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우울雨鬱

주정재 / 누구도 아닌 남자, 정재누아

"비가 오려나."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남자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먹구름이다. 비구름이 몰려온다. 

남자의 시선은 하늘에서 다시 옆으로 내려간다. 담배를 꼬라물고 있는 녀석과 눈이 마주친다.

"왜."

아니.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비가 온다.

불판 위에 올라간 고기가 열기에 빠르게 익어간다. 달궈진 철판에 닿으며 살이 익는 소리는 마치 빗소리 같았고, 그 뒤로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배경처럼 깔린다. 술잔이 부딪히고 웃으며 주거니 받거니 올라가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한 테이블만이 조용하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고기를 뒤집었다. 

주정재는 익어가는 고기를 바라보다가 소주병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뭐."

"따라 줘."

남자는 삐딱한 표정으로 주정재를 바라봤지만 싫다곤 하지 않는다. 그가 쥐고 내민 잔에 넘칠 것처럼 소주가 채워진다. 콸콸콸. 흘릴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면 주정재는 야, 야! 하고 버럭 외치면서 입이 먼저 잔을 마중 나와 다급하게 술을 마신다. 결국 채운 지 1분도 되지 않아 소주잔은 다시 깔끔하게 비워졌다. 

"크으… 새끼, 술도 존나게 못 따라요."

다 마신 잔을 그는 다시 남자에게 흔들며 다른 손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고기는 아직 덜 익었으니 밑반찬으로 나온 겉절이를 집어 입에 넣는다. 

"형님이 스탑 할 때까지 따르도록."

다 씹지도 않고 웅얼거리는 녀석을 때릴까 말까, 남자는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까보단 좀 더 얌전하게 술잔이 채워진다. 아까 넘치게 따른 탓인가, 남아있던 소주 양은 누군가 스탑을 외치기도 전에 동이 났다. 잔을 반 채우지도 못하고 가벼워진 것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주정재가 남은 잔을 쭉 들이키곤 남자가 내려놓은 병을 뺏어 높이 들었다.

"누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쇼!!"

쩌렁거리는 목소리에 저 멀리서 예에~ 하고 대꾸한다. 그렇게 비워진 녹색의 병은 테이블 아래로 내려간다. 테이블 아래. 두 남성들의 거리 사이에 벌써 다섯병이 넘게 빼곡하다. 

"하이고, 삼촌들. 무슨 술을 그렇게 빨리 마셔."

"비도 오는 데, 술이라도 쭉쭉 해야죠. 흐흐."

넉살도 좋다. 직원분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주정재의 낯은 술에 취한 사람의 꼴은 아니었다. 말도 꼬이지 않고, 능청스레 대화하는 모습은 멀쩡해 보이니 혹시나 했던 직원도 테이블을 훑어보다가 다시 다른 테이블로 떠난다. 새 병을 뜯고 잔이 다시 채워지면 그들의 자리는 다시 침묵이 잠긴다.

고기를 뒤집으니 아까보다 좀 더 빠삭하게 구워져서 다 익어가는 고기가 불판 바깥쪽으로 쫓겨난다. 아까부터 불판이 비워지질 않으니 불 세기를 좀 줄이고 남자는 집게를 내려놓았다. 젓가락을 쥐고 바삭해진 고기를 집어 쌈장에 찍었다.

"쌈장?"

"뭐."

"쌈장은 쌈 싸 먹을 때 넣는 거고 임마."

"어쩌라고?"

쌈장만 찍힌 고기가 그의 입에 들어간다. 양파절임을 집어 입에 넣고, 고기와 함께 씹었다. 쌈장이 뭐가 그리 불만스러운지 계속 중얼거리던 주정재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소주잔을 기울인다. 

"적당히 마시지?"

녹색 병이 다시 주정재의 손에 잡히자 남자가 한마디를 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남자와 시선을 마주한다. 줄지 않는 고기와 반대로 빠르게 비워져 가는 소주병. 나란히 세워진 녹색의 병들은 모두 주정재가 마신 것이었다. 남자는 알고 있다. 저 멀쩡한 낯이 이미 술에 절인 상태라는 걸. 

이건 모두 비 때문이다. 

불만스럽게 찌푸려진 주정재의 시선을 뒤로하고 그 뒤로 보이는 창밖을 바라봤다. 내릴 것 같았던 비는 도시를 잠길 듯 매섭게 내려 든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평소보다 적다. 바닥은 물기로 축축하고 가게 사장은 틈틈이 밀대로 물기를 닦아들지만 문이 열리고 새로운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바닥이 다시 젖는다. 한숨을 푹 쉬던 사장의 뒤로 직원이 뜯어놓은 박스를 꺼내오고 바닥에 깔린 박스는 계속 젖어간다. 

"내가 마시던 말던 뭔 상관인데."

"1절만 해라?"

"1줠뫈 훼라?"

"… …."

주정재가 웃는다. 대꾸 없는 남자의 반응이 통쾌한지 꺽꺽 웃던 주정재는 남자가 말린 것을 뒤로하고 다시 병을 기울여 잔을 콸콸 채운다. 불판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투명한 잔 너머가 이글이글하다. 바삭하다 못해 딱딱해져 가는 고기를 주정재의 그릇 쪽으로 던지듯 몰아넣는다. 술에 뇌가 절여진 녀석은 그것도 모르고 그릇 위에 고기가 채워져 있으니 좋다고 웃는다. 고기를 한참 씹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면 테이블 아래는 어느새 일곱병이 되어간다. 그 중 남자의 병은 한두병이 될까.

"야."

"왜."

"왜 비가 올 때마다 관절이 쑤시냐."

"늙어서 그렇지 새끼야."

"그럼 비가 올 때마다 상처가 쑤시는 건 왜 그러냐."

"늙어서 그렇겠지."

"이 새끼가!"

주정재가 들고 있던 젓가락으로 남자의 이마를 탁 때린다. 집게를 쥐고 있던 남자의 손이 뻐근하게 떨린다. 힘을 너무 줘서 그랬다. 때렸다고 좋다며 웃는 주정재는 금방 다시 조용해진다. 

비가 오면 늘 있는 일이었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있고, 날이 있는데 하필 그것도 비가 오는 날이라… …. 비로 씻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새겨지는 기분. 네가 알겠냐."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불판 위로 익어가는 버섯을 꾹 누른다.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도 남자는 주정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반면 주정재는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 이상으로 비 오던 어느 날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는 사람이 앞에 있다는 것도 모른다. 

"씨이팔. … …나는, 잘 하고 싶었던 것 뿐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 녀석이 나를… …."

술기운에 잠긴 목소리를 시큰둥하게 바라본다. '그 녀석'을, '그 사람'을 떠올린다. 오히려 남자는 묻고 싶다. 그렇다면 너는 어째서 그 사람을? 하지만 모든 질문은 고기와 함께 목뒤로 내려간다. 남자는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었다. 

탕.

주정재는 술잔을 기울이고, 눈을 감는다.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총성이 울린다. 빗소리와 함께 총성은 멈추지 않는다. 주정재는 그날에 갇혀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예민해지고, 금방 우울감에 젖어 허우적거렸다. 처음엔 몰랐고,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다가 지금엔 확신을 한다. 우스웠다. 그날에 갇힌 것은 남자 뿐만이 아니었다. 동병상련이 또 있었다. 남자는 반가움에 입꼬리를 찢어 웃는다. 물론 주정재는 볼 수 없다. 

그가 오해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남자는 바로 잡지 않는다. 그가 죄책감에 시달릴 때마다 그 위로 더 무거운 바윗돌을 올려놓는다. 죽음으로 사죄하여도 부족한 죄를 남자는 옆에서 바라본다. 고기는 타들어 가고 비워지는 불판 위로 고기가 다시 올라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정재가 야! 하고 버럭 외치며 집게를 뺏는다.

"너는 어떻게 유도리도 없이 고기만 쌩으로 굽냐."

그렇게 외친 주정재는 밑반찬으로 나왔던 콩나물과 김치를 불판 위로 올린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 주정재는 그렇게 불판 위로 이것저것 올라가다 다시 집게를 남자에게 준다. 고기 기름이 눌어붙은 불판 위로 양념들이 얹어져 더러워진다. 물기가 날아간 콩나물을 툭툭 건들다가 집게를 내려뒀다. 손이 기름지다. 

불판에선 여전히 빗소리가 났고, 창문 너머에서도 여전히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이면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는 주정재.

언제나 과거에 멈춰있는 남자. 

비는 또 올 것이고, 

남자는 비를 멈추기 위한 여정을 걸어가고 있었다. 

비가 그칠 때 까지...

머지 않았으리라. 

비雨는 우울憂鬱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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