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동갑조
회도전력 60분
하얀 셔츠에 검은 재킷. 단정해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둔 교복이라지만 지극히 평범한 디자인.
그런 옷을 입은 남학생 세 명이 굳게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
"....큼."
"....꼭 그렇게 나가야겠냐?"
"한 번쯤 교문 타고 넘는 게 학교 생활의 묘미 아니겠어?"
"아니지."
"보통은."
"크~ 둘 다 샌님 같은 면이 있다니까."
최재석은 닫힌 교문을 잡더니 틈새를 밟고 올라가 훌쩍 넘어 반대편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정은창과 유상일은 한숨을 푹 쉰 뒤 고개를 저었다.
"어때? 멋졌어? 엉?"
"...하교 시간이라 잠겨있던 것도 아니고 열려있던 거 도로 닫은 다음 뛰어넘은 게 어디가 어떻게 멋지냐, 기연이지..."
"우리 재석이는 뭘 먹고 저렇게 이상한 행동만 하는지 모르겠어."
"체, 상일이 너,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거 아니다. 나름 벌점 안 받으려고 일부러 하교 시간에 하는 거 아냐."
"네가 말하는 멋지는 것도 땡땡이나 학교 생활의 일탈류 아니었어? 이거저거 따지는 비행이라니 되게 멋없긴 하다."
"정은창 너까지..."
"왜, 담배 꿍쳐둔 거 줄까?"
"...해 볼까?"
"됐네요. 줄 생각 없으니까."
"쳇, 나도 피울 생각 없어."
"그만 가자."
학교 후문은 세 명 모두의 집으로 가는 길목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오로지 하교 시간에만 개방되었다. 최재석이 허리며 어깨며 가볍게 푸는 동안 유상일과 정은창은 후문을 열고 나왔다. 보통의 하굣길은 근처 포장마차에 들러서 떡볶이나 순대 같은 군것질을 하다가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곤 했다. 그러나 군것질을 하기엔 셋 모두 현재 시점에서 주머니가 가벼워 마땅치 않았고, 헤어지는 지점인 삼거리까지 걸을 뿐이었다.
"너희들, 가서 할 일 없음 다같이 우리집에 놀러가지 않을래?"
"아저씨는 안 계시냐?"
"평일인데 있을 리가 없잖아. 양시랑 함께면 아저씨가 친구들이 놀러와서 배 채우고 가거나 자고 가거나 하는 걸 제지하는 것도 아니고. 같이 게임하거나 비디오 보기도 좋잖아?"
"비디오라...뭐, 야한 거라도 있냐?"
"당근 야한....게 아니라, 정은창. 너 나한테 감정 있냐? 남자라면 역시 호쾌한 액션이지!"
"네네..어련하시겠어요."
"양시, 양시하는데 꽤 귀여워하는 모양이다? 동생?"
"아저씨 아들이고, 내 친척동생. 얼마나 귀여운데. 그래서 가는 걸로 결정한 거다?"
***
아이를 낳고 일찍 죽은 어머니,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우지 못 한 채 생계 유지를 위해 일에 바쁘게 뛰어드는 아버지와 홀로 남은 아이.
흔한 가족사였다. 양태수는 제 어린 아들 양시백을 동생처럼 돌봐주는 것을 조건으로 부모님을 여읜 최재석을 받아들였다. 정은창은 최재석의 집에 찾아오는 건 처음이었지만 유상일은 종종 찾아온 적이 있었다.
"양시~ 형 왔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최재석이 친근한 목소리로 안에 있을 아이를 불렀다.
신발장 앞으로 쪼르르 온 아이를 본 유상일은 손을 흔들었고, 정은창은 잠시 그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매가 꽤...인상적이네."
"아저씨랑 판박이야. 그래도 애한테 골목대장 같다거나 하지는 마. 콤플렉스인 거 같으니까."
"..알았어."
"자, 양시. 형아 친구들이야. 상일이는 알 테고, 저기 삐죽머리 형은 정은창이라고 해. 인사하고 이름을 말해줘."
유상일이랑 속닥이는 사이에 최재석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고, 날카로운 눈매와는 달리 꽤 낯을 가리는듯 했던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름은 양시백이고요, 다섯살이에요."
"정은창이야."
"자, 그럼, 모처럼 네 명인데 게임이라도 할까?"
책가방을 방 한구석에 툭 내려놓고 아이를 안아든 최재석은 가방은 알아서 두라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유상일은 익숙하게 제 가방을 비슷하게 내려두었고, 정은창도 그대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최재석이 들어간 쪽은 안방이었는데, 어린아이가 혼자 있던 것치곤 이불이 구겨지고 흐트러져 있다는 것, 마시려고 꺼냈지만 제 힘으론 열지 못 한 걸로 보이는 오렌지 주스 페트병, 꽤 큼직한 텔레비전 앞에 연결되어있는 게임기와 패드를 빼면 평범했다.
"청소 안 하냐?"
"너희들 가면 해야지. 그래서 뭐할래? 마리오? 갤러그?"
"아무 거나."
"그럼 우리 양시도 하는 슈퍼마리오로 해 볼까나."
"음료 좀 따라올 테니, 세팅 좀 해 놔."
"그럴게."
유상일은 오렌지 주스 병을 들고 거실쪽으로 향했고, 최재석이 안았던 아이, 양시를 내려놓고 게임기와 패드를 묶은 선을 푼 다음 텔레비전을 외부입력으로 변환시키는 동안 나는 흐트러진 이불 같은 것을 정리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정은창은 이불을 개켜놓던 중에 바깥쪽 공간에 놓인 작은 유리장을 보았다. 그 안에는 금색의 작은 컵 모양을 한 장식물들, 트로피가 있었다. 이 집에서 꽤 줄지어 저런 것을 장식해 놓을 만한 녀석은 최재석 밖에 없으리라.
"트로피, 많네."
"어? 응...그렇지 뭐. 이래보여도 장래 촉망한 체육부의 별 아냐?"
"성적은 별로 촉망치 못 한 거 같은데."
"왜, 왜 그렇게 아픈데를 찌르고 그러냐..."
"형아, 공부 못 해?"
"아, 아니야, 그거랑 이 공부랑 달라."
아직 국민학교도 안 들어간 애한테 무슨 허풍을 늘어놓은 건지, 최재석은 손짓발짓하며 양시백에게 무어라고 둘러댔고, 정은창은 그런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가볍게 쳤다. 성적이 잘 안 나온다곤 하지만 그렇게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허풍 적당히 해. 내년이면 졸업 준비해야 하잖아."
"네네, 우리 양시 동심을 깨뜨리지나 말아줄래?"
"어차피 초등학교 들어가면 다 알게 될 텐데 뭘. 형이 자기 속였다고 엉엉 울면서 때린다에 천 원 건다."
"뭐가 어째? 그럼 난 안 그런다에 오천원!"
"애 앞에서 불법 도박 조장하는 짓 하지 말고 주스 마시고 게임이나 하자고들."
쟁반에 주스가 담긴 컵을 가져온 유상일이 그것을 비닥에 내려놓으며 옥신각신하던 정은창과 최재석을 중재했고, 툴툴거리던 최재석은 주스를 홀짝 마시며 텔레비전과 게임기를 조작했다. 곧 텔레비전 화면에 슈퍼마리오 로고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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