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고딩 동갑조

딩동~

"나가요~"

최재석이 성큼 현관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봉투를 들어올린 채 가볍게 흔들어보이는 유상일과 살짝 뚱해보이는 -누가 보면 심통나거나 짜증난 것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이게 평소 표정이었다- 정은창의 모습이 보이자 최재석은 방긋 웃었다.

"야, 일찍 왔네. 둘 다 저녁 아직이지?"

"저녁은 뭘. 야자도 안 하는데 당연히 아직 안 먹었지. 너도 안 먹었을 거 아냐?"

"그건 그래. 딱 봐도 교복만 갈아입고 온 건데."

"넌 그보다 확인하고 문을 열어줘야지 그렇게 바로 열어주면 어떡해?"

"어차피 너희들 아니면 아저씨나 양시밖에 올 사람 없는 거 뻔한데 뭐."

"조심성이 없어요, 조심성이."

정은창은 늘 그렇듯 핀잔을 주었고, 최재석은 늘 그렇듯 조심할게. 라고 덧붙였다.

그런 모습들에 익숙해진 유상일은 실례, 라고 말하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크게 지저분하지는 않아도 상대적으로 어지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집안은 깔끔했다.

"웬일로 답지않게 깨끗해?"

"답지않게가 뭐야, 답지않게가."

"맞잖아."

"체. 아저씨가 주말에 온다고 해서 힘 좀 내봤어."

"친구들 올 때도 좀 힘 좀 써 주지."

"혼돈 속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나의 큰 뜻을 어찌 모르냐, 상일아."

"큰 뜻은 무슨. 넌 그냥 귀찮은 거잖아."

"정은창 너까지..흑흑, 재석이 삐짐."

"그냥 간다."

"얼른 문 닫아."

정은창은 작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유상일은 익숙하게 냉장고 옆에 세워진 작은 상을 꺼냈고, 그 위에 들고 온 비닐봉투를 올려두었다. 안에는 각기 다른 과자봉투 3, 4개와 음료수 큰 걸로 한 병, 끓여먹기 위함인지 생으로 부숴먹기 위함인지 라면 3개가 들어있었다.

"아, 나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청소 좀 하고 나니까 나가기 귀찮아져서. 미안, 미안!"

"어련하겠어."

"야, 그래도 남자애 혼자 청소하는 거 치곤 깔끔하다."

"그치? 좀 더 날 칭찬하라구."

"정은창, 그렇게 말하면 내일 도루묵 된다. 그 녀석."

"어허, 날 어떻게 보고. 최소 주말까지는 이렇게 유지할 거거든?"

와하하, 하는 웃음과 함께 상을 텔레비전 앞으로 가져간 최재석은 거실 중앙에 털썩 앉았다. 텔레비전을 틀어 채널을 돌려보니 짧게 6시 내 고향, 퀴즈쇼, 6시 뉴스 등의 프로그램 등이 휙휙 화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최재석이 채널을 돌리는 동안 유상일과 정은창은 과자봉투를 뜯어 일 자로 편 뒤 과자를 한 군데에 다 모았다. 여러 종류의 과자가 뒤섞여 수북하게 쌓인 즈음에도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찾는 것에는 실패해서 최재석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재밌는 게 안 하네. 그러면..."

자리에서 일어난 최재석은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비디오 테이프를 하나 가져왔다.

"무슨 비디오야?"

"..혹시 야한 거냐?"

"난 불건전한 성인 비디오에는 관심없거들랑? 당연히 공포 영화지!"

"남자애 셋이서 비디오 보는데 공포 영화가 마땅찮냐고 하면 그건 또..."

"왜, 개그나 멜로나 다들 취향 갈리니까 기왕이면 평타 칠 수 있는 공포 영화를 보는 수밖에 없잖아."

"그거야..그렇지만."

"에이, 셋이 같이 있는데 무섭기야, 무섭겠어?"

최재석은 텔레비전의 화면을 외부입력으로 바꾼 뒤 비디오를 텔레비전 아래에 놓인 VCR 기기에 넣었다. 곧 파란 화면이 스쳐지나가더니 지이잉 하고 비디오의 필름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반전했다. 최재석은 마지막으로 불을 끈 뒤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하자고."

"누가 무섭대? 애도 아니고."

"여기서 누구 하나 무서워 하면 10년 놀릴감일 걸?"

영화가 시작되기 전 셋 모두 호언장담하며 과자를 양껏 집어먹기 시작했다.

***

"와악!"

"악!"

정은창의 비명소리에 최재석과 유상일이 모두 흠칫해서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목이 꺾여 한 바퀴 돌아가 있는, 적어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여자가 영화 속 작은 텔레비전에서 굽이치는 머리칼을 늘어뜨리며 기어나오는 광경이 화면에 떠오른 직후였다. 무서우면 말하네, 애도 아니고 뭐가 무섭네 하던 이야기는 쏙 들어간 셋은 서로 꼭 붙어서 눈을 질끈 감거나 귀를 막거나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리액션을 다했다.

"..야, 야, 지나갔어. 지나갔어. 눈 떠."

"최재석 너..다음부터는 그냥 개그나 아, 몰라 평범한 걸로 빌려와, 좀."

"누가 이렇게까지 살 떨리게 무서울 줄 알았겠냐..."

스탭롤이 올라갈 즈음에는 맥이 풀려서 서로 부둥켜 안고 비명을 지르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유상일이 일어나 거실의 불을 켰다. 자각하지 못 했지만 어느새 바깥은 어두워진 채였고, 남자애 셋이서 난리를 피운 것에 대한 대가로 미처 다 먹지 못 하고 조금 남긴 과자가 마구 흩어져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최재석은 과자들을 모아 봉투 위에 올려두었고, 정은창이 익숙하게 상을 들고 자리를 옮기자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척척 가져와 쓸었다.

"청소는 내일 다시 해야겠다."

"도와줄게."

"..그나저나..뭔가, 먹은 과자가 다 소화된 거 같지 않냐?"

"과자를 그렇게 먹었는데 배가..."

꼬르륵-

정은창의 말에 배가 고프냐고 핀잔을 막 주려던 유상일은 말이 끊어졌다.

"...고픈 거 같은데."

"고프구나."

"고플만 하지."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고보니 허기가 진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럼, 라면 끓여먹자! 밥은 있다 못 해 햇반도 있다고. 라면 뭘로 사 왔더라?"

"안성탕면."

"치, 난 신라면이 좋다니까."

"2대 1로 정해진 다수결의 원칙이라. 안성탕면도 맛있어."

"신라면이나 안성탕면이나 맛있으니 됐지. 자, 유솊은 김치 썰고, 정솊은 밑반찬 준비해줘, 라면은 내가 집도한다!"

최재석은 아주 능숙하게 라면 봉투를 뜯었고, 스프를 꺼낸 뒤 물을 눈대중으로 맞추어 큼직한 냄비에 받아 가스 불을 땡겼다. 감탄할 만큼 빠른 스피드는 최재석이 평소에 라면을 숱하게 끓여먹는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상일은 김치를 썰어 반찬통에 담았고, 정은창은 젓가락과 그릇, 다른 반찬들을 꺼내 상에 올려둔 뒤 혼자 신난 듯한 최재석의 등을 바라보았다.

"야, 유상일. 솊이 뭐냐?"

"이거 보기 전에 비디오로 요리하는 영화를 봤다는데 영어로 메인 요리사를 셰프라고 불렀다나봐. 줄여서 솊."

"난 가끔 최재석이 영화감상반을 안 들었는지 궁금해."

"시켜서 보는 건 취향이 아니래."

"최재석이답네."

"그치? 라면 끓이는 데에는 원한다면 최솊! 이라고 불러줄 수도 있지."

"낮간지럽다, 낮간지러워."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거나 말거나 최재석은 라면을 끓이는데 집중했고, 마침내 떡, 햄, 콩나물, 썰어넣은 파, 계란 2개가 들어간 부대찌개급 라면이 완성되었다.

***

세 사람은 기가 막히게 맛있는 라면을 먹으며 드라마도 보고, 밥까지 말아먹으며 평소에는 보지 않던 뉴스도 보았다. 설거지를 한 뒤에는 이불을 꺼내 거실에 넉넉히 깔고 게임기를 켰다. 슈퍼마리오나 남극 탐험 등 몇 번의 죽음과 몇 번의 컨티뉴를 계속하다가 질려버려 정리한 다음에는 난장판을 피웠던 과자를 가져와 누운 채 집어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 되게 방학 같다."

"내일 개교기념일이라서 쉬는 게 보장되는 금요일 밤이라 다행이지."

"개교기념일 만세! 교장 선생님 만세!"

"훈화 말씀 길게 하시면 그새 싫다고 짜증내긴 하지만."

"야, 근데 개교기념일이랑 지금 교장 선생님이랑은 상관없지 않냐?"

"그건 그렇네."

"빨리 방학했으면 좋겠다...옆 학교는 우리보다 방학 일주일 빠르대."

"선생님한테 그런 말 하면 그럼 거기로 전학 보내줄까? 라고 하시겠지..."

하아아.

학생 신분인 세 사람의 마음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방학이라는 주제에 이르자 통일된 한숨을 내뱉었다.

갑자기 떠오른 듯 유상일이 물었다.

"내일 태수 아저씨는 언제쯤 오신대?"

"몰라. 점심 때 이후에 오지 않을까? 너희도 그냥 그때까지 있다가 같이 밥 먹고 가."

"매번 얻어먹는 것 같아 불편해서."

"뭐 어때, 모르는 얼굴들도 아니고. 그런 건 늘어지게 자고 생각하자. 그나저나 지금 몇 시야?"

"열두시가 넘었네. 슬슬 잘까?"

"그래."

전등 스위치가 있는 곳에서 제일 가까웠던 정은창이 일어나 거실의 불을 껐다.

잔다고 했던 것과는 달리 대화는 계속 되었다.

"오늘 되게 한 거 없이 시간 잘 간다.."

"한 게 왜 없어. 영화 봐, 밥 먹고 설거지 해, 텔레비전 봐, 게임해, 과자도 알뜰살뜰하게 먹었다고."

"뭔가 너네 집에 놀러오기만 하면 되게 게을러지고 나태해지는 것 같아."

"남의 집이라 그런 거 아니냐?"

"아니, 나도 그런 기분 들어."

정은창의 말에 유상일이 동조하자 셋 모두 웃었다.

오른쪽 끝, 창가에 누워있던 최재석이 덜컥 말했다.

"이렇게 적적할 때 자고 가줘서 고마워."

"낮간지럽게 자기 전에 뭐야? 그런 말이나 하고."

"혹시 부끄러워? 상일이 네 얘기냐?"

"누구? 불 꺼서 잘 안 보이는데."

"그럼 너희 둘이 부끄러운 걸로 해줘. 난 안 부끄럽다."

"와, 정은창 얍삽해."

"그래, 혼자만 빠져나가고."

"안 부끄럽다며?!"

유상일과 최재석은 합심해서 정은창을 공격했고, 정은창은 먼저 자 버린다며 등을 돌려버렸다. 하지만 열두시의 반을 넘긴 뒤에도 세 사람은 잠들지 않고 장난도 치고, 평소엔 이야기하지 않았던 간지러운 진심도 전하기를 계속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셋 모두 폭탄 같은 졸음에 직격당해 쓰러지듯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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