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호] 일기장
남자는 모든 순간을 기록했다. 적어도 자신이 아는 것들은 전부.
아이는 침대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젠 집보다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곳은 아이를 돌봐주는 한 남자의 집이었다. 은은하게 맡아지는 담배냄새와 오래된 책들의 냄새가 섞인 방을 아이는 꽤 좋아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아버지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남자는 아이를 위한 음료수를 사러 집 앞 마트에 갔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아이는 무료함에 발을 앞뒤로 흔들다 문득 남자의 책상 서랍 안이 궁금해졌다. 생각해보면 이곳이 익숙해질 때까지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곳이었다. 남자가 아이에게 열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다. 단지 아이 스스로 이 서랍을 열어야겠다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서랍의 손잡이를 잡았다. 키가 닿는 맨 마지막 칸의 서랍이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두 손으로 힘을 주어 열자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말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종이더미가 가득 들어가 있었다. 아이는 남자의 직업이 기자임을 떠올리며 그의 직업과 관련된 일일것이라 추측했다. 종이에는 여러 단어들이 적혀있었다. 박근태 의원, 유모씨, 납치범, 폭발, 잠입요원 등등. 그러나 아이는 그것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아이는 다시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위로 손을 뻗어 두번째 칸을 열었다. 데구르르 소리와 함께 굴려진 것은 여러 자루의 연필들과 볼펜들이었다. 하나를 집어 들면 어딘가 한 부분이 망가진 것인지 손가락에 검은 잉크가 묻었다. 아이는 다시 볼펜을 안에 넣었다. 그 외엔 여러 잡동사니들이 들어있었다. 메모지, 수첩, 형광펜, 지우개, 구겨버린 종이, 약 등등. 아이는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마냥 하나씩 집어 들어 확인하고 다시 내려놓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 곧 손이 닿지 않는 첫번째 칸에 눈길을 주었다. 남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는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서랍을 열었다. 무거울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첫번째 칸은 앞의 두 개의 칸보다 훨씬 가벼워 서랍을 여는 반동에 그만 넘어질 뻔하였다. 아이는 덜컹거린 의자에 책상을 꽉 잡고 버텼다. 그리고 책상에 올라 앉아 서랍 속에 든 것을 보았다. 서랍 속엔 단 한 권의 책만 있을 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이는 책에 손을 뻗었다. 누렇게 변색되어 오래된 종이 냄새를 풍기는 그것은 방 안 책장에 있는 책들과는 사뭇 달라보였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앞표지를 넘겨보았다. 거기엔 흐릿하게 번져버린 잉크로 적힌 문구가 한 개 적혀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서 형사님!'
문구를 본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 형사님이 누구지. 아이는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다. 사범님, 순경 언니, 미용사 아주머니, 그리고 기자 아저씨. 누구도 서 형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서 형사의 책이 이곳 서랍에 있었던 것일까. 아이는 책의 표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리고 그제야 그 책이 일기장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는 일기장의 첫부분을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일기장
W.T. HA_RUT_
19xx년 3월 29일
생일선물로 일기장을 받았다. 오 형사는 이걸 무슨 생각으로 준 건지.... 이왕 받은 거 알뜰살뜰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에 몇 문장 적어본다. 음. 아침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식빵 한 조각만 먹었다. 죽기살기로 뛰어간 덕에 지각은 면했다. 문턱에 넘어져서 무릎에 멍이 하나 더 늘었지만. 생일 축하한다고 경감님께서 점심을 사주셨다. 점심 메뉴는 국밥이었다. 준혁이는 비타민, 오 형사는 이 일기장. 하루의 일과를 적어서 더욱 나은 서 형사님이 되길 바래요 라고 말했던가. 오형사 생일 때 나도 반드시 일기장을 사줘야지. 도경사님은 밴드를 사주셨다. 이 밴드를 한 달 넘게 사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할 수 있다 서재호! 아자!
어...근데 일기는 어떻게 마무리 하는 거더라?
오랜 세월로 인한 종이의 변색과 잉크의 번짐으로 읽기 어려웠으나 아이는 천천히 한 글자씩 읽어내려갔다. 하루에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담은 글은 은은한 재미가 있었다. 아이는 다음장을 넘겼다.
19xx년 4월 1일
오늘 만우절이었던 것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애초에 주말인 것을 왜 잊어먹은 것인지. 현장으로 출동해야 되는데 어디냐고 전화 온 오형사의 말을 듣고 바로 달려나간 탓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도 분명 있겠지. 도착하자마자 아무도 없어서 다가올 일에 대한 불안으로 감각이 둔해져서 오형사의 말을 무조건 믿은 것도 분명! 분명!! 잘못이 있겠지!!!
지금 범인을 추적 중이라면서 나한테 신호를 주면 암호를 외치라는 그 말...따지고보면 이상한 곳이 한 두군데 아님에도 급한 나머지 알겠다고 답했었다. 심지어 암호도 진진바리였는데 왜 눈치를 못 챘을까. 서울역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진진바리를 외친 걸 생각하면...어우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지...
쪽팔려 죽겠는데 팀원들은 전부 놀리기만 해서 어찌나 서럽던지.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일 서에 무슨 얼굴로 가야한담. 으아...
일기장 한 쪽엔 볼펜으로 까맣게 색칠한 흔적이 있었다. 일기장을 쓴 사람이 한 것같았다. 글을 썼을 당시의 고민이 그대로 느껴지는 낙서였다. 아이는 그것이 어쩐지 웃겨 혼자 키득거리다 다음장을 넘겼다.
19xx년 4월 5일
오늘은 준혁이 생일이었다. 준혁이가 뭘 좋아하는지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선물 살 때 꽤 고민했었다. 그래도 역시 건강이 제일이지 않을까 싶어서 영양제를 선물해줬는데 맘에 들어하는 것같아 다행이었다. 오 형사는 넥타이를 선물해줬다. 준혁이는 왜 멀쩡한 거 주냐고 투덜거리니까 양반이랑 나랑 같냐고 하던데...다른 건 맞지만 취급을 다르게 하는 건 아니잖아 오 형사.... 이번에도 점심은 경감님께서 사주셨다. 덕분에 얻어먹었어. 고마워 준혁이!
가볍게 술 한잔 땡기고 왔더니 집중이 잘 안되네. 준혁이 생일 기념으로 저녁에 오 형사랑 셋이서 술자리를 가졌다. 아예 취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내가 먼저 골로 갈 것같아서 그만뒀다. 양반 술 잘 못 마실 것같은데 은근 마신단 말이야.... 에잉 몰라. 오늘 일기는 여기서 끝!
19xx년 4월 8일
이거...은근히 쓰기 힘들다. 매일 적어야 되니까 할 말도 없다. 늘 특별한 일 없이 하루를 지내다보니...음...오늘 아침엔 편의점에서 산 빵이랑 우유를 먹었다. 점심시간 전엔 출출해서 사탕 하나 먹었고...점심 땐 도경사님이랑 햄버거 세트를 시켜먹었다. 그리고..음..음...저녁에는 순두부찌개 먹었음. 식단표도 아니고 대체 뭘 적는 건지...
다음장에도 별 반 다를 게 없는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과 함께한 활동들도 모두 비슷비슷한 평범함 그 자체의 날들이었다. 내용이 조금 특별하다고 생각되면 그 건 다른 사람들의 생일이었다. 오형사라는 사람에게 기어코 일기장을 선물한 것이 치사하면서도 두 사람의 친분이 그대로 드러나 어쩐지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아이는 빠르게 종이를 넘기며 내용들을 읽어갔다. 그러는동안 일기장 속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 곧 겨울을 앞둔 11월이 되었다. 이제 일기장 속의 그들은 시원한 냉면보단 뜨끈한 오뎅국물을 더 많이 먹었고 고장났다던 에어컨에선 따듯한 히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날의 장면들에 아이는 같이 웃고 즐거워하며 다음장으로 넘겼다. 일기장의 내용이 바뀐 것은 그 때부터였다. 일기를 쓰는 날짜는 이제 매일이 아니라 며칠씩 건너띄기 시작했다.
19xx년 11월 21일
정보원과 잠입요원이 또 죽었다. 정보원은 소완국, 잠입요원은 이준영 이라는 이름이었다. 범인으로 추측되는 사람은 정은창이라는 놈이었다. 서울역에서 소완국을 만나 창고에서 사라진 것을 목격한 이가 있어 그들의 행방을 쫓아 현장으로 투입되었다. 딱봐도 뒷처리를 한 느낌을 풀풀 풍기는 것이 사건 장소에 있는 증거들을 꼼꼼하게 수집해갔다. 머리를 부딪히긴 했지만...아프지 않았다. 응. 전혀 아프지 않았어.
결론만 말하면 무소득이라는 것이다. 컨테이너에 있던 대량의 피와 탭댄스라도 춘 것같은 어지러운 발자국, 여기저기에 묻어있던 지문들 모두 큰 소득을 얻진 못했다. 경감님의 지시로 정리한 자료는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 법적인 효력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이럴 때마다 가끔 허탈함이 느껴져서 한 순간 힘이 빠진다. 그래도 경감님께서 잘했다고 해주셨으니...앞으로 더 노력해야지. 그 분의 기대를 져버리는 행동은 결코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낮엔 백석그룹의 저택으로 갔다. 이상하게 차를 탔는대도 숨이 차올랐다. 멀미가 심해진걸까. 준혁이는 서에서 바로 나왔다고 했다. 정말 착실하게 일하는 사람이란 말이지. 저택은 정말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집이어서 신기했다. 그런 집이 서울에 정말 존재하구나....
경감님께서 잡으신 사람은 정은창이라는 놈이었다. 심문으로 얻은 것은 이준영과 소완국의 정보가 아닌 우리팀의 정보원이었다. 그냥 빠져나가기 위해서 뱉은 것같은데...경감님의 선택을 존중해야지. 제발 우리를 위해, 적어도 경감님을 위해서라도 배신하지 말라고.
19xx년 11월 22일
허탕이다. 잠입요원의 정보를 받고 찾아가 깡패들을 잡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주운 가방이 가짜라는 건 역시 기운을 빠지게 했다. 김성식놈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인지. 경감님께서 말씀하시길 하극상을 준비할려는 것같다는데 정말 그냥 두면 안되는 놈이다. 우선 하극상의 정보부터 차근차근 모아야지. 우호적인 황도진이 아닌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김성식으로 선진화파의 세력이 바뀌면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다.
일이 많아졌다. 일기를 이제 자주는 못 쓸 듯 싶다. 오형사에게 들키면 잔소리가 장난 아니겠는데.
19xx년 1월 23일
2개월만에 일기를 작성해본다. 하루 일과를 적으라고 준 일기장인데 어쩐지 사건내용을 정리하는데 사용하는 것같다. 뭐, 어떻게 쓰든 상관은 없겠지.
도형사님께서 주신 첩보는 굉장히 파편적이었다. 분명 내부적인 문제가 있었던 거겠지. 첩보를 받은 시간으로부터 몇 시간 뒤에 바로 일어나는 하극상이어서 장소를 빨리 찾아야했다. 다행히 내부요원들이 힘내주어서 어렵기는 했지만 아예 찾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장소는 장산병원이었다.
...이 이상 뭐라 적어야 될 지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닫힌 셔터문 때문일까. 좀 더 적절한 대응을 못했기 때문일까. 황도진은 죽었다. 잠입요원들도 다섯이나 죽어버렸다. 김성식의 짓이겠지. 김성식은 이번 하극상으로 황도진 뿐만 아니라 배신자들 마저 없앨 속셈이었던 것이다. 경찰이...우리가 완벽하게 당해버렸다.
......도형사님도 돌아가셨다.
19xx년 2월 3일
마음을 좀 추스릴 필요가 있었다. 꼭 적어야할까 고민을 했으나 일어난 일인 것은 틀림없으니까.
도형사님께서 돌아가셨다. 발견한 것은 오형사였다. 현장으로 달려갔을 땐 울고 있는 오형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그 옆에 쓰러져있는 도형사님도. 배신자 색출로 희생당한 잠임요원들과 함께 도형사님은 쓰러져계셨다.
장례는 얼마 전에 끝났다. 오늘은 도형사님의 가족분들에게 드릴 위로금을 모금했다. 계속 생각해오던 일이었다. 가까운 사람이 곁을 떠난다는 건...상상했던 것보다 상실감이 커서 뭐라고 표현해야될 지 모르겠다. 나도 이런데 가족분들은 분명 더 슬프시겠지. 위로금을 봉투에 담으면서 아무리 넣어도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도형사님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아직 익숙하지 않다. 아침에 지각하면 또 늦었냐고 말씀해주실 것만 같다. 팀원들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다들 기운이 빠져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되는 건 알고있지만...역시 힘드네...
주말에 다시 도형사님을 뵈러 갈 예정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도세훈 경사님.
19xx년 2월 4일
철야작업이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일기장을 다 쓰고 덮으니 경감님께서 함께 작업하자고 하셨다. 준혁이가 도와줘서 다행이지 하마터면...어휴. 뭐...나 혼자 철야작업을 한 번 더 했지만...
김성식이 또 사고를 쳤다. 정말 이토록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어려운 것을 김성식이 해낸다. 직접 거래에 나선다는 첩보가 들어와 급하게 현장으로 출동했다.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굳이 적을 필요는 없을 것같다. 시신을 발견했고 그곳의 현장을 조사했다. 모든 정황과 자료를 분석해보았을 때 김성식은 거래에 나서지 않았다. 첩보가 틀릴 리는 없고 김성식의 의도거나 아님 내부에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요즘따라 자꾸 무언가를 놓치는 기분이다. 조각을 모아놓으면 늘 어느 한 구석이 빠진 느낌. 그래서 전체적인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 눈 앞의 것을 쫓기에도 힘이 벅찬 것은 맞지만서도 큰 건이 들어오지 않으니 수사가 자꾸 늦어진다. 내 오지랖인 것인지...
19xx년 2월 9일
국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신데...
19xx년 5월 15일
새로운 사람들이 팀에 합류했다. 전부 맘에 안들었다. 특히 이경환.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의 비위를 맞추는 것 뿐이었다. 팀의 분위기가 나 하나로 망쳐지면 안되니까. 저 세 명과 잘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최대한 어울려봐야겠다. 경감님을 힘들게 해드리고 싶지 않다.
팀장님께서 백석그룹의 사위가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모두가 알고있겠지. 그렇지만 남의 사생활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사모님이 되실 백석그룹 회장의 따님분과 팀장님의 사이가 어떻든 둘은 결혼을 할 거니까. 오형사가 이런게 어떻게 사랑이냐고 화내는 것을 겨우 말렸다. 어쩐지 옛날 일이 떠올라버려서 뭐라 한 마디 할려다가 말았다.
팀의 분위기가 전보다 다른 것같다. 새로운 인물이 들어와서 그런 걸수도 있지만 어쩐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단순히 내가 적응을 못하는 것일까. 경감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진 않은데...
아, 그러고보니 요즘따라 준혁이가 조금 바뀐 것같기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사람이 전보다 풍부해진 느낌이다. 어감이 이상하지만 이 이상으로 뭐라 표현하지 못하겠네. 오늘도 보면 유독 정신을 못차리는게...설마...애인이라도 생겼나?
19xx년 5월 16일
준혁이가 이번에 경사로 승진했다. 역시 유능한 사람은 다르구나 싶었다. 팀장님도 승진하셔서 이젠 국장님이 되셨다. 하성철 국장님이 떠나시고 바로 그 자리를 메꾸셨다. 호칭이 낯설어서 그런걸까. 점점 팀장님이 우리 팀에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일기장에서만 적을 수 있는 생각이지만.
공고글을 볼 때 이경환이 내 뒷통수를 때렸다. 울컥한 것은 맞는데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어제부터 이랬다.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게. 오 형사 덕분에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마웠어 오 형사. 근데 내 뒷통수는 내거야...
19xx년 6월 20일
결혼식과 장례식이 겹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어쩌다가 날짜가 그렇게 잡혀버린 것인지. 하성철 국장님의 장례식과 박근태 국장님의 결혼식이 겹쳐져서 분위기가 영 애매해져버렸다. 조용호 경사님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지만...역시 두 분 모두 상사였는데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경사님은 대체 뭐가 맘에 안 드는지 나를 타박하는데...맞는 말이라서 뭐라 대답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들어야 했다.
경사님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건지 전혀 모르겠다. 나머지 두 명과 다르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친해졌다 생각하면 다시 구박을 줘서 어색해진다. 나를 맘에 들어하는 건지 아닌지 참... 어떻게 대해줘야 되는건지...
이 뒤로 일기장엔 어떠한 내용보다는 짧은 메모들이 적혀있었다. 아마 작업 중에 사용했으리라. 아이가 읽기엔 글씨는 너무 엉망진창이었고 거기에 잉크도 번져있어서 그저 이곳에 메모를 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 그런 장들이 뒤에도 쭉 이어졌고 다시 일기라고 부를만한 글이 나온 것은 한참 뒤인 11월에서였다.
19xx년 11월 12일
이제 완전히 끝을 볼 때가 되었다.
19xx년 11월 15일
첩보가 들어왔다. 김성식이 거래를 하는 장소를 유추해낸 결과 영호 퍼시픽 호텔임을 알아냈다. 경감님의 독려가 없었다면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옆에서 도와준 오형사도 마찬가지고. 나답지 않게 요즘 기운없이 지낸 탓에 걱정을 끼쳐드린 것같다. 어서 기운 차려야지.
바로 내일이 선진화파 진압일이다. 그동안 겪어온 일들이 머릿속에서 가볍게 흘러간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긴 시간이 아님에도 길게 느껴지던 나날들이었다.
지금 시각은 벌써 새벽 12시다. 연속되는 야근으로 솔직히 일기를 쓰는 것도 힘들지만 어쩐지 두근거려서 펜을 가만둘 수 없었다. 이러다가 내일 졸면 안되는데... 어서 자야지.
19xx년 11월 16일
오늘만큼 기쁜 날이 또 있을까. 우리를 오랫동안 붙잡아놨던 사건을 드디어 끝낼 수 있었다. 아직도 사건 종료를 외칠 때의 짜릿함이 남아있다. 드디어 끝을 낸 것이다. 드디어.
너구리 사냥에 쓴 방법은 확실히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놈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경감님은 이번에도 나를 믿어주셨다. 준혁이도 도와주었고. 늘 팀원들에게 신세를 진다. 언젠가 반드시 보답하리라.
유상일 이라는 분을 만났다. 경위님에 딸까지 있으시면서 잠입요원을 지원하셨다고 했다. 국장님과 경감님을 친하게 부르셔서 어찌나 깜짝 놀랬던지. 아...나도 이제 부를 수 있구나. 술에 취해서 다행이지 맨정신으로는 분명 못했을텐데. 현석이 형님이라는 호칭은 아직 낯설지만...곧 익숙해지겠지.
무엇인가 다시 시작될 것같은 느낌이다. 취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오랫동안 고생한 사건이 끝나서 그런 걸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런 느낌이 든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이 팀원들로, 지금 느끼는 이 행복을 계속 가져갈 수 있기를.
19xx년 11월 23일
이젠 상일 형님이라고 불러드리게 된건가. 현석이 형님. 상일 형님. 준혁이. 오 형사...는 아직 이름으로 부르기엔 이상하네. 그래도 좀 더 가족같아진 기분이다. 나머지 세 명은..음..조용호와의 관계는 여전히 모르겠단 말이지...
상일 형님은 요즘 굉장히 바쁘시다. 영웅의 이미지를 얻어서 인터뷰도 불려다니고 쉴 법도 한데 현장에도 나가시니. 현석이 형님이 많이 걱정하시지만 다 소탕해야 된다면서 말을 안 들으신다. 의외로 고집이 강하신 분이란 말이지... 오늘 볼링장에도 같이 나가셨다. 실수를 해버리는 바람에 큰 일 날 뻔했지만 덕분에 열쇠도 얻고 잔당들도 처리해서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오 형사가 아무래도 상일 형님을 좋아하는 것같다. 변함없는 사랑을 좋아한다고 했지. 어려운 환경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온 상일 형님은 분명 오형사의 이상형이었다. 오늘도 상일 형님이 멋있다며 눈에서 하트를 뿅뿅 날리는 게 평소에 알던 모습과 달라서 색다르기는 했다. 그렇게 좋을까...
뭐...응원한다고...미정이.
아이는 다음장을 넘기다 다시 일기가 아닌 메모들이 적힌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아까와는 다르게 그것은 단순히 일과 관련된 내용이 아니라 이것을 쓴 사람의 감정이 담긴 말들이었다. 아이는 그것을 한 글자씩 꼼꼼히 읽었다.
절대 아니라고 했는데
상일 형님은 그럴 분이 아니란 말이야
어째서 이렇게 된거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건데
도대체 누가......
시끄러워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어.
어째서 난 살아남은거지 어째서...
유아연
아연이를 살렸더라면
그리고 다음장으로 넘겼을 때 아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누렇게 변질된 종이 위로 꽃이 피듯 종이 위에 퍼져나간 눈물자국은 여러 군데 떨어져 있었다. 방울방울 떨어져 눈물에 일어진 종이는 손으로 쓰다듬으면 울퉁불퉁한 감촉이 느껴졌다. 글자는 눈물에 번져 흐릿해졌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꾹꾹 눌러담아 쓴 것인지 다음 장에도 글자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그것을 손가락으로 쓸며 소리내어 읽었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아이는 일기장을 덮었다. 어쩐지 먹먹해지는 기분에 잠시 눈을 감았다. 일기를 쓴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순 없었다. 그러기엔 아이는 아직 어렸다. 그러나 당시 그가 느꼈을 감정이 생생하게 전해져와 아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어 호흡을 정리했다. 여기서 그만둬야할까. 아이는 덮혀진 일기장을 보았다. 얇지만 아직 뒷이야기가 남아있었다. 아이는 문 쪽을 보았다. 남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분명 음료수만 산다고 했으면서 다른 것들도 같이 사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일이 한 두번 있었던 것이 아니기에 아이는 남자가 한참 후에야 온다는 것을 알았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사람좋은 웃음을 지어주리라는 것도 물론. 그러니 아이에겐 아직 일기장을 읽을 시간이 있었고 아이는 지금 선택을 해야했다. 더 읽을 것인지, 아니면 그만둘것인지.
아이는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아이는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이토록 슬퍼하며 글을 적던 이 사람의 다음 인생이 궁금했다. 아이는 긴장되어 흐르는 땀을 닦고 다음장을 조심히 펼쳤다. 그곳에도 단 한줄의 문장만이 적혀있을 뿐이었지만 앞장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익숙한 말이었다. 아이는 이 문장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결코 오래전의 일은 아니었다. 남자를 만나고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쳐주던 남자의 입에서 들은 말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아뇨.'
'그래. 가릴 수 없지. 진실도 하늘과 똑같아. 거짓말로 가려볼려고 애를 써봐도 결국엔 밝혀지게 되어있지. 그게 언제가 되었던, 반드시.'
당시 남자의 눈은 햇빛을 받아 노란색으로 반짝거렸음을 아이는 기억해내었다. 그 모습이 자신이 알던 남자와는 사뭇 달라서 아이는 그 말을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일기장에 적혀있는걸까. 아이는 서형사와 남자의 관계성을 생각해보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남자가 서형사거나 서형사의 물건을 남자가 가진 것이거나. 전자 쪽이 더 가능성이 컸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얽혀가는 생각에 머리를 두 어번 세게 젓고는 다음장으로 넘겼다. 그곳엔 여전히 짧은 메모가 적혀있었다. 하지만 글씨체가 사뭇 달랐고 잉크의 번짐도 약한 것이 꽤 최근에 적힌 것같았다.
저는 잘하고 있는 겁니까?
누구에게 묻는 질문인지 모른다. 단지 묻고있을 뿐이었다. 잘하고 있는 거냐고. 그곳엔 아무런 대답도 적혀있지 않았다. 다음장을 넘겨봐도 그 뒤로는 쭉 비어있을 뿐 아무런 글도 적혀있지 않았다. 아이는 이 물음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대답없는 물음엔 쓸쓸함이 느껴졌다.
멀리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서둘러 일기장을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서랍을 닫고 책상에 내려오자 남자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남자는 늦어서 미안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것저것 사다보니 늦어버렸네. 남자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남자의 양 손엔 간식거리로 가득했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를 발견하곤 기분이 좋아져 괜찮다고 답해주었다. 내일 오면 바로 간식을 준비해주마. 남자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아이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사범님이랑 순경 언니가 기다린다. 아이는 네, 라 대답하고는 남자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쌀쌀한 가을의 바람이 아이의 뺨을 스쳤고 아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설희야. 추워?"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서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쌀쌀하기는 하나 춥지는 않았다. 남자는 그럼 됐다며 마저 갈 길을 걸어갔다. 아이도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도로가 보였고 곧 빵빵거리는 차들과 함께 사거리의 신호등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 앞에서 멈춰섰다.
"아저씨"
"왜"
"서 형사가 누구예요?"
아이는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괜한 것을 물어본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아이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혹시 이 손을 놓아버리면 어떡하지. 갑자기 몰려오는 후회와 두려움에 아이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동차들의 경적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순간이었다.
곧 신호가 바뀌어 초록불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횡단보도로 발을 들였다. 빠르게 건너가는 사람들 가운데 두 사람만은 제자리에 멈춰 건너는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는 남자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신호는 깜빡거리더니 곧 30초의 시간제한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에 건너야겠다. 아이가 그렇게 생각할 때 갑자기 남자는 아이를 안아들고서 횡단보도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갑자기 들려져 놀랜 아이는 남자의 품에 안겨 그의 옷자락을 꽈악 쥐어잡았다. 남자는 길게 뻗은 그 거리를 빠르게 뛰어갔다.
"오랫만에 듣는 호칭이군"
"네?"
"서 형사 말이다.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그럼 재호 아저씨가 서 형사예요?"
"......그래. 맞아. 아저씨가 서 형사야. ...설희는 똑똑한 아이구나. 하지만......"
남자가 다시 인도에 발을 놓음과 동시에 신호는 빨간불이 되었다. 뛰지 않았으면 그대로 무단횡단한 꼴이 될 뻔했다. 남자는 아이를 내려놓고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색색거리며 호흡을 정리하는 남자의 곁에 아이는 가만히 서있었다. 송아지는 무슨. 애 하나도 못 들게 됐네. 남자는 혼자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작게 실소를 터트리다 아이를 보았다. 크고 똘망한 눈으로 저를 봐오는 아이의 머리를 남자는 크게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이젠 그냥 재호 아저씨야."
그리고 지어주는 미소엔 무엇이 담겨있는 것일까. 아이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남자의 눈을 보았다. 호박빛을 띄는 그 눈엔, 그리고 그 눈으로 웃는 그 얼굴엔 대답없는 질문에서 느꼈던 쓸쓸함도 보였고 사건을 해결하여 기뻐하는 형사의 후련함도 보였다. 아이는 남자에게 무어라 말을 하기위해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무엇을 말해야할지몰라 곧 다물어버렸다. 대신 아이는 손을 뻗어 남자의 머리 위에 얹었다. 남자는 조금 놀란 눈으로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다른 한 손도 남자의 머리 위에 얹고서 강아지를 쓰다듬듯 남자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지금 뭐하는 거니? 당황한 얼굴로 저를 보는 남자에게 아이는 말했다.
"잘하고 있어요. 재호 아저씨."
"...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방긋이 웃었다. 아이의 웃음에 남자도 덩달아 웃었다. 아이가 어째서 웃는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엔 남자는 많은 것들을 몰랐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이가 웃었으니까 된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도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이제 쓸쓸하지 않을 거예요. 아이는 말을 삼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남자가 알고있으리라 믿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서 자신들을 기다릴 사람들을 향해 도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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