 사둔 반찬과 계란, 햄을 곁들여 식사를 마쳤다. 누군가는 가족들 없이 혼자 있을 때 유독 하루를 독차지한 양 무엇이든 할 의욕이 솟구친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어쩐지 하루를 일찍 시작했다는 사소한 사실에 괜시리 기분이 좋았다.

"이 나이 되어서도 생일 날이라고 감상에 젖을 만한 감성이 남아있었나.."

띠링-

문자 알림음이 작게 울려 핸드폰을 보았다. 혜연이였다.

-재호 씨,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다면 같이 저녁 먹는 건 어떠세요? 설희도 올 거에요.

-원래도 없었지만 설희도 온다면 어른이 되어서 빠질 수 없지. 장소랑 시간 안내 좀 부탁하지.

7시까지 요 얖 큰 사거리로.

지금 시간은 막 8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아침도 먹었고 오후 7시까지 시간이 차고 넘치게 있는지라, 백수 한량이 된 것처럼 인간 광합성이나 해볼 참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뒤 몸을 깨끗이 씻고 전보다 거뭇한 수염도 깎았다. 소매가 길고 낙낙한 상의에 마찬가지로 낙낙한 바지를 골라 입고 신발도 부츠가 아닌 운동화를 신었다. 습관적으로 챙기던 가방도, 카메라도 없이 작은 지갑이랑 휴대폰만 챙기니 몸이 지나치게 가볍게 느껴졌다.

"......"

감춰졌던 진실은 밝혀졌고, 10년 동안 매달려 온 일들은 일단락되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부끄럽지 않은 기자에 한발짝 다가선 게 아닐까.

이제는 또 다른 일들을 겪고 매달리게 될 거다. 그러려면 지금의 이 시간도 즐겨두어야 맞았다.

"..다녀올게."

쓸쓸하면서도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

집을 나와 공원 산책로를 쭉 걷는데 뉴스에서 보도되는 개화 시기보다 훨씬 빠르게 핀 꽃들이 눈에 띄었다. 노란 개나리, 다른 곳은 피지도 않았는데 아주 아주 성급하게 꽃망울을 터트린 작은 벚꽃 가지. 언젠가 이 주변이 만개한 꽃으로 뒤덮이면 다같이 놀러와서 사진도 찍고 먹고 마시기 좋아보였다. (같은 생각한 부모들과 아이들의 행렬로 북작북작하겠지만) 그러다가 휴대폰 카메라로 꽃이 예쁘면 꽃을 찍고, 하늘이 썩 푸르러 하늘을 찍고, 나무결이 인상깊으면 나무를 찍었다. 인물 사진, 사건 사진만 찍다가 이렇게 자연물을 찍고 있으려니 집에 가서 몇 개 뺴고 다 지우겠지 하는 생각보다 이제껏 손대보지 않은 일들을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는 사소한 즐거움에 웃음이 터졌다.

"이거이거 다른 녀석들은 알지 못 할테니 아쉽구만. 이런 감성 있는 아저씨의 모습을 다들 알아줘야 하는데!"

벤치며 가족 단위로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는 휴식 공간에서 기름 냄새가 거슬리지 않게 풍겨와 주위를 둘러보니 차량 칸에 핫도그를 파는 게 보여서 참지 않고 바로 다가갔다. 나들이 때도 아니고 평일인지라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영업은 제 시간에 하는 듯했다.

"감자 붙은 핫도그로 하나 주십쇼."

"예, 1500원입니다."

"여기요."

주문을 받고 바로 튀기는지 통, 통 하는 소리와 함께 만드는 소리가 분주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흥겹게 튀겨지는 감자 핫도그를 기다리는 마음이란. 양시백이가 옆에 있었다면 나잇값 못 한다고 가볍게 놀렸을 것이고, 혜연이나 설희가 있었다면 어떤 맛인지 물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꽈배기라면 모를까 핫도그란 음식은 아쉽게도 바로 먹지 않으면 맛이 없어서 포장을 할 순 없었다.

"머스타드랑 케찹 어떤 걸로 해드릴까요?"

"둘 다요."

촤촤촥, 작고 현란한 솜씨로 두 소스를 교차해 뿌려준 주인이 핫도그를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척 보기에도 몹시 뜨거워보였다.

"많이 파십쇼~"

"감사합니다."

벤치에 자리잡고 앉아 갓 튀겨져 따끈한 감자 핫도그를 후후 불다가 한 입 물었다. 두껍지 않은 튀김옷에 감자가 들어가 고소했고 케찹과 머스타드가 뒤이어 느끼한 맛을 잡아주었다. 가운데에 꽂힌 후랑크 소시지는 세월이 지나도 핫도그의 꽃이었다. 핫도그를 먹으며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은 드문드문 올라와 있고, 당분간은 비 소식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모든 근심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꼭 그런 것 같아서 이것이 생일의 마법인지, 휴식의 마법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

"아, 저기 재호 씨에요!"

"아저씨~! 여기에요! 여기!"

"아직 7시도 안 됐는데 먼저 와있었구만?"

"아저씨도 그렇잖아요."

"안녕하세요."

"설희도 안녕."

"생일 축하드려요, 아저씨."

"고마워, 설희야. 오늘은 아저씨 생일이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

"길 안내는 제가 할게요!"

혜연이는 설희의 손을 잡고 앞장 섰다.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르며 내 옆에 선 양시백이가 툭 물었다.

"아저씨, 오늘따라 얼굴이 반질반질해 보이는데 오늘 푹 쉬셨나봐요?"

"아, 뭐...간만에 일찍 일어나서 끼니 제 때 먹고, 공원으로 나가서 햇빛도 듬뿍 받고 산책도 충분히 했거든."

"생일이라고 해가 서쪽에서 떴네요."

"나도 건강 관리 좀 하고 그래야지."

"잘 생각하셨어요."

"아주 느긋한 하루였지. 나쁘지 않았어. 근데 나도 늙었나 봐."

"왜요?"

"맛있는 거 먹고 있으려니 자네들 생각이 모락모락 나지 뭔가?"

"뭘 드셨길래요?"

"감자 핫도그. 공원에서 파는 게 맛이 좋더군."

"상상하니 배고프네..나중에 넷이서 가요. 권혜연 씨랑, 설희랑 다같이."

"그래야지."

문득 앞장섰던 혜연이가 빙글 고개를 돌렸다.

"오래오래 건강하셔야 돼요?"

"아니 갑자기 치고 들어오기야?"

"끼니 잘 챙기고 산책도 자주 하시면 앞으로도 계속 좋은 얼굴빛이실 거 아녜요. 그치 설희야?"

"오래오래 사세요, 아저씨."

"이거 우리 설희에게까지 걱정받다니 노력 좀 해야겠구만."

"아무래도 제일 연장자니까요. 자, 도착했어요. 재호 씨 먼저 들어가세요."

혜연이는 문을 열어주었고, 세 사람의 따스한 눈빛 -연장자 우대- 을 받으며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생일상은 원래 그 주인이 계산해야 하는 법. 양시백이와 혜연이 모르게 빌지를 슥삭 챙길 생각에 실없는 웃음이 푹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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