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 00

모티브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보이지 않고, 말할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내' 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안개처럼 몽롱했던 생각은 사고가 전개될수록 선명해지면서 사람의 정신으로서 정련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억만큼은 흐릿했다. 기억에 대한 생각은 이상할 정도로 뭉근한 신체 감각에 대한 생각으로 전이되어 곧 잊혀졌다. 하나의 생각은 하나의 연관된 생각을 낳고, 다시금 그 생각에서 뻗어나간 다른 화제로 전환되며 끊임없이 잊혀졌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떤 것을 떠올려내면 기존의 생각이 잊혀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 득 되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지칭할 이름도 모르는 채 지루할 만큼 오랜 시간을 흘려보내는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한심했다- 어느 순간, 내가 생각하는 것 외의 자극이 느껴졌다. 소리. 소리였다. 주변은 이제까지 조용했었기 때문에 내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가 없었다. 잦아들었다가 다시금 웅웅거리기를 되풀이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에 집중하자 두루뭉술했던 생각들이 조금씩 바로잡혔다. 정도 이상의 생각을 유지하지 못 하고 강제 치환되어 망각을 거듭했던 나. 나의 비어있던 부분이 조금씩 채워졌다. 생각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처음과는 다른 놀라운 변화였다. 이제는 어딘가를 딛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각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예민해졌는지 촉각과 후각, 청각은 집중력에 힘을 보탰다. 보이지 않는 귀를 기울이자 나를 일깨운 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그 목소리는 말로서 내게 닿기도 전에 가루처럼 바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과 접촉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갈수록 내가 그러했듯이 형태를 갖춰가는 목소리에 깃든 감정은 절규였다.

모두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느냐고, 이럴 수밖에 없었던 거냐고 오열하는.

토해내듯 말하는 사람이 숨이라도 멎을 듯 격렬한 감정. 그 절규는 애처로운 구석이 있었다. 또, 그 낯선 목소리는 내가 아는 -애석하게도 자세히 떠올릴 수 없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목소리였다. 애초에 그러한 점을 느끼기 전에도 내가 도움받은 것처럼 나 역시 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목소리의 주인과 지척의 거리에 있는지,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 거친 숨을 가다듬는 소리가 낮지만 확실하게 들렸다.

그 사람, 그 남자는 이제 곧 쉬어버릴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주세요."

대답을 기다리는 듯, 기운을 잃은 듯 침묵하던 남자가 하, 하고 한숨을 토했다. 깊은 슬픔. 지친 한숨. 잃어버린 것에 대한 깊은 상실감. 물들이듯 퍼져나가 차오르고 고이는, 절망. 남자의 감정이 전이라도 된 양 나를 옭아매는 것에 입을 열었다.

"도와줄게."

대답과 동시에 긴 긴 시간 회복되지 않던 시각이 회복되었다. 이제는 일련의 상황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를 등진 채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돌아선 남자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있었다. 어디서 보았던 걸까. 묘한 느낌이 꼬리를 길게 남기는 것을 음미하는 것도 잠시, 놀란 듯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남자에게 나는 조금 전의 말을 한 번 더 들려주었다.

"내가 도와줄게."

눈물자국 투성이의 남자는 물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고맙습니다."

남자는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시선이 자연스레 위로 살짝 이동하는 것에 이 남자가 나보다 키가 크다는 사실을 자각하는데, 남자가 손바닥을 펴 보였다.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멈춰선 손에 이번에는 내가 멍하니 바라볼 차례인가 했다. 남자가 가늘게 웃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손을 잡아주는 것만을 바란 건가? 그것뿐?

묻기도 전에 빛이 터져나오며 맞잡은 손을 천천히 삼켜갔다.

"두려워 할 것 없어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될 테니까."

"우리..?"

"그래요. 우리. 그러니까..약속해 주실래요?"

남자는 재촉하는 빛을 보였다.

그와 더불어 맞잡은 남자의 손이 미끄러질 듯 바깥쪽으로 당겨지는 것이 빛무리 안의 손끝에서도 느껴졌다.

자신을 돕고자 한다면 어서. 나는 그 다급함에 한 줄기 스치는 불길함을 모른 척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빛은 시야와 감각을 처음처럼 마비시켰고, 곧 정신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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