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주황건오

허건오는 제 일이 끝나면 -최소한의 생계 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구했고, 그 뒤 짬짬이 남는 시간에 하태성에게 검정고시를 위한 과외를 받았다- 가끔 김주황을 마중하러 나오곤 했다. 어느 날엔가 김주황이 먼저 돌아가 있는 게 좋지 않냐고 했더니 허건오는 집에 가는 가깝지도 않은데 둘 다 밖에 나와있으면 타이밍 맞춰서 같이 가는 게 낫지 않냐고 대답했다. 김주황은 언뜻 맞는 말 같이 들렸지만 핑계 같다고도 생각했다.

김주황이 일을 끝마치고 건물을 나온 뒤에는 횡단보도 대신 작은 육교를 건너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 허건오는 그 육교에서 김주황을 기다리곤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허건오는 담배를 문 채 육교 가운데에 서서 수직 방향을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쪽이었다. 노을로 사방이 꽉 찬 것처럼 온통 주홍빛, 붉은빛, 금빛이었다. 마주 보는 허건오 역시 그런 빛을 묵묵히 얼굴로 받고 있었다. 노란색 기조. 그 외에도 밝은색 옷들을 입던 지라 노을에 물들어 있는 것이 부드럽고 거칠기가 대비되는 그림처럼 보였다. 덜컥해 있던 김주황의 기척을 느꼈는지 허건오가 몸을 틀었다.

"뭐하고 오느라 이렇게 늦었어, 늦었길?"

"......"

"고릴라, 귀 먹었어? 뭔 생각해?"

"노을이 죽인다고."

"아. 뭐야, 이렇게 잘생긴 날 두고 노을에 정신을 팔고 있었단 말야?"

"네 녀석이 자화자찬 하는 게 하루 이틀이냐..."

"자화자차안? 아 잘생기고 귀여운 걸 말해야 알아?"

툴툴거리던 허건오는 1절까지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됐어. 고릴라 말대로 오늘은 노을이 끝내주니까 내가 큰 맘먹고 봐 줄게."

"봐주긴 개뿔이.."

"아, 고릴라도 1절만 해. 배고파 죽겠다고."

"저녁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뭘 어째, 라면 먹는 거 아니면 사 먹겠지. 고릴라, 오늘 이상해?"

"됐다, 내가 살 테니까. 가자."

"아, 얻어먹는 밥이 제일 맛있지. 가자고."

***

허건오는 육교에서 김주황을 기다리며 언젠가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넌 나보다 일찍 끝나면서 왜 여기서 맨날 기다리냐?'

같이 살아서? 언제 그런 거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열쇠가 없어서? 예비용 열쇠라면 생활비 분담해서 같이 살기로 한 그 날부터 받았다.

식사하기 적적해서? 말상대로 삼으려고? 여럿이 밥 먹는 것보다 혼자 밥 먹는 경력으로는 경력직으로 모셔가도 될 정도였다. 말은 불화의 씨앗이라는 흔해 떨어질 비유는 필요도 없었다.

정말 무어라고 댈 만한 이유가 마땅찮다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김주황에겐 대충 둘러댔고, 평균적인 퇴근 시간까지 남는 시간에는 하태성의 집에서 공부를 더 한다던가, 아르바이트의 잔업을 돕곤 했다. 그러다가 적당히 시간이 되면 이렇게 육교에서 김주황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생각 끝에 허건오는 질문을 하나 더 끄집어냈다.

'나는 고릴라를 형처럼 생각하고 있나?'

허현오. 현오 형.

...형.

출소한 뒤 연락은 어찌어찌 닿았지만 연락만 할 뿐 성인이 된 후로, 그 전에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형이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의붓아버지로 인한 지속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청소년기, 결과적으로 엇나간 동생의 선례가 있으니 번듯한 직장을 구하려고 노력했을 테고, 작게든 크게든 목표를 이뤘을 것이다. 김주황과는 닮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뭐 하긴, 나도 고릴라네 동생이랑 닮은 구석 없을 테니 피장파장 아냐?"

빚을 떠넘기고 자살한 동생. 그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

허건오가 처한 상황과 거울같이 반대였다. 하지만 그 성분은 같았다. 형과 동생.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 자포자기하지 않고 그마저 붙잡고 이제라도 살아보겠다고 발악하는.

하지만 동생 취급받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사나워진 허건오였다.

말투만 그렇지 얕잡아 본다거나, 가족적인 애정을 갈구하는 것도 아니지만 묘하게 사람 기분을 사납게 했다. 그것이 김주황의 입에서 나온 사실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망상이니 억측이니 해도.

허건오는 요즘 부쩍 늘어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하늘은 주홍빛을 띠고 있었으나 곧 선명한 붉은 빛을 끌어들였고, 꼬리 궤적처럼 남은 금빛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해 한 번 기가 막히게 지고 있었다. 매캐하고 반투명한 회색의 연기가 노을을 이지러뜨리듯 허공에 흩뿌려졌다. 끄트머리를 조금 태웠을까 타박, 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 허건오는 천천히 몸을 틀었다.

김주황이었다.

요 근래 허건오에게 여러모로 자문의 시간을 제공한 원인 제공자였다. (본인이 모른다는 게 허건오로서는 제일 괘씸한 죄목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살갑게 말을 거는 일은 오늘도 없었다.

"뭐하고 오느라 이렇게 늦었어, 늦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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