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혜연이....부탁해....

주정재가 사경을 헤매는 중에도 그 말만이 선명하게 들렸던 것은 권현석의 마지막 말이기 떄문이기도 했고, 그 마지막 말을 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은창에게, 죽일 만큼 각별하고 죽일 만큼 증오하는 정은창이 견딜 수 없이 질투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박근태가 보낸 이경환이 현장에 도착해 주정재를 수습했고, 주정재는 흐릿한 시야에 가슴이 고요한 피투성이가 된 권현석의 모습을 담았다.

현석이 너, 그런 놈 아니잖아.

얼른 일어나. 나도 살았는데 네가 죽어버릴 거야?

거기에 있는 건 권현석의 시체였다. 주정재가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살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권현석은 당장 응급실에 도달했어도 숨을 거둘 수밖에 없는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흐릿한 눈꺼풀이 완전히 닫혀 어둠으로 덮일 때까지도 주정재는 그런 말들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몸을 추슬러 일어났을 때에는 피를 거꾸로 솟게 하는 진상이 주정재 앞에 던져져 있었다. 권현석의 시체를 조작하고 차에 태운 째로 한강에 수장시켰다는 진상. 그리고 뒤늦게 발견된 그 처참한 시체를 수습하여 해가 지나고서야 실종 대신 의문사로 처리되어 장례가 치뤄진다던 소식이었다. 그렇게 아끼던 권현석마저 죽여 없애게 한 박근태가 주정재 자신을 살려둔 것은 우스운 일이었으나 자칫 입을 뻥끗하면 저토록 처참하게 권현석을 죽인 것을 그대로 뒤집어 쓸 판이었다.

넌 저런 인간을 형이라고 믿고 따른 거야. 내 때와 같아. 영광이네, 아주.

십 몇 년을 가족같이 아끼고 따르고 사랑하던 형님과 같은 취급을 받다니!

큭큭 하는 비웃음이 들어줄 사람 없는 헛웃음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뚝 멎었다.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 그런 눈빛으로 박근태를 보던 때의 권현석을 상상하기에도 끔찍할 따름이었다. 제가 당한 것도 아니건만 주정재는 갈 곳 없는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올 것 같아 한참 동안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

살아남기 위해서.

찌르고 꿰는 걸로는 모자라 뒤통수를 치고 다리를 걸고 눈에 흙을 뿌리고서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주정재는 박근태를 따르겠노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생존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따르는 것뿐이지, 권현석을 따르던 것과는 달랐다. 어차피 그 때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주정재는 박근태의 명령인 것처럼 권현석의 수첩을 빼돌렸다.

훼손된 수첩만이 권현석의 유일한 유품이었다. 깨지고 피투성이가 된 주인처럼 수첩은 찢어지거나 안의 내용이 대다수 번져있거나 했다.

부탁해...

혜연이..

젖었다가 마른 종이의 우둘투둘한 면을 손으로 쓰다듬던 주정재는 흐릿한 정신속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권현석의 유언 일부를 떠올려냈다.

부탁할게. 정재.

..나한테는 그런 말, 하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주정재는 걷잡을 수 없는 희열에 주먹을 꾹 쥐었다.

부탁받은 놈, 정은창의 생사는 정확히 확인하지 못 했다. 얼추 대체할 시체로 말을 꾸밀 것이라고는 들었다. 살아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강도 건넜겠다, 칼을 심었준 대가로 찾아내서 처리해야 마땅했고 죽었다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운이 좋아 살아있다 한들 정은창은 권현석이 부탁한 것을 이뤄줄 처지가 안 됐다. 박근태는 유언을 전해듣는다 한들 신경을 쓰기나 할까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권현석의 유언을 당장, 확실하게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주정재밖에 없었다.

뼈를 깎는 듯한 아픔과 후회, 자신만이 권현석의 유지를 대행할 것이라는 일그러진 짜릿함이 진흙처럼 엉기는 순간이었다.

수첩을 갈무리한 주정재는 권현석의 딸의 소재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미안해."

주정재는 눈물을 훔치듯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가 곧 예전에 사 두었던 선글라스를 두 동강 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앞을 향해 걸었다.

죽은 자를 닮은 겨울 태양이 답잖은 열기를 따갑게 내리며 파란 하늘에 떠 있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도시는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