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총알은 한발 뿐.

유상일과 박근태. 생일 축하글.

태어난 것은 축복이요, 살아가는 것은 생명이니. 유상일은 박근태가 태어난 날의 숫자를 보며 반가움을 숨길 줄 몰랐다. 존경하고, 또 존경하는 사람과 자신이 태어난 날이 같다니. 해는 다르더라도 한날한시의 느낌이 들지 않는가. 유상일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지 못했다. 

모두가 자신을 향해 비난적인 잣대를 치켜들었을 때, 유일하게 내민 도움의 손을 잊지 못한다. 드넓게만 보였던 그 커다란 등. 그를 보며 아, 이 사람을 따라 가면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겠지. 그런 막연한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그와 똑같은 정복을 갖춰 입고, 그를 향해 경례를 건네던 순간 박근태가 보였던 그 표정은 여전히 잊을 수 없었다. 화들짝 놀란 그 모습에 권현석과 눈 한번 마주치고 결국 웃음을 터트렸던가. 누구라고 먼저 할 것 없이 서로를 얼싸안고 반가움을 잔뜩 흘렸다. 

참 즐거운 시절이었다. 

참… 즐거운 시절이었지. 

유상일은 어두컴컴한 벽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차갑고, 온기 없는 바닥과 낡은 조명. 하루하루 버티는 것에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형이, 딸이, 친구가 제게 말을 건넨다. 혼자 있음이 분명한 이 좁고, 좁은 감옥 안은 외롭지 않다. 생일을 축하하고, 또 제게 복수를 외치는 목소리들. 

끌어안은 품이 차갑다. 

희미한 그림자 아래 박근태가 비친다. 끝까지 얼굴 조차 비치지 않는 그는, 자신에게 결코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환청, 환각. 뭐든 상관없다.

"근태 형님…."

당신도, 양심이 있으면….

"그렇게 바라만 보지 말고, 뭐라고 말이라도 하시지."

유상일이 낮게 끅끅 웃는다. 그렇게 이 아우가 미웠나. 당신을 위해 일을 해왔는데. 끝을 알 수 없는 그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도 얼마든지 구르며 꾸역꾸역 버텨왔는데…. 당신을 지켜들던 사람들을 모두 쓰러트리니 그리 속이 시원하셨나.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서 의미 없이 살아남은 제 목숨을 덧없게 느낀다. 동시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다른 쓰임을 가질 수 있는 자신을 느낀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오랫만에 보는 바깥공기와 햇빛은 너무 뜨거웠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사회에서 다시 걸음한 그는 빠르게 과거를 되짚었다. 의문의 서류와 정보들. 상대방의 생각 따위 알 수 없지만 그 목적까지도 상관 없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판을 깔던, 쥔 무기들을 휘두를 준비는 이미 됐다. 

"도와줘."

유상일은 과거에 부탁한다. 내뱉고, 말리는 이의 손을 잡았다. 과거로 돌아갈 순 없으니, 이 전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손에 피를 묻히고, 또 과거와 닮은 이와 마주하더라도 유상일은 동요하지 않는다. 

오로지, 박근태의 추락만이 그의 삶이었다. 

"하하, … 근태형님."

유상일은 몇 년 만에 재회하는 그를 바라봤다. 무척이나 그립고, 또 그리워 잊어버릴까 봐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되새기던 그를. 세월을 피하지 못한 그의 모습을. 

"유상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자신이 알던 박근태가 눈앞에 있음과 동시에 없었다. 아, 저 초라한 등을 보라. 어릴 적엔 그렇게 드넓고 단단해 보였던 것이 이리도 하찮고 덧없던가. 겁먹은 쥐새끼처럼 꼭꼭 숨어서… ….

"어째서 한 번이라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지?"

"내가, 굳이 너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던가?"

"내 얼굴을 보고, 정말 할 이야기가 없다고?"

박근태는 능청스러운 손짓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습관처럼 움직이는 손끝을 바라봤다. 처음 보는 행동이다. 과거를 버리고 새것을 걸친 사람의 새로운 습관. 유상일은 웃는다. 당신은 과거를 모두 져버리고, 또 져버리는구나. 빛나고 눈부시던 과거의 영광은 모두 사라지고 추억조차 남지 않는다.

시끄러운 주변, 이미 한번 울린 총성. 먼저 숨을 거둔 배준혁을 바라보다 유상일은 박근태를 끌어안는다. 가쁜 숨과 미약한 맥박 소리에 그가 전과 같지 않음을 느낀다. 그래. 우상이었고, 동경의 대상이었던 당신은 무너지고 추악하게 살아남은 자만 남았다.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 과거의 일은 과거에 남아있는 사람이 끝내야 했다. 총명한 젊은 아이들에겐 현재와 미래를 맡겨두고. 

총알은 한발 뿐. 

박근태를 좀 더 끌어안으면 심장이 더 닿을 수 있을까. 차가웠던 제 아이의 품과 다르게. 

'형님은 참 따듯하군…'

"갑시다, 형님…. 준혁이가 기다리는 지옥으로."

총알은 한발 뿐. 

총성도 한 번뿐. 

단 한 번의 총성으로 모든 것이 끝맺는다. 쓰러지는 몸과 사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것 같으니 그것이 신기해 기뻐하던 젊은 청년은 이제 자리하지 않았으나, 한날한시에 생을 마감케 하는 남자로 남는다. 다른 해, 같은 날에 태어나 같은 꿈을 꿈꾸다 다른 미래를 보고 갈라진 두 남자는 그렇게 또다시 같은 길로 돌아간다. 숨이 멎는다. 죄를 모두 품에 안고 영면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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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1


  • 개성있는 바닷가재

    최고의 생일 연성 상일이의 심리 묘사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요 특히 박근태가 완전히 과거의 버릇을 버리고 새로운 버릇을 입었다는 부분에서 원작 생각나더라고요 빛나던 과거를 내던졌다는 묘사가 계속 생각이나네요 둘이 생일이 같다는 게 진짜....신의 한수 설정인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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