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백] 28살의 남자이지만 부업으로 마법소녀를 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안전보다 당장 내일의 월세가 더 위기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양시백은 쥐어짜듯 조이는 심장을 콱 움켜쥐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호흡하는 것마저 고통스러울 만큼 폐는 깊숙이 말라 있었고 공기 중에 산소는 턱없이 부족했다. 날숨마저 아까워 헐떡이는 입에선 차마 삼키지 못한 침이 뚝뚝 떨어졌다. 메케한 연기에 사고가 흔들렸다. 땀방울이 눈에 들어가 똑바로 앞을 보기 어려웠다. 거추장스럽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일그러진 풍경이 보였다. 사방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푸르던 하늘도, 색색의 사람들도 없었다. 매섭게 울부짖는 화염과 다 타버리고 바스러지는 건물들만이 도시에 남아있었다. 양시백은 이를 꽉 깨물었다. 젖 먹던 힘을 짜내 일어나자 다리에서 천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스타킹이었다. 군데군데 찢겨 제 형체를 잃어버린 하얀 천 쪼가리가 가련하게 그의 허벅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양시백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곤 전방에 힘껏 소리쳤다.
"젠장, 꼭 이래야만 했던 거냐고――!!"
28살의 남자이지만 부업으로 마법소녀를 하고 있습니다
W.T. HA_RUT_
태평하게 날아온 각종 청구서에 양시백이 기절하지 않은 건 오로지 기합 덕분이었다. 기합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최재석의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양시백은 몇번이고 청구서에 적힌 숫자를 세어보고 또 세어봤다. 예상보다 훨씬 웃도는 금액에 다시금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겨우 버텼다. 못 낼 형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턱턱 시원스레 낼 형편도 아니었다.
'소녀를 구한 영웅'으로 양시백이 뉴스에 한 번 소개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서울을 뒤흔들었던 큰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보니 동네엔 이미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맨손으로 납치범을 때려잡았다더라, 발차기로 달리던 차를 멈췄다더라, 벽을 타고 넘어가며 납치범을 쫓았다더라 등등 별별 소문이 과장되어 아주머니들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양시백은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았다. 할 수 있다면 평범한 소시민답게 조용히 살고 싶었다. 하지만 도장에 등록하려는 아이들이 급격하게 늘어났을 때, 양시백은 구태여 소문을 부정하는 짓은 깔끔하게 그만두기로 했다.
일주일에 나흘 정돈 오로지 라면만 먹으며 겨우 살아가던 양시백은, 늘어난 수강생 덕분에 처음 몇 달간 비교적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 모두가 태권도를 오랫동안 사랑해준 건 아니었다. 달이 갈수록 아이들 수는 줄어들었고 급기야 방학 시즌이 아니면 이전의 학생 수를 채울 수 없게 되었다. 체력을 기를 시간에 다들 국영수를 배우러 떠났다. 사람은 자고로 몸이 튼튼해야 정신도 튼튼하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양시백이 할 수 있던 건 그저 묵묵히 다시 1+1하는 라면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라면 가게를 차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 라면 끓이는 솜씨가 장인에 다다랐을 때 양시백은 적잖은 현자 타임을 가져야 했다. 아이들은 좋아한다. 태권도도 좋아한다. 무엇보다 이곳은 최재석이 남겨준 장소이니 절대 다른 누군가에 넘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궁핍했다. 차라리 찢어지게 가난하면 지원금이라도 신청해보는 건데 애매하게 가난해서 받을 수 있는 지원도 없었다. 양시백은 굳이 이런 곳에서 소시민인 걸 나타내고 싶지 않았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디선가 큰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을까. 사회적으로 문제없는 큰돈을 벌 방법은 어디 없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양시백에게 찾아온 건 어느 대기업의 회장도 아니고 어둠의 조직폭력배도 아닌 함께 가난하게 사는 기자 아저씨, 서재호였다.
사람이 찾아오기엔 아무래도 이른 아침에 서재호는 양시백의 도장 문을 두드렸다. 빚에 쫓기는 신세는 면했음에도 꽤 길게 시달렸던 탓에 흠칫 몸을 떨었던 양시백은 상대가 서재호인 걸 알고 온갖 욕지거리를 순화해서 중얼거렸다. 분노를 담아 문을 활짝 열자 거기엔 말끔하게 뒤로 넘겨진 머리카락과 각이 잡혀 라인이 살아있는 정장을 차려입고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서재호가 서 있었다. 양시백은 이때 아주 불안한 직감을 받았다. 평소에 절대 저런 차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뜸 깔끔하게 차려입고 찾아와선 용무가 있는 것처럼 웃는다? 양시백은 자신이 만났던 수많은 사채업자들이 머릿속을 스쳤고 이성의 한 구석에서 위험을 알리는 사이렌의 불이 탁 켜졌다. 양시백은 뭐라 말할 것도 없이 급히 문을 닫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틈엔 두껍게 말린 신문지가 턱 끼워졌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물건인지 모르겠으나 문틈 너머론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서재호가 있었다. 그의 웃음이 이토록 무섭게 느껴지는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공포에 질려 새된 소리를 지르는 양시백에게 서재호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은 아침일세, 양시백이. 갑작스럽게 미안하네만 마법소녀가 되어주지 않겠나?"
"…………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얼이 빠진 사이 서재호는 틈을 놓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앞으로 훅 넘어질 뻔한 걸 간신히 바로 잡고 섰으나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이 아저씨가 뭐라고 한 거야?
"……다, 다시 한번…뭐, 뭐라고요? 뭐가 돼 달라고요?"
"마법소녀 말일세. 지금 급하게 사람을 구하고 있거든."
"……마법소녀요?"
"그래. 마법소녀."
"그 마법소녀요?"
"그래, 그래. 설희가 자주 보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그 마법소녀 맞다네."
만약 이게 만화였다면 지금쯤 양시백의 머리 뒤론 광활한 우주와 함께 하찮은 고양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그만큼 황당하기 짝이 없는 내용에 양시백은 생각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당황했다. 제안에 답을 해줘야 한다는 성실함, 근데 내용이 너무 이상하지 않냐는 의문, 그런 이유로 찾아온 게 왜 자신인지 모를 수수께끼에 더불어 28살이 되도록 한 번도 본인에게 적용해보지 않은 '마법소녀'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이 한데 모여져 양시백은 혼이 빠지듯 답했다.
"……일단 저……남자인뎁쇼?"
그 대답에 서재호는 잠깐 얼이 빠진 얼굴을 하더니 곧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뭘 이해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양시백은 조급하게 뒷말을 이었다.
"저 남자예요."
"마법소녀는 고유명사 같은 거라서 성별은 상관없다네."
"소년이라는 좋은 단어가 있는데 왜 안 쓰는 건데요. 아니, 그것보다, 일단 저 소녀도 소년도 아니고."
"남자는 언제나 소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그딴 이유로 마법소녀가 될 바엔 마음도 적당히 어른이 되어주길 바랄 걸요?!"
서재호는 어느 새 주머니에서 빨간 프레임의 안경을 꺼내 쓰고 있었다. 무슨 컨셉인지 모르겠다. 와중에 패션 안경인지 알이 없는 부분이 은근히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들었다. 서재호는 특유의 사람 좋은 얼굴과 목소리로 양시백의 등을 두들겨주며 말했다.
"괜찮아. 그냥 좀 반짝이고 레이스 달린 치마 입고 괴수랑 싸우는 것 뿐이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너 같은 근육이 빵빵한 남자 쪽을 원하는 수요층도 있으니까 자신감을 가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요 대체!!"
양시백은 청구서를 받았을 때보다 훨씬 깊고 어두운 절망에 다리를 휘청였다. 이번엔 알고 싶지 않은 세계의 문을 들여다본 것 같아 정신적 타격을 심히 입어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와중에 서재호는 친절히도 넘어진 양시백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도 앉아주었는데 그대로 그를 토템처럼 바닥에 꽂아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아냈다. 양시백은 아파지는 머리를 쥐어짜며 미간을 짓눌렀다.
"아저씨……술 취했어요?"
"그래, 그래. 보통 다들 그런 식으로 날 몰아붙여서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그랬던 놈들 전부 지금은 어엿한 마법소녀가 되었다네. 정말 멋지지 않나?"
"아, 제발. 부탁이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줘요. 제발……."
정말 모르고 싶었던 정보였다. 가능하다면 죽고 나서도 모르고 싶었다. 놈들이라고 했던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법소녀를 하고 있다는 건가. 지금까지 잘도 아무도 모르게 활동해왔다. 한 번이라도 봤으면 강렬한 이미지 탓에 반대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양시백은 무력감에 고개를 푹 숙여 아예 바닥에 이마를 맞붙였다.
그때, 바닥에서부터 미약한 진동이 살을 타고 느껴졌다. 지진이라기엔 진동의 길이가 짧았다. 진동은 점점 강해져 왔고 아주 커다란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양시백은 고개를 바짝 들었다. 하늘에서부터 공기의 파동이 깊게 너울거렸다. 전봇대에 있던 비둘기들이 떼 지어 날아올랐고 새들의 그림자 너머 지평선 가까이에 아주 커다란 산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10년 넘게 이곳에 살았지만 저런 곳엔 산이 없었다. 의아스럽게 여기고 있자 멀리 있던 산이 대뜸 좌우로 흔들리더니 점점 크기를 키워나갔다. 그에 맞춰 발아래로 흘러들어오는 진동의 세기도, 공기를 울리는 웅장한 굉음도 점점 커지며 양시백은 그제야 저것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자자자자자자, 잠깐, 잠깐, 잠깐!!! 잠깐만요!!! 재호 아저씨?! 아저씨 지금 저기, 저기, 저기 보여요?! 저기 지금 뭔가 오는데!?! 뭔가 오고 있는데!?!?"
양시백이 호들갑을 떨며 서재호의 목덜미를 붙잡고 창가에 끌어다 놓자 그도 정체 모를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오~ 하고 가볍게 탄성을 내질렀다.
"하하, 놀랄 것 없네. 그냥 단순한 괴수일세."
"아……그랬군요, 라고 제가 납득할 거라 생각했어요?! 괴수요?! 괴수!? 지금 서울 한복판에 괴수가 뭔 개소립니까!?"
"살다 보면 서울 한복판에 괴수도 나타나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 이래서 내가 급하게 사람을 구했던 건데 떼잉……양시백이가 자꾸 튕기니까 늦었졌잖나. 어떻게 책임질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제 책임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뎁쇼……."
괴수의 덩치가 워낙 커서 그런지 멀리서도 모습이 자세히 관찰됐다. 괴수는 커다란 덩치와 무시무시한 압력에 비해 꽤……조잡했다. 장난감 코너에 가면 한 번쯤은 봤을 법한 공룡 디자인의 모형과 똑같이 생겼다. 그런데 그게 어떤 기교도 없이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도시를 향해 걸어오니 그건 그것 나름의 공포가 있었다. 아무리 조잡하게 생겨도 괴수는 괴수인지 건물이 무너지고 폭발이 여러 곳에서 일어나면서 멀리서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삽시간에 벌어지는 재난에 양시백은 경악에 차 숨을 멈췄다. 서재호는 그런 양시백의 어깨를 돌려 세웠다. 아까까지 있었던 가볍고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심각하고 진지한 공기가 둘 사이에서 흘렀다. 폭발은 분명 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데 창문 너머로 붉은 빛이 들어와 재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강하고 짙은 그림자 속에선 밝게 빛나는 녹금의 눈동자가 양시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재호는 양시백의 어깨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강조하듯 말했다.
"양시백이……나와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어주게!"
동시에 창밖에서 다시 폭발이 일었고 외부의 창문이 전부 깨지며 유리알이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유리알들이 쓸데없이 예뻤다. 폭발의 진동에 양시백은 몸을 흔들며 유리로부터 얼굴을 막기 위해 팔을 들었는데 가려진 시야 너머로 서재호를 봤을 때 그는 굳건히 제자리에 서서 양시백만을 보고 있었다. 괴수는 분명 멀리 있었는데 어느 샌가 가까이 다가온 듯했다. 애초에 폭발은 어떻게 일어난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연속으로 발생하니 오히려 처음보단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적어도 성별이라던가 나이라던가 한쪽 정도는 맞춰달라고요……! 설희 있잖아요. 한창 마법소녀니 뭐니 좋아할 나이잖아요!"
"양시백이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설희같은 어린애한테 저런 괴수랑 싸우게 하라고?"
"왜 갑자기 맞는 말을 하지? 아잇, 그럼 현아는요? 누구보다 가장 마법소녀에 어울리는 애잖아요."
"문현아도 미성년자이지 않나……. 양시백이……아이들을 이끄는 태권도 관장이 지금 미성년자를 싸움터에 내몰겠다고 말하는 건가?"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아 이런 젠장! 그럼 혜연 씨는요? 순경이잖아요. 지키는 일의 연장선이라고 보면 되잖아요."
"혜연이한테 이런 일을 시키면 내가 형님 볼 낯이 없어서……."
"오미정 씨."
"사이가 어색해질 것 같아서……."
"10년 동안 만난 적도 없으면서 이 이상 어색해질 게 뭐가 있는데요?!"
양시백이 이때 서재호를 때리지 않은 건 그가 평생 낼 수 있는 인내심의 전부를 냈기 때문이리라. 차마 저 얄미운 얼굴은 때릴 수 없었던 그는 대신 옆에 걸린 샌드백을 향해 실컷 내리쳤다. 답답함에 고함을 내지르며 실컷 샌드백을 때리자 마침내 양시백의 힘을 견디지 못한 샌드백은 마지막 일격에 반대편 벽까지 날아갔다.
"에라이 그냥 아저씨가 싸워요! 아저씨가 마법소녀가 돼서 싸우면 되잖아요!"
"아 나는 사무직 담당이라 싸움엔 젬병일세. 관할도 아니고."
"아오 진짜!!"
옆에 매달려있던 여분의 샌드백을 발차기로 쭉 찢어버리고서야 양시백은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현실일 리가 없었다. 자신은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최근 돈에 너무 시달려서 이런 이상한 꿈을 꾸는 것이다. 양시백은 벽을 붙잡고 세차게 머리를 여러 번 내리찍었다. 극심한 고통이 적나라하게 느껴짐에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프면 안 됐다. 여기가 현실이라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주르륵 흐르자 옆에 있던 서재호가 부드럽게 그를 말리며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에헤이, 릴랙스하게나, 릴랙~스. 침착하고 잘 생각해보게. 마법소녀도 엄연한 직업일세. 경찰 같은 거라고? 지켜야 하는 범위가 좀 넓고 상대가 더 위험할 뿐이지."
"마법소녀가 직업이라고요? 마법소녀가?"
"그렇다니까? 암암리에 숨겨져서 그렇지 아무나 못 한다는 공무직일세."
"마법소녀가?!"
"돈도 준다네. 자넨 신참이라 적을 수도 있네만 불만족스럽진 않을 걸?"
"돈을……? 어, 얼마나 주는데요?"
"……이 정도."
서재호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펜으로 작게 금액을 적어 내려갔다.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에 양시백은 눈을 수십 번을 비비며 금액을 헤아리고 또 헤아렸다. 있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한 번만 받아도 1년은 족히 놀고 먹을 수 있어 보였다. 안 그래도 바닥을 기는 현실성이 이젠 내핵을 뚫어 존재감조차 옅어졌다. 대신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발목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왜 이렇게 많이 줘. 뭐야. 뭔데요. 뭘 담보로 두고 있는 건데요."
"하하, 뭘 그렇게 자꾸 묻나. 너무 많이 물으면 다쳐."
"목숨이죠? 이거 목숨값이죠? 그쵸?"
"하하하."
"재호 아저씨-!!"
역시 큰돈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죽으면 못 받는 것 아니겠나. 심지어 자신은 유일했던 가족도 이젠 없으니 돈을 대신 수령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깔끔하게 물리기엔, 역시 금액이 상당했다. 왠지 창밖의 괴수도 첫인상보다 더 하찮아 보이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마법소녀라는 게 된다면 어쨌든 대단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어떻게든 비벼보면 저런 괴수 한 마리쯤은 퇴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죽느냐 버느냐의 간단한 문제. 거의 도박에 가까운 선택지에 양시백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안 할 건가? 자네 월세가 걱정이라며."
"윽……."
"이번 달은 낸다고 쳐도 다음 달은 어쩔 건가? 그다음 달은? 식비는? 요즘 미치도록 오르고 있는 전기세랑 수도세는 감당할 수 있겠나? 가스비는?"
"으윽……."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그냥 부업이라고 생각해. 실컷 배운 태권도를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써먹겠어, 응? 몇 대 좀 때려주면 지구도 지키고 자네 통장도 지킬 수 있다네. 완전 꿀이지 않나?"
아.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예전에도 이랬던 적이 있었다. 돈에 눈이 멀어 아주 아주 큰 사건에 휘말린 경험이 분명, 있었다. 사건 이후 양시백은 스스로 다짐했다. 만약 또 돈에 쪼들리는 가슴 아픈 경험을 하게 되더라도 절대 욕망에 넘어가지 않겠노라고. 태권도를 수련한 사람답게 맑은 정신으로 버티자고. 하지만 다짐을 지키기엔 제시된 금액이 커도 너무 컸다. 흔들리는 시야가 괴수 때문인지 양심과 싸우는 자신의 정신 상태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자, 양시백이. 어쩔 텐가?"
선한 얼굴의 악마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진실한 속삭임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좋은 일을 하는 거랬다. 세계도 지키고 돈도 버는 거니 손해 보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비록 성인 남성이 대낮부터 당당하게 입기엔 아무래도 시대가 이른 듯한 복장이 필수라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이 정당성을 부여했다. 양시백은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차마 이 광경을 스스로 볼 자신이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악마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얼굴이라도……가려주세요……."
"아, 물론이지! 철저하게 가려주고 말고!"
양시백. 28살. 본업은 태권도 사범(곧 관장). 돈에 무릎을 꿇고 생존을 위해 부업으로 마법소녀를 시작했다.
"저 괴물을 상대로 맨몸으로 싸우라고요?! 사람 죽을 일 있어요?!"
"자네는 지금 마법소녀라서 지구가 폭발하지 않는 한 죽을 일은 없으니 안심하게. 저 괴물한테 주먹 한 대 맞아도 성인 남성의 혼신 펀치를 맞는 것보단 덜 아플 테니 그냥 덩치만 큰 놈이라고 생각하면 쉽다네."
"압력이 다르잖아요, 압력이-!!"
조잡하지만 거대한 괴수의 앞에 양시백은 엉거주춤 자세를 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대 맞으면 그대로 최재석을 만나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옷이 신경 쓰여서 제대로 자세를 잡을 수 없었다. 허벅지 위로 팔랑이는 치마, 치마에 가득 달린 레이스, 훤히 가슴 윗부분을 드러낸 상의와 포인트로 자리 잡은 거대한 리본, 평생 신어본 적도 없는 플랫슈즈, 그리고 매끈하고 부드러운 흰색 스타킹이 근육질의 다리를 간지럽혔다. 양시백은 애니메이션 속 마법소녀들이 경이로웠다. 이렇게 입고 저런 괴수랑 싸우는데 누구에게 말도 안 하고 살다니. 어린 나이에 어쩜 그렇게 다들 대견할 수 있는지 존경심이 넘쳐흘렀다. 양시백은 아슬아슬한 치맛자락을 계속 아래로 잡아 당기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많은 것이 이상하지만 자신만이 이 괴수를 무찌를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정확히 어떻게 무찌르면 되는 겁니까? 그냥 계속 때리면 되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느낌을 담아 주문을 외워도 된다네. 본인에게 싸우기 편한 쪽으로 선택하시게나. 다만, 마지막은 반드시 저 괴수의 영혼을 회수해야 한다네."
"영혼을 회수한다고요?"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되물어보던 그때, 양시백의 대각선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순식간에 덮쳐왔다. 돌풍이 거세게 일며 그의 짧은 치맛자락이 펄럭였고 양시백은 바로 옆으로 빠지기 위해 몸을 틀었다.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릴 생각이었다. 정말로 피할 수 있을지에 관한 확신조차 들지 않던 짧은 순간이었다. 양시백은 허벅지에 힘을 단단히 주고 그대로 땅을 박차고 뛰었다. 그러자 아주 낯선 감각이 온몸을 휘둘렀다. 숨이 막히도록 거친 운동을 마친 후 시원한 물 한 병을 그대로 전부 들이켰을 때, 뼈가 아스러질 정도로 추운 곳에 있다가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푹 담갔을 때, 밤을 지새우며 일하다 겨우 침대에 누웠을 때. 긴장하고 있던 온몸의 근육이 한순간에 풀어지며 신선한 공기가 폐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몸 안에 갇혀있던 케케묵은 것들을 전부 밖으로 끄집어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그런 감각이었다. 양시백은 날고 있었다. 본인조차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옆 건물 벽을 향해서.
"으, 으, 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단말마와 같은 양시백의 처절한 외침은 건물 벽이 부서지는 소리에 삼켜져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벽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안쪽엔 바닥에 몇번이고 굴러 엉망이 된 양시백이 널브러져 있었다. 양시백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바람이 일고 시멘트 가루가 눈을 간질였다. 양시백은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상처가 하나도 없는 것은 물론이요 옷자락 하나 망가진 곳이 없었다. 머리야 원래 산발이니 그렇다 쳐도 가벼운 철과상 하나 보이지 않는 현실에 양시백은 이제 감탄밖엔 나오지 않았다. 이게 바로 마법소녀의 힘이었다. 괴수한테 맞아봤자 죽지 않을 거라던 서재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기야 이렇게 싸울 때마다 옷이 찢어지면 그건 그것대로 심의에 좋지 않았다.
「아-아-. 양시백이-. 들리나-?」
"엥? 아저씨? 뭐야. 나 지금 휴대폰 안 들고 있는데. 재호 아저씨-! 여깄는 거예요-?!"
「아잇. 소리 좀 지르지 마! 자네 가슴 리본에 달린 파란색 보석을 통해 말을 걸고 있는 걸세. 아무리 나라도 빛의 속도로 날아간 자네를 따라잡을 순 없지 않은가?」
"아……. 이거 통신도 되는 군요……. 아저씨 지금 어디예요?"
「괴수 머리 위에서 상황을 보고 있는 중이야. 정신을 차렸으면 어서 돌아오게. 서두르지 않으면 괴수가 서울은 물론이고 부산까지도 내려가겠어! 발이 큰 친구라서 그런가 KTX보다 빠르게 도착할 것 같아!」
"아, 알겠어요! 지금 다시 돌아갈게요!"
'어떻게 괴수 머리 위로 올라갔나요?'라는 질문은 묻어두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보면 또 말도 안 되는 방법이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을 한 번에 겪은 양시백에게 이제 하늘을 나는 서재호의 존재는 세세한 문제에 불과했고 그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괴수를 저지하는 일이었다. 양시백은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역시 몸에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얼마만큼의 힘을 담아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조절을 하면 마치 악셀과 브레이크를 밟는 것처럼 대략적인 조정이 가능했다. 양시백은 멀리 있는 괴수와 자신의 거리를 가늠하고 힘껏 발을 내디뎠다. 발이 있던 바닥이 깊게 파이며 땅이 솟구쳐 올랐고 동시에 거센 돌풍과 함께 양시백은 괴수의 앞까지 순식간에 날아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가긴 했으나 처음보다는 나았다. 양시백은 땅에 발을 내리고 자리에 섰다. 괴수는 양시백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 한 채 계속해서 앞을 향해 걸어갔다.
'우선 발을 묶어두는 편이 좋겠지?'
자신의 힘이 괴수에게 어디까지 통하는 지 알 수 없는 이상 주먹을 휘두르기 전, 괴수가 이동하고 있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가능하면 눕혀야 했다. 괴수의 팔은 몸에 비해 상당히 짧았다. 빠르게 일어서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초월적인 다리 근육의 힘으로 벌떡 일어서버리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눕혀 놓는다면 적어도 잠깐은 이쪽이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양시백은 양발을 통통 튀기며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가볍게 근육을 풀어준 뒤 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마침 괴수가 다시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고 몸의 균형이 기울어지던 그때, 양시백은 다시 땅에서 튀어 올랐다. 그리고 아직 땅에 붙어있는 괴수의 다리 바깥쪽으로 돌아 안쪽을 향해 발을 힘껏 날렸다. 순간 귀를 찢을 듯한 파열음이 바람과 함께 파도가 일렁이듯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곧바로 괴수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괴수의 울음소리에 공기가 흔들렸고 지진이라도 난 듯 몸이 떨렸다. 괴수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맥없이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예상보다 쉽게 무너져 오히려 양시백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 한 방에 성공했는뎁쇼? 이래도 되는 건가요?"
「뭐, 이번 녀석은 C 등급의 괴수니까 쉽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되겠지. 자네 같은 신입엔 딱 좋은 상대라고 생각한다네. 그리고 쉽게 이겼다고는 하지만 자넨 자네도 모르는 사이에 마력을 거의 전부 소진한 거나 다름없어. 필살기 수준의 발차기를 날린 거라고. 다음엔 힘 조절 좀 하게.」
"아, 알겠습니다. 세게 때려야 한다고 생각했더니 그만……. 그건 그렇고 괴수한테도 등급이 있어요?"
「물론이지! A부터 C등급까지 있고 각 등급은 +,-로 세세하게 난이도를 구별하고 있다네. 지금 자네가 상대하고 있는 괴수는 딱 평균적인 C등급의 공격력을 가진 괴수일세. 대충 때려도 잡히니까 대체로 신입들한테 맡기는 게 우리 쪽 문화일세. 상냥하지?」
"……어쩐지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에헤이~ 정 없는 소리 한다~. 자네가 저놈을 안 잡아주면 지금 서울은 누가 지켜주겠나! 너무 자세히 따지려 하지 말고 어서 쓰러트리기나 하세. 아직 영혼 회수도 하지 않았잖아? 계약을 한 이상 자신이 맡은 바는 충실히 임하도록!」
능글맞는 아저씨 같으니. 돌아가면 태권도 수련 연속 3시간 코스에 넣어줄 테다. 양시백은 한숨을 내쉬며 괴수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괴수는 양시백의 생각대로 바로 일어설 수 없는 녀석이었다. 짧은 팔을 앞뒤로 흔들며 다리 힘으로 일어서기 위해 몸을 비트는 놈의 몸통 위로 양시백은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자 아까까지 보지 못했던 빛나는 물체가 괴수의 심장 근처에 떠다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 크기가 컸던지라 이토록 작은 빛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빛은 정확한 형태를 띄고 있지 않았으나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찬란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홀린 듯 뻗친 손가락이 되려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게 바로 영혼이라는 걸세. 악의로 가득 찰 땐 까맣게 변질하여 괴수를 만들어내지만, 마법소녀의 힘으로 전투 불능 상태가 되면 영혼은 본래의 빛을 되찾는 거지. 우리는 그 빛을 회수해서 세상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거고."
머리 바로 위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무언가가 폭신한 머리카락에 안정적으로 내려앉았다. 가볍고 복슬복슬한 생명체였다. 양시백은 머리를 휘적이다 말캉하게 잡히는 녀석의 목덜미를 콱 쥐었다. 숨이 막힌 듯 꾸엑하는 비명이 들렸지만 과감하게 밖으로 끄집어냈다. 힘없이 그대로 뽑혀 나온 생명체는 어딘가 낯설지 않은 인상의 너구리였다. 털이 갈색인 점도 특이했지만 와중에 가르마가 진 것도 수상했고, 무엇보다 너구리면서 굉장히 익숙한 차림의 옷을 입고 있었다. 너구리의 등 뒤에는 배낭이 하나 있었는데 배낭에선 작은 날개 한 쌍이 애처롭게 파닥이고 있었다. 양시백은 눈을 가늘게 떴다 너구리를 다시 멀리 떨어트리며 기이하게 생긴 생명체를 유심히 살펴봤다.
"……날개 달린 너구리?"
"그냥 너구리일세. 날개는 회사에서 주는 지급품이라고. 어쨌든 너구리는 하늘을 날 수 없으니까!"
"……확인차 물어보겠는데……재호 아저씨 맞죠?"
"당연하지. 일할 땐 이 모습이 활동하기 더 편해서 이미지 체인지를 좀 해봤다네. 꽤 귀엽지?"
양손을 허리에 얹고 당당히 가슴을 펴는 모습에 양시백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애니메이션에서도 정체불명의 작은 생명체가 항상 마법소녀들 근처에 있긴 했었다. 요정이었는지 정령이었는지 아무튼. 곧 있으면 나이 40을 앞둔 아저씨가 그런 역할을 자처하는 거냐는 생각을 문득 했으나 지금 자신도 꽤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제 말하는 것도 지쳐요. 어쨌든 저 영혼이라는 걸 회수해야 한다는 거죠? 그냥 잡아 오면 되는 거예요?"
"싸움은 무식하게 해도 뒤처리는 쌈빡하게 합시다, 응? 자네가 빛에 가까이 다가가면 가슴에 달린 보석이 빛과 공명할 걸세. 보석이 빛을 전부 흡수하면 회수 완료인 셈이지."
어느 새 양시백의 어깨로 올라와 편안하게 자세를 잡은 서재호는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귀찮은 너구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양시백도 오늘은 마법소녀 옷을 이 이상 입고 싶지 않았기에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던 빛은 양시백이 점차 가까워지자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더니 자석에 이끌리듯 보석을 향해 조금씩 날아왔다. 이윽고 보석에 닿은 빛은 민들레 홀씨처럼 부드럽게 산개하다 맑은 물방울 소리를 내며 완전히 흡수되었고 보석은 선명한 푸른빛을 띄며 은은한 온기를 머금었다. 어느 새 괴수는 사라졌었고 폐허가 된 도시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래서는 도시를 구했다고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 바닥이 크게 흔들리더니 강한 바람이 등 뒤에서부터 불어왔다. 마치 세계를 감싸고 있던 포장지를 하나 뜯어내는 것처럼, 부서지고 망가져 있던 도시의 표면이 바람과 함께 날아가 꽃잎처럼 사그라졌다. 어느 새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고 복잡한 차선 위로 자동차들이 신호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나가던 행인과 어깨를 부딪히고서야 양시백은 황급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도복 차림이었다. 아무래도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변신도 풀린 것 같았다.
"저한테는 정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었는데 지금 서울을 보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 같네요."
"원리를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지고 자네도 이해하기 힘들 테니까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주자면, 옳지, 여기 이 돌멩이를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이자 세상 그 자체라고 해보세."
어느 새 인간으로 돌아온 서재호는 발밑을 구르고 있던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 손안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의 둥근 돌멩이였다. 서재호는 주머니를 막 뒤지더니 휴지 한 장을 꺼냈다. 칠칠하지 못한 성격 탓에 이것저것 들고 다니느라 그의 주머니엔 별 물건들이 다 있었다. 그는 돌멩이를 양시백의 눈앞에 흔들어 보이며 설명을 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이렇게 살아가다가……갑자기 짠! 괴수가 나타나면……이렇게, 세상은 하나의 껍질이 씌워지는 거지. '어쩌면 존재할 수도 있는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껍질이 말일세."
서재호는 돌멩이를 휴지로 감싸 대충 묶었다. 껍질이라는 단어에 양시백은 방금 전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던 광경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건 껍질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해 보였다.
"괴수는 이 껍질의 고정핀 같은 걸세.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숙이 현실에 파고들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처치해야 하지. 우리는 현재 최대 3시간으로 지정하고 있다네. 원래의 세상은 껍질이 씌워지는 순간부터 '다른 현실'이 돼. 그러니 괴수가 사라지고 껍질이 벗겨지면, 원래대로 돌아온 거나 마찬가지니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거라네. 덕분에 우리도 아주 마음껏 싸워도 되고. 편리하지?"
"확실히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를 끼치지 않아서 좋긴 합니다만."
"그리고 실수로 자네 모습이 노출되어도 딱히 상관은 없네. 적어도 얼굴만큼은 누구인지 모르도록 철저하게 필터링을 걸어놨으니까!"
"감사해야 하는 건지 당연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사람을 구하는 일은 좋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세상이 바뀔 만큼의 사건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한 때 최재석이 자신을 구해줬던 것처럼, 그가 자신의 인생을 지켜봐 준 것처럼, 자신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마법소녀를 꿈꾼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양시백은 한숨을 쉬었다. 서재호는 벌써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아저씨는 어쩌다가 마법소녀 서포터라는 일을 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역시 그도 돈이 궁했을까? 그러고 보니 돈은 언제 입금되는 걸까? 아무 통장에나 입금되는 걸까?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 업계의 회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수상한 돈을 써도 사회에 이상은 없는 걸까? 정체 모를 사람들한테 잡히지는 않는 걸까? 또 3일의 추격전을 펼쳐야 하는 건 아닐까?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근본적인 의문들이 마구 솟아났다.
"재호 아저씨, 궁금한 게 있는데……."
걱정과 불안을 품고 질문을 막 하려던 때였다. 몸이 공중에 떠오를 정도의 강한 진동이 땅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높은 건물들이 힘없이 무너졌고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하늘에서 마구 쏟아졌다. 아스팔트는 그대로 구멍이 뚫려 끝도 없는 어둠을 만들어냈다. 하늘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고 눈 뜨기 힘들 정도의 강한 돌풍이 휩쓸고 간 자리엔 생명체라고 불릴 만한 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코를 찌르는 탄 내에 숨을 참았다. 뺨을 간지럽히는 먼지들이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갑작스럽게 모든 게 변했다. 양시백은 이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처음 마법소녀를 권유받았을 때도 이랬다. 눈 깜빡할 사이에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서재호의 말이 떠올랐다. 괴수의 등장은 또 하나의 현실의 껍질이 씌워지는 거라고 했다. 이해는 했지만 좀처럼 와닿지 않았는데 또 한 번의 변화를 목격하고서야 양시백은 피부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천지를 뒤집는 거대한 진동이 멀리서부터 전해졌다. 이쪽으로 천천히 오고 있는 건 괴수였다. 고층 아파트보다도 크고, 멀리서 봐도 체감이 되는 부피감, 그리고 압도적인 위압감에도 지워지지 않는 조잡함까지. 쓰러트렸다 생각했던 괴수가 다시 걸어오고 있었다. 양시백은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고 옆에 있던 서재호를 마구 흔들었다. 그도 이런 사태는 겪어보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만 기다려, 라는 말을 남기고 급히 어딘가로 전화한 그는 몇 마디 상대와 대화를 나누더니 곧바로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큰일이야. 자네가 쓰러트린 괴수의 엄마가 나타났다는군. 골치 아프게 됐어."
"괴수의 엄마요?! 괴수도 가족이 있어요?!"
"아니 그럼 괴수가 갑자기 뿅하고 나타났겠나? 당연히 저런 놈들도 부모님의 사랑 아래 응아하고 태어난 거지."
"그래서 지금 저한테 복수하겠답시고 온 거란 말이에요? 내가 자기 자식을 죽였으니까?"
"그런 셈이지. 쯧쯧……가족의 원한은 무서운 건데……."
"따지고 보면 우리 공범자거든요?! 애초에 범죄고 뭐고 성립은 하는 겁니까, 이거?!"
"아무래도 글로벌한 사회니까 지구에선 성립이 안 되도 우주에선 성립이 될 수도 있겠지."
"누가 글로벌을 우주에서까지 찾냐고요……."
"애초에 우린 복수로 시작해서 복수로 끝나는 장르의 캐릭터들인데 2차 창작에도 복수가 있어 줘야 재미가 있지 않겠나?"
"위험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마세요, 좀!"
양시백의 불평에도 아랑곳 않고 서재호는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한 번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자욱한 연기가 갑자기 뭉게뭉게 솟아나 그의 모습을 감추더니 연기가 사라졌을 무렵엔 작고 귀여운 너구리 한 마리가 땅에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할 때는 너구리가 된다고 했던가. 멍청하게 가만히 그가 했던 말을 곱씹고 있자 서재호는 앙증맞은 다리를 움직여 순식간에 양시백의 어깨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이상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서재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긴 하군.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복수가요?"
"아니, 괴수가 하루에 두 번이나 나타나는 게 말이 안 돼. 괴수는 하루에 한 번만 나타날 수 있어. 절대 법칙 같은 걸세. 이것도 설명하자면 기니까 생략하도록 하지. 딱히 상세 설정을 정해놓지 않은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나!"
"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양시백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괴수라는 건 하루에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째선지 지금 두 번째 괴수가 출현했고 이는 전례 없는 비상사태였다. 서재호는 증원을 불렀지만 애초에 마법소녀 자체가 늘 인력 부족이고 더군다나 괴수의 상대로 지정된 마법소녀가 아니면 마력 지원이 어려워 초과 근무를 하려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괴수의 등급은 못 해도 최소 A급. 신입이, 그것도 오늘 처음 일하는 마법소녀가 잡기엔 역시 무리가 있었다.
"우선 변신부터 하는 게 좋겠어. 내가 예비용 마력을 채워줄 테니 이걸로 증원이 올 때까지 버텨주게나."
"으……그걸 또 입으라니……. 젠장, 어쩔 수 없나."
도시도 도시지만 우선 자신의 목숨도 위험했다. 다시 그 짧은 치마와 꽉 끼는 속바지, 부담스러울 정도의 레이스를 입는 건 정신적으로 타격이 컸지만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엄연한 작업복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그나마 편해졌다. 왜 작업복이 그런 차림이어야만 했는지 따지는 건 모든 사태가 끝난 후로 미뤘다. 양시백은 황급히 주머니에 넣어둔 파란 보석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처음 변신할 때 멋대로 진행된 탓에 어떻게 해야 변신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애니메이션 같은 걸 보면 뭔가 주문을 외웠던 것 같았는데 서재호한테서 전해 들은 건 딱히 없었다. 힐끔 그를 쳐다보니 왜 아직도 변신을 하지 않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양시백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보면 서재호도 딱히 주문은 외우지 않고 지금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나. 어쩌면 변신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과 어떻게든 하자는 기합만 있으면 되는 걸 수도 있었다. 양시백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보석을 꺼내든 채 외쳤다.
"벼, 벼, 변신……!"
정적. 빛이 반짝이지도 않았고 연기가 솟아나지도 않았다. 화려한 효과음도 없었다. 옷도 여전히 도복이었다. 바뀐 게 있다면 수치심이 최고조에 이른 양시백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는 점과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는 서재호의 표정 뿐이었다.
"……꿈과 희망을 더 담게. 변신이 뭔가, 변신이. 자네가 무슨 카프카라도 되는 줄 아는가?"
"카프카든 카프리썬이든 상관없잖아요! 어떻게 변신하는지 모른단 말입니다! 계약서에 사인하자마자 멋대로 변신했잖아요!"
"아~ 맞다, 그랬지. 워낙 당연한 일이라서 구태여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네. 허허, 미안해? 방법은 간단하게 주문만 제대로 외우면 된다네. 옛날엔 각자 주문이 다 달랐는데 형평성 문제가 있어서 재작년부터 통일시켰지."
"그냥 변신만 외치는 편이 더 쉽지 않아요?"
"에이 그러면 특촬물이랑 컨셉이 겹치잖아~. 마법소녀는 변신 부분이 반짝반짝해야 멋있는 걸세. 낭만을 모르는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 어쩐지 짜증이 나 그의 작은 앞발을 잡고 그대로 위아래로 탈탈 털었다. 그만두라는 절실한 외침이 들렸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적잖이 쌓인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 그때 옆으로 갑자기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가 쿵 하고 떨어져 그대로 바닥을 뚫고 어둠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아직 괴수가 걸어 다니고 있다는 현실로 돌아온 양시백은 소리를 지르며 서재호를 머리 위로 올린 채 다급히 물었다.
"으, 으, 으아악!! 뭐가 됐든 얼른 주문이 뭔지나 말해요!! 뭐라고 말하면 됩니까?!"
"으, 으으……. 멀미가……. 우욱……. 욱……."
"아, 아저씨!!!"
양시백은 기겁을 하며 서재호를 머리에서 떼어냈다. 다행히 진짜로 토하지는 않았고 단지 헛구역질이 밀려오는 듯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눈을 뱅글뱅글 돌리고 있는 서재호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억지로 정신을 깨웠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괴수는 조금씩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A급이라는 말이 맞는 지 단순히 걷기만 하던 첫 괴수와 달리 이 녀석은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들을 직접 이빨로 씹어 없애기도 하고 꼬리를 내리쳐 주변을 초토화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던 양시백은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그들 머리 위로 스파크가 튀는 전봇대가 쓰러지고 있었다. 이거에 당하면 절대로 감전사라는 생각을 하며 양시백은 소리를 질렀다.
"재호 아저씨――!!! 주문――!!! 빨리 주문――!!!"
"샤, 《샤랄라라 사랑을 담아 러브!》일세!"
"이런, 젠장! 《샤랄라라사랑을담아러브!!!》"
순간 세상을 하얗게 물들일 빛이 빠르고 강력하게 뻗어 나왔다. 이윽고 전봇대가 쓰려졌고 전류가 흐르는 전선들이 서로 부딪혀 강력한 스파크를 튀겼다. 그러나 그곳엔 이미 사람이 없었다. 양시백은 숨을 몰아쉬었다. 열기를 띤 숨이 자욱한 먼지 안개에 뒤섞였다. 하늘거리는 프릴 안엔 긴장으로 잔뜩 부풀어진 근육이 빠르게 맥박치고 있었다. 세상이 이토록 어둡고 빨간데 그의 가슴팍에 달린 보석만은 눈에 띌 정도로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잠시 뒤 너구리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왔다. 너구리의 날갯짓에 먼지들이 부산히 움직이다 사라졌다. 그제야 양시백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순백의 치마도, 중간에 새겨진 초록색의 무늬도, 가슴에 달린 리본과 보석, 그리고 다리 근육을 버티고 있는 스타킹까지 완벽하게 마법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양시백은 새빨간 얼굴로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일 끝나면 주문부터 수정해달라고 건의할래요……."
"사랑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한 마법소녀다운 주문이라고 생각하네만? 그리고 짧고 임팩트 있어서 좋잖아."
"차라리 변신이라고 외치는 게 낫겠다고요……."
여전히 심할 정도로 신경이 쓰이는 차림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몸 안에서 솟구치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예비 마력이니 무턱대고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당장 죽을 걱정은 집어넣을 수 있었다. 양시백은 그대로 위로 뛰어올라 아직 무너지지 않은 고층 건물의 옥상에 착지했다. 괴수는 60층 아파트의 높이보다 조금 더 컸다. 꼬리나 이빨 등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신체 부위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고, 작은 불덩어리들을 입에서 내뱉을 수 있었다. 괴수가 보기에 양시백은 벌레와 같은 크기로 보일 텐데 정확히 그의 움직임을 파악해 적의를 띄며 다가왔다. 지능이 있다는 얘기였다. A급의 괴수는 C급과 확실히 달랐다. 동작 하나하나의 텀이 길고 크지만 뒤따라오는 위력이 틈을 메꿨다. 이제 막 힘을 각성한 마법소녀가 상대하기엔 조금 벅찼다.
"증원은 언제 도착한답니까?"
"운이 따른다면 최소 1시간일세. 양시백이 별자리가 뭔가?"
"갑자기 그건 왜……. 궁수자리 입니다만……."
"오늘 11위로구먼! 이거 글렀네, 거참."
다시 위아래로 신나게 흔들어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양시백을 향해 걸어오던 괴수는 점점 그 속도를 높였다.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서재호는 진즉에 하늘로 날아 먼 곳으로 대피했다. 양시백은 흔들리는 옥상의 난관을 붙잡고 괴수가 더 가까이 오는 걸 기다렸다. 한 걸음 더……. 한 걸음 더……. 충격을 견디지 못한 건물이 중간부터 와르르 무너지며 아래로 떨어졌고 난관이 그대로 부서져 반원을 그리며 공중으로 날았다. 양시백은 무너지는 파편들을 차례로 밟아 최대한 위를 향해 뛰었다. 동시에 괴수가 거대하고 묵직한 꼬리를 몸에 한 바퀴 두르며 그대로 휘둘렀다. 대기를 역류하는 풍압이 양시백의 몸을 더 위로 띄웠다. 괴수는 고개를 들어 양시백을 향해 입을 벌렸다. 새빨간 화염이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게 보였다. 양시백은 최대한 몸을 벌려 공기의 저항을 줄인 채 다가올 공격에 대비했다. 이윽고 괴수가 내뱉은 불구덩이들이 하늘로 빠르게 날아갔다. 순식간에 자신의 코앞까지 온 불구덩이 하나를 간신히 피하며 몸을 틀었고, 그대로 물속에서 수영하듯 자세를 바꿨다. 바닥을 향해 머리부터 떨어지도록 거꾸로 선 채 다시 날아온 불구덩이 하나에 시선을 집중한 뒤, 가장 적절한 거리까지 날아왔을 때 허리를 뒤로 젖혔다 다시 앞으로 숙임과 동시에 반동을 활용하여 힘껏 발을 날렸다. 옷감이 화염에 삼켜져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소녀의 힘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워서 양시백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뜨――거워――!!!!!"
불에 데인 부위를 황급히 감싸 안아 살펴보니 다행히 살짝 그을렸을 뿐 별 다른 이상은 없었다. 마법소녀의 힘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불에 타 죽었을 거다. 불구덩이에 제대로 맞은 괴수는 잠깐 몸을 기울였고 양시백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달려들어 괴수의 다리를 걷어찼다. 이대로 넘어뜨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괴수는 크게 기우뚱하더니 꼬리를 바닥에 한 번 쾅! 내려쳐 겨우 중심을 다시 잡고 일어섰다. 양시백은 뒤로 점프하여 다시 괴수와 거리를 두었고 상황은 처음으로 돌아갔다.
"윽, 역시 같은 수는 안 통하는 건가……."
「그냥 되는 대로 때려보게나. 아무리 괴수라도 계속 맞다 보면 지치겠지.」
"급소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어서 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 지 감도 안 옵니다……."
「어디 보자……. 괴수는 기본적으로 급소라는 게 없네. 아무래도 지구 생물체가 아니니 말이야. 대신 약점이라는 건 있어. 저 녀석의 몸은 가죽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전기가 잘 통하는 전도체 속성일세. 가죽이 워낙에 두꺼워서 그냥 때리는 걸론 아프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 외부에서 과전류를 일으켜 폭발시키면 자네의 마력 보존에도 용이하고 비교적 큰 데미지를 줄 수 있을 걸세. 아마 이게 정식 공략 루트겠지.」
"제가 전기를……만들 수 있던가요? ……아! 마법소녀라서 마법이 가능하구나!"
「음? 아니? 못 하는데? 자넨 물리 특화형이라서 마력 리소스가 전부 신체 강화에 들어갔거든. 그래서 마법은 전혀 못 하네.」
"……마법소녀인데 마법을 못 쓴다는 게 말이 됩니까……?!"
「뭐 어떤가. 신체 강화도 엄연히 마법으로 이뤄진 건데. 자네가 마법을 의식해서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충분히 평범한 마법소녀다워.」
적어도 자신은 평범한 마법소녀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 같다만. 생각을 마저 이을 틈도 없이 괴수의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양시백은 괴수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빠르게 달려 몸을 피했다. 재빠르게 속도를 멈추기 위해 그대로 땅에 손을 짚어 몸을 띄워 안정적으로 착지한 뒤 다리를 뒤로 쭉 빼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하얀 스타킹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정해 보였다. 그대로 괴수를 향해 총알처럼 튀어 나가며 몸을 회전시켜 힘을 준 뒤 전력을 다해 주먹을 괴수의 가슴에 내리꽂았다. 반동이 센 탓에 괴수는 다시 한번 몸을 기우뚱거렸다. 유효한 타격이라곤 볼 수 없었다. 마치 가죽을 몇 겁이고 겹친 샌드백을 때린 느낌이었다. 때릴 수는 있으나 오직 그뿐이었다. 양시백은 아직 부서지지 않은 전봇대 위에 앉았다. 아직은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금처럼 움직일 수 있을까? 서재호의 제안대로 가는 편이 효율이 좋았다. 그러나 전봇대의 전깃줄을 모두 끌어모은다고 해서 괴수를 무력화시킬 만큼의 전력이 될 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괴수는 끊어진 전깃줄을 밟아도 멀쩡하니 말이다. 인간으로 치면 정전기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물을 뒤집어씌울 수 있다면 더 높은 전력을 기대할 만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에서 그만한 물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괴수가 지칠 때까지 죽도록 때리는 것만이 지금의 양시백에게 가능한 최선의 전략이었다. 예로부터 복잡할수록 단순하게 해결하는 게 답이었다.
양시백은 한 발을 들어 툭툭 털어내며 긴장한 근육을 풀었다. 남은 마력을 전부 담아 세게 때린다고 해서 가죽이 뚫릴 지는 미지수였다. 적당히 힘을 조절해 같은 부위를 계속해서 때려야 했다. 목표는 처음 타격을 주었던 왼쪽 가슴이었다. 숨을 한 번 후 내뱉고 전방을 향해 날았다. 가속이 붙은 오른쪽 주먹을 그대로 두꺼운 가죽에 내리꽂았다. 여전히 단단한 벽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괴수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틀었다. 양시백을 잡기 위해 짧은 손을 뻗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손이 굉장히 컸다. 잡히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좌측에서 날아드는 손에 몸을 아래로 내리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바로 코앞에서 괴수의 손이 허공을 갈랐고 양시백은 한 바퀴를 돌아 괴수의 다리에 착지했다. 그대로 전속력으로 위를 향해 달렸다. 괴수는 양시백을 떨어트리기 위해 제자리에서 마구 날뛰었다. 진동의 근원지에 있으니 흔들림의 차원이 달랐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괴수가 오른발을 내리찍자 한순간에 중력이 사라져 양시백은 속절없이 아래로 강하했다. 동시에 묵직한 꼬리가 다시 왼쪽에서 날아왔다. 겁도 없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벌레와도 같은 인간을 그대로 날려버릴 작정이었다. 양시백은 꼬리를 온몸으로 감싸 안아 그대로 힘껏 끌어안고서 가슴 앞 부근까지 튀어 올랐을 때 손을 놓았다. 몸을 회전시켜 다리를 앞세운 뒤 힘을 끌어당겨 못을 박 듯 다리를 괴수의 가슴에 내리찍었다. 다음 공격이 오기 전에 자세를 고쳐 잡아 곧바로 주먹을 한 번 더 먹여보지만 가죽은 여전히 튼튼해서 과연 타격이 들어가고는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어지는 괴수의 반격을 피하며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이어보지만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서재호는 효과가 있으니 계속하라고 하지만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땀에 붙는 옷자락이 거추장스러웠다.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시야가 조금씩 흔들렸다. 처음처럼 날렵하게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강화된 신체를 믿고 방어하는 데 전념하기 시작했다. 맞은 곳이 아렸다. 이젠 불구덩이가 아닌 불 그 자체를 길게 뿜어대고 있었다. 괴수도 시간이 지나니 초조해지는지 공격이 더 과격해진 거다. 1시간 가까이 버티고 있으나 증원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인력난이라는 게 이렇게나 중요하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무너진 잔해 속에 숨어 잠시 숨을 돌렸다. 어느 샌가 곁엔 서재호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양시백의 가슴에 달려있던 보석을 살펴봤다. 양시백이 보기엔 별 차이가 없었지만 서재호는 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너구리 얼굴이긴 했지만.
"연속으로 싸운 영향이 커. 본래 3시간을 상정하고 마력 지원을 받는데, 자넨 처음 싸울 때 힘 조절 실패로 2시간 분량의 마력을 써버렸어. 내가 예비로 채운 것도 1시간 분량 밖엔 되지 않아. 시간이 부족해."
"즉……무슨 말입니까? 저 지금 무진장 힘드니까 간단하게 말해주시죠."
"설희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산수일세. 자네가 현재 가지고 있는 마력량, 즉 '싸울 수 있는 힘'의 지속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지 않았어. 1시간 안에 괴수를 쓰러트리거나 증원이 와주지 않으면 세상이 큰일 난다는 거야."
"대체 그놈의 증원은 언제 오는 거람."
"크윽……. 이번에 국가 지원이 끊기지만 않았어도 예비 마력량이 부족하진 않았을 텐데……!"
"하……. 이젠 어디서부터 놀라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시백은 잔해 속에서 나와 허리를 쭉 폈다. 뭉친 근육이 이완되니 머리가 아까보단 맑아진 기분이었다.
"대책이 있나?"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일단 계속 본사에 증원이든 다른 마력이든 요청해 보겠네. 다행히 자네가 계속 한 곳만 때린 부분이 확실히 연해지고는 있어. 방어력이 낮아지고 있다는 증거지. 강력한 한 방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 걸세. 그러니 꼭 끝까지 버텨, 알겠나?"
"노력해볼게요."
서재호는 가방을 고쳐 매고 날개를 펼쳤다. 날개가 빠르게 파닥이더니 가볍게 붕 떠올랐다. 그는 완전히 떠나기 전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양시백의 곁으로 돌아왔다.
"자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물러나야 할 때가 있어. 잔여 마력량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일세. 최대한 버티다가 한계점에 도달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니 꼭 도망가게."
"그 한계점이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 겁니까?"
"음……. 자네가 눈치채기 쉬운 부분으로 설명해주자면……. 옷이겠군."
"옷?"
"기본적으로 옷도 마력으로 강화되고 있는 거라서 말이지. 마력량이 고갈되면 공격받았을 때 옷이……찢길 걸세. 넘어져도 그럴 테고. 방어력이 전체적으로 낮아져 버린다는 거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와요……."
"아무튼 싸우다가 옷에 손상이 가면 그때 최대한 멀리 도망가거나 몸을 숨기게나. 반드시 일세? 그럼 믿고 있겠네."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하며 서재호는 아주 빠른 속도로 반대편을 향해 날아갔다. 눈 깜빡할 사이에 그는 이미 모습을 감추었다. 양시백도 다시 괴수의 앞에 섰다. 아직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뭐라도 하자. 주먹이라도 두 번 더 꽂아주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라도 하는 편이 낫다. 양시백은 자신을 다독였다.
그렇게 다시 긴 전투에 돌입하고,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양시백의 외침은 허무하게 울렸다. 둘 다 죽자는 식으로 날뛰는 괴수, 이젠 정말 한계에 다다른 체력, 도저히 뒤받쳐주지 않는 마력,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서재호까지. 이토록 절망스러운 경우가 또 있을까. 힘껏 일어선 다리가 다시 쓰러졌다. 기합으로도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서재호는 한계점에 다다르면 최대한 도망가라고 했지만 계산을 잘못했다. 한 방만 더 때리자고 욕심부리지 말 걸 그랬다. 양시백은 땅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허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괴수가 다가오고 땅울림이 커지는데 저항할 수 없었다. 오히려 피곤이 몰려왔다. 고된 전투를 제대로 쉬지도 않고 지금까지 싸워온 거다. 체력을 받쳐주던 마력도 다 떨어진 탓에 급격히 쌓인 피로가 뇌를 지배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아주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애니메이션에선 마법소녀가 위기에 빠지면 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새 능력을 일깨워주던데 자신도 그러지 않을까? 양시백은 막연히 최재석을 떠올렸다. 확실히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꼴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시 만나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다며 실없이 웃고 있을 때였다.
"일어나, 양시백이! 아직 포기하기엔 일러!"
정신을 잃어가는 양시백을 깨운 건 딱히 만나고 싶진 않지만 기다리고는 있었던 인물, 서재호였다. 드디어 온 거냐며 양시백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서재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너구리 얼굴임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애매한 소식이야. 본사도 지금 빼돌릴 수 있는 마력량이 많지 않다고 해. 증원까지는 무리여서 일단 받을 수 있을 만큼 받아왔지만 지금 저 괴수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걸세."
"그럼 나쁜 소식이잖아요……."
"여기서 이 상황을 애매하게 만드는 요소가 등장한다네. 자네의 가슴에 달린 그 보석으로 마력량을 증폭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갑자기 그렇게 형편 좋은 얘기가 나온다고?"
"원래 기회는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하는 법이지."
서재호가 윙크를 날렸다. 별 무리가 그의 눈가에서 반짝였다. 양시백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별 한 조각을 무정히 내쳤다. 서재호도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선생님처럼 팔짱을 꼈다.
"마법소녀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음……. 역시 마력인가요?"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가가야 해. 이 마력이라고 불리는 신비한 힘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에 대해서 말이지."
"……그러고 보니……. 워낙 이상한 일들을 한꺼번에 겪어서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마력이라는 건 어디서 가져오는 겁니까? 석유 같은 건가?"
"좀 더 낭만적이게 생각을 하게나. 마법소녀의 힘의 원천은 바로 '희망'일세."
"희망……이라고요?"
"정확히는 매주 일요일 아침 때마다 틀어주는 마법소녀 애니메이션을 통해 불타오르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아동 착취잖아!!"
"희망만 좀 얻어가는 거라니까 그러네! 우리도 양질의 애니메이션을 제공하니까 착취는 아닐세!"
"희망을 뺏긴 애들은 어쩌고요!"
"에헤이, 뺏은 거 아니라니까. 애니메이션 보다가 '우와~ 마법소녀 짱이다~! 마법소녀가 다 무찔러 줄 거야!'라는 순수한 희망이 솟구칠 때 그 에너지를 마력으로 변환시켜서 실제 마법소녀에게 주는 걸세. 누구한테도 해가 되지 않는 에너지 리사이클 사업이지."
"앞으로 어떤 얼굴로 설희에게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면 되냐고요……."
머리 위로 불구덩이 하나가 거창하게 떨어지자 둘은 서로를 껴안고 그나마 멀쩡한 건물 안으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슬쩍 밖을 보니 괴수는 이 근방을 불바다로 만들면서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일반 사람이었으면 진즉에 녹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양시백은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거칠게 닦았다. 품에서 기어 나온 서재호가 꼬리 끝이 살짝 탔다며 불평했다. 그냥 아주 통구이가 되도록 내버려 둬야 했다며 후회했다.
"아무튼 마저 얘기해봐요. 그래서 희망을 뭐 어쩌면 좋은데요?"
"희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라서 사실 어른한테도 얻어낼 수 있지만, 어른이란 반드시 계산이라는 걸 하는 생물이거든. '내가 정말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을 해. 경험이 적은 어린이들은 애니메이션을 잠깐 보여준 걸로도 충분히 '나도 할 수 있어!'라고 희망을 가지지만, 경험이 많은 어른들은 자네처럼 실제로 마법소녀가 되고 나서도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망설이지. 그래서 보석을 통해 마력을 주입하지 않으면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고, 자연스레 외부 마력의 의존도가 높아지는 걸세. 이론만 놓고 따지면 사람은 누구나 마법소녀가 될 수 있어. 희망은 힘이 되고 그 힘이 마법소녀를 만드니까. 굳이 예비 마력을 끌어오지 않아도 자네 안에서 무한한 마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걸세. 보석이 그 증폭기 역할을 해줄 거고."
"……마음가짐의 문제는 어려워요.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상황에서 자아 성찰을 거듭하라는 말이 아니야.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라는 걸세.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 혹은 '하고 싶다'라고. 자넨 지금 스스로 할 수 있는지 의심하면서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있잖나. 그건 책임감이라는 놈이지 희망이 아니야."
"솔직히 말해 무슨 차인지 모르겠습니다……."
양시백은 보석을 손에 쥐었다. 서재호가 가져온 예비 마력을 주입하고서야 먹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비치듯 숨겨진 파란색이 언뜻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운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반가움이 들었다.
파랑은 양시백이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다. 최재석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길고 덥수룩하게 내린 앞머리로 항상 눈매를 가리며 살았고, 어릴 땐 대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태평하게 살만큼 삶이 여유롭지 못했다. 그림자가 익숙했고 밤이 안심됐다. 사람의 곁은 어려웠고 혼자는 무서웠다. 그런 양시백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가 햇빛을 보여준 사람은 최재석이었다. 아득히도 먼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파랑. 그곳에 섞여들어 태양보다 밝고 따스하게 웃던 사람. 양시백의 앞머리를 거둬내고선 '역시 무섭게 생겼구나'라는 말을 상냥하게 내뱉던 사람. 무조건적인 신뢰로 양시백을 든든히 지켜준 사람. 그는 언제든 양시백을 버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때리지도 않았다. 무언갈 억지로 강요하지도 않았다. 양시백이 휘청이다 다시 어둠을 향해 발을 옮기려 할 때, 최재석은 팔을 뻗어 힘껏 받쳐주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다음엔 더 잘 넘어져 보자'. 그러곤 다시 올바른 길로 양시백을 밀어주며 함께 걸었다.
어쩌면 책임감이다. 그의 타고난 성품을 생각하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시백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제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던 순간을. 스스로도 글러 먹은 녀석이라며 불안에 떨 때, 너는 잘 해낼 거라며 장담하던 모습을. 그는 한 번도 양시백에 잘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믿었다. 잘 해낼 거라고. 그가 품은 감정은 어쩌면 책임감이고 어쩌면, 희망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올곧은 파란 눈동자가 불완전한 자신을 꽉 붙들어 맸던 강렬한 힘 아래엔 언젠가 자신이 온전히 한 사람으로서 당당히 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양시백은 그제야 희망이란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그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보석을 다시 손에 쥐고 숨을 들이켰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되새겼다. 마법소녀의 힘이 있으니까? 아니었다. 발버둥이라도 치는 편이 더 나으니까? 적어도 싸우는 건 자신이 있으니까? 모두 아니었다. 설령 이 힘이 전부 사라져 평범한 태권도 관장이 되더라도 자신은 이 자리에 설 수 있다. 똑바로 눈앞의 괴수를 마주할 수 있다. 주먹 하나 제대로 들어가지 않겠지만 날려볼 수 있다. 자신이 그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응원해준 사람이 있었다. 똑같은 마음으로 그 사람을 믿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향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존재했다. 거기에 부응하고 싶은 기대가 넘쳐났다.
공기를 절단하는 날카로운 일격이 양시백의 머리 위를 빠르게 스쳤다. 한순간 고개를 숙인 덕분에 목숨은 면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위치가 발각된 모양이었다. 반대쪽에 있던 괴수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양시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먼지를 털었다. 찢어진 옷들은 원상 복구되어 깔끔하게 나풀거렸다. 심장을 어루만지듯 보석을 쓸어내렸다.
"……재호 아저씨. 아까처럼 여기서 멀리 도망가세요. 휘말릴 거니까."
"당연히 도망갈 거야! 하지만 자네도 어서 도망가게. 지금 상태론 싸우기 힘들어. 내가 찾아놓은 대피로가 있으니 거기로……."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도망치지 않아요."
괴수를 쓰러트릴 수 있다. 괴수를 쓰러트리고 싶다.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다. 다시 당신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면 크게 웃을 수 있을 거다. 당신과 함께 지냈던 낡고 오래된 도장에서. 모든 걸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그 장소에서――.
"――저는 마법소녀니까요!"
내면에 응축된 강한 열기가 한 번에 폭발하며 시야가 한 순간 확 트인 느낌이 들었다. 세상을 집어삼킬 강렬한 푸른 섬광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 피부 밖으로 스파크를 일으켰다. 모든 공기의 흐름이 자신을 위해 움직였다. 하늘을 떠다니듯 몸이 가벼웠음에도 어느 때보다 힘이 들어갔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푸른 별 무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정열을 그대로 내보이는 불꽃이 옷자락과 함께 일렁였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힘이 몸 안에서 아우성을 쳤다. 메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고 영원히 흐르는 폭포와도 같았다. 옆에 있던 서재호가 놀라서 말을 거는 게 들리지만 정확하지 않았다. 물속에 있듯 사방의 모든 소리가 형체를 가지지 못하고 귓속에서 울렸다. 오직 하나. 괴수의 소리만이 양시백에게 또렷이 들렸다. 동공을 조여 괴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마치 슬로우 모션 같았다. 처음부터 계속 때려서 방어력이 낮아진 부위가 유독 눈에 띄었다. 지금이라면, 가능했다. 어느 때보다도 보석이 파랗게 빛나고 있는 지금이라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키고 그대로 앞을 향해 뛰쳐나갔다. 명사수의 탄환보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돌진했다. 푸른 불꽃을 가득 머금은 주먹에서 하얀 스파크가 강렬하게 튀었다. 긴 꼬리를 그리며 날아가는 모습은 유성을 닮아있었다. 지상에 내려온 별은 먼 옛날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에 종말을 고했다.
"이거나 먹어라――!!!!!!"
눈이 멀 정도의 하얀 빛이 번쩍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주먹이 확실히 가죽을 뚫은 느낌이 생생히 전해졌다. 괴수가 쓰러지자 땅이 쿵 울렸다. 여전히 강력한 진동이었지만 생명력이 없었다. 망막이 조금씩 회복하며 시야가 트이자 눈앞엔 붉은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순백의 빛이 있었다. 괴수의 영혼이었다. 이제 정말로 모든 게 끝난 거였다.
"수고했네 양시백이!"
멀리서 서재호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양시백의 머리 위로 안착한 그는 기특하다는 듯 양시백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양시백은 이제 완전히 체력이 방전되어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영혼을 손가락을 대자 보석을 향해 날아오더니 그대로 흡수되었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익숙한 바람이 불었고 세상을 뒤덮고 있던 껍질이 벗겨지며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때 이른 꽃잎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두 번째 보는 광경이었지만 이 순간이 가장 마법 같았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배움이 빠른 학생일 줄은 몰랐어. 상정했던 출력 그 이상을 보여줬네! 아주 잘했어!"
"하하……. 뭐……어떻게든 돼서 다행입니다. 그래도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로요. 절대!"
"당연히 그래야지.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 본사 쪽도 업무량이 배로 늘어서 아주 바빠졌어. 어쩌면 자네를 본사에서 정식으로 초대할 지도 모르니 준비해놓는 게 좋겠어. 이론적으로 가능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뤄낸 녀석은 지금까지 없었거든."
두 사람은 우선 다시 도장으로 돌아왔다. 도장은 여전했다. 괴수의 흔적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도시처럼 여전히 낡고 정겨운 장소로 남아있었다. 서재호도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보기에도 글자 수가 많은 서류들을 뒤지고 있었다. 본사의 초대라는 말에 양시백은 목덜미를 아무렇게나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회사라는 건물이 주는 압박과 긴장감에 목이 타들어 갔다. 딱딱한 분위기는 양시백이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였다. 가서 뭐라고 해야 한담. 그냥 기합으로 어떻게든 했다고 하면 안 되겠지. 면접을 준비하는 취준생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뒤로 발라당 누웠다. 버릇없다는 말이 옆에서 들려왔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앞으로 일어날 일보다 자신이 방금 해낸 일에 심취하고 싶었다. 뻐근한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아, 맞다! 돈! 돈은 언제 주는 겁니까?"
"낭만을 더 즐겨보지 않고 거 참, 나 원……. 입금은 괴수가 완벽히 처리됐다고 판명된 순간부터 입금이 돼. 여기 양시백이 전용 통장."
"으악, 던지지 마요!"
양시백은 아주 소중하고 소중한 물건을 떠받들 듯 대충 던져진 통장을 품에 꼭 껴안았다. 이곳엔 서재호와 자신밖에 없음에도 누가 볼세라 뒤를 돌아 통장의 앞면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지문에 돈이 날아가기라도 할까 걱정하면서 팔락 넘긴 종이엔 확실히 돈이 입금되어 있었다. 하지만 양시백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처음 얘기 들었던 금액과 달라도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응……? 이거, 금액이 좀 이상한데……."
우선 뒷자리에 붙어야 할 0의 개수가 확연히 달랐다. 입금된 금액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한 2만원이었다. 설마 2마리를 잡았기 때문에 2만원인 거냐며 순간 울컥한 마음에 입금자의 이름을 보았다. 이름도 상당히 이상했다. 본사의 이름도 아니고, 서재호의 이름도 아니었다. 굉장히 독특하고 낯선 단어였다. 양시백은 저도 모르게 입금자의 이름과 입금된 금액을 나란히 읊조렸다.
"……'구럼 20000?'"
팟하고 눈을 뜨자 그곳에 보이는 건 컴컴한 방 안에 달린 낡은 전등이었다. 시야 구석에서 빛이 넘실거린다 생각했더니 티비가 켜져 있었다. 티비에선 마법소녀물 애니메이션이 연속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홍설희가 요즘 푹 빠진 애니메이션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애니메이션 얘기를 하면 좋아하기에 힘을 내서 밀린 내용을 몰아보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양시백은 잠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었다. 통장 하나가 외롭게 들어있었다. 무심히 열어보니 새로 입금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시백은 힘이 빠진 다리를 질질 끌다 자리에 풀썩 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으아아아악!! 재호 아저씨 진짜!!"
어디에도 분출할 수 없는 한심한 분노는 의도치 않게 두번이나 꿈속에서 양시백을 놀린 서재호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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