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향수

배준혁이 가끔씩 찾아와 양시백이나 최재석의 안부를 묻는 일은 종종 있었다. 최재석은 원체 벽을 두르는 타입이 아니었을 뿐더러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양시백의 은인인 배준혁을 싫어하지 않았다. 거기에 절친한 유상일의 후배였던 만큼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친밀하게 대했다.

"안녕하세요."

"옙. 안녕하세요."

"시백 씨는..?"

"양시는 아버지랑 같이 장 보러 갔어요."

잘 됐군요. 배준혁은 작게 되뇌었기에 최재석은 단순한 웅얼거림 정도로 알아들었다. 개의치 않고 학부모들과 이야기 나누던 경험을 살려 침묵이 도사리기 전 얼른 화제를 바꿨다.

"금방 올 텐데 기다리시겠어요? 차라도.."

"그럴까요."

"커피? 녹차? 코코아?"

"그럼 녹차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최재석은 무어가 그리 신나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녹차 두 잔을 재빠르게 타 왔다. 방금 타왔지만 오면서 티스푼으로 녹차 티백을 저어주었는지 진한 노란빛이 물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최재석 관장님은 학부모 상담 때도 이렇게 쾌활하게 대접해 주십니까?"

"아유, 양시라면 모를까 관장이 되어서 그러면 촐랑거린다고 신뢰를 잃을 걸요. 친한 사람들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죠."

"저를 가까운 사람처럼 대해준다면야.."

"기분 나쁘다면 말해주세요."

"아닙니다."

최재석이 친밀하게 대함에도 배준혁은 다가가기 힘든 타입이었다. 염색한 것처럼 연한 머리색에 깊어보이는 눈동자는 웃으면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지만 무표정한 평소로서는 차갑고 무뚝뚝해 보였다. 제 얼굴도 장군감이라고 불리곤 하니 할 말은 없었다.

"킁."

"......"

"그, 혹시 향수..뿌리셨어요?"

"냄새가..많이 납니까?"

"적당해요. 그냥 좋은 냄새다 싶어서요. 꽃향기 같기도 하고...킁킁, 살짝 매캐한 듯, 안 한 듯 한게."

"마음에 드십니까?"

"향수 뿌릴 일은 없지만요."

배준혁은 옅게 웃다가 코트 주머니에서 포장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는데 바닥에 놓이자 달깍, 거리는 소리가 났다.

"....?"

"네. 오늘 제가 찾아온 건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향수를 선물받았는데 이번에 한 번 뿌려보고 나서 저와는 통 안 맞아서..그나마 향수 쓸 만한 사람하니 시백 씨가 떠오르더군요."

"양시 녀석 매일매일 샴푸냄새 나게 머리를 감으니 향수도 좋아라 할지도요."

"최재석 관장님도 함께 써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사람들을 만나러 갈 때 손목 안쪽이나 목가에 한 번 뿌려주면 되니까요."

"하하, 그래볼까요?"

상자를 열고 모서리가 다듬어진 육각모양의 향수병을 들어올리자 안에 담긴 보라색 액체가 찰랑였다. 최재석은 뚜껑을 연 향수병의 가느다란 끝을 손목 안쪽에 갖다대고 뿌렸다. 살짝 축축한 느낌과 함께 배준혁에게서 느릿하게 맡은 향이 코끝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향수병을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는데 배준혁이 말했다.

"최재석 관장님. 손목을 살짝 비벼야지요."

"예?"

"이렇게.."

배준혁은 최재석의 한 손을 잡고 다른 손을 끌어당겨 손목 안쪽의 살이 맞닿게 했다.

비비라는 말에 자칫 눈이나 비빌 뻔한 것을 막아준 고마운 행동이었다.

"이 나이에 향수라니, 왠지 젊어진 기분이네요."

"아직 젊습니다."

"하핫, 준혁 씨. 그런 말도 하실 줄 알고..상일이보다 훨씬 낫네요!"

녹차 한 잔을 다 마신 배준혁은 다음에 또 찾아오겠다며 인사한 뒤 나갔다.

***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어."

"맛있는 거 많이 사 왔어?"

"수강료 들어오기 전이니 필요한 것만."

"에취! 관장님, 페브리즈 같은 거 뿌렸어요?"

"아, 아니. 향수를 잠깐. 준혁 씨가 왔다갔는데 네가 썼으면 좋겠다면서 향수를 주고 갔거든. 내가 시험삼아 뿌려봤는데 영 아니냐?"

"어유, 전 독하게 느껴져서 도저히 안 되겠는데요."

"아저씨, 아저씨도 이상해?"

"그다지. 하지만 향수 뿌리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어휴, 내가 열심히 써 주는 수밖에 없겠구만."

최재석은 상자째로 관장실 안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나왔다.

"언제 멋지게 정장 입고 한 번 뿌려볼까!"

"아서라.."

"왜 아저씨, 내가 너무 멋져보일까 봐 그래?"

양시백은 관장님 또 저러네, 하고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입으러 안으로 들어갔고 장 본 것을 풀어 정리하던 양태수는 짧게 그래. 라고 대답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