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입하 立夏

성식은창, 김성식, 정은창.

봄이 저문다. 꽃이 지고 푸른 잎이 청명하다. 정은창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이 애석하다.

그의 옷장은 여전히 겨울이었고, 새로 맞이하는 이 계절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은창의 삶에 다시 여름이 찾아온다. 뜨겁고, 강한 태양의 열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는 그 계절. 벌써 숨이 막힌다.

더위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정은창은 깨달았다. 김성식 또한 평범한 사람이란 것을.

그의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사무실에선 반팔의 셔츠를 입고, 부채질을 하며 신경질을 내는 모습은 어느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땡볕 아래를 걸으면 땀을 흘리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최고 온도 갱신!' 따위의 문구를 보며 욕이란 욕을 구시렁거리는 것도 평범했다.

"정은창이."

한껏 더워진 날씨에 김성식은 언제나 목소리에 짜증이 실려있었다. 눈치껏 몸을 낮춰야 했다. 되묻거나 주저하지 않고 그의 앞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예, 형님."

"너는 임마, 지금 온도가 몇인데 아직도 가죽 껍데기를 걸치고 다녀?"

"아…."

갑작스런 말에 당황한 나머지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괜히 자신의 옷을 내려다본다. 확실히 계절에 맞지 않는 복장이긴 했다. 무안함에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김성식이 읽던 신문을 책상에 내려놨다.

"대답 안 해?"

"그…."

그동안 이야기 없다가 왜 하필. 그런 생각을 했다.

"… 여름옷을, 사러 갈 시간이 안 돼서."

"허, 그걸 말이라고… …."

김성식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멍청한 놈."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

날선 시선으로 정은창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김성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은창의 앞에 딱 하니 선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몇장을 그의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혀, 형님?"

"이걸로 지금 당장 옷 싹 갈아입고 와. 잔돈 남길 생각 말고 꽉 채워서. 알겠어?"

모른다고 하면 사람을 죽일만한 시선이었다. 납작했던 주머니가 과하게 두툼해졌다. 너무 많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대답은?"

"예…."

김성식은 한걸음 물러서서 정은창의 자켓을 손으로 툭 툭 쳤다. 오래 입고 관리하지 않은 터라 잔뜩 헤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손끝이 상냥치 않다.

"내 뒤에 설려면, 적어도 사람 새끼처럼 입고 다녀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김성식은 언제나 정은창에게 되묻는다. 그에게 답을 구하듯, 혹은 원하는 것을 끌어내듯. 또는 확인하듯. 무엇이든 간에 답은 정해져 있고 정은창이 해야 할 답은 오로지 하나다.

"예."

원치 않은 대답을 하고, 그것을 들은 김성식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정은창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 끝에 불을 붙인다.

"가봐. 오늘은 들어오지 않아도 되니까, 내일도 그 꼬라지면 뒈질 줄 알아."

김성식은 자리로 돌아갔다. 읽던 신문을 다시 펼쳐 들고, 정은창에게는 다시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은창은 묵직한 주머니의 무게에 불편함을 느끼며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아직 파랬고, 해는 중천이다.

무거운 걸음으로 밖을 향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전부 얇고, 짧은 옷차림이 대부분이었다. 그 속에서 정은창만이 아직도 겨울이었다. 주머니에 쑤셔놓은 돈을 전부 꺼냈다. 생각보다 더 큰 돈이었다. 한숨이 먼저 올라왔다.

봄은 왜 저물었을까. 여름은 왜 또 찾아오는 걸까. 날씨는 왜 따듯해지고 겨울은 끝나버린 걸까. 아직도 한 겨울 그 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시장을 돌아다니며 반팔을 몇 벌 구매하고, 바지도 얇은 걸 몇 벌 더 사면서 어딘가 속이 계속 불편하다. 울렁거리고 귀가 먹먹해지는 것은 더위 탓인가. 일렁이는 땅을 꾸역꾸역 밟으며 두 손이 무거워질 때쯤에도 돈은 한참 남아있었다.

정말, 이걸 다 쓰길 바랬을까.

비싼 옷을 구매하는 버릇이 없는 그에겐 이 이상의 지출은 쓸데없는 소비라고 생각했다. 물론 김성식은 그런 소비를 자랑스레 하곤 했지만, 정은창에겐 맞지 않은 옷이었다. 여전히 무거운 주머니를 뒤로하고 숙소로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옷장을 별로 채우지도 못한 옷들을 모두 꺼냈다. 낡고 헤진 겨울을 전부 꺼내고 여름을 하나씩 걸어두자 겨울의 두배로 옷장이 채워진다. 그 또한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입고 있던 옷도 벗어던지고 훨씬 얇은 셔츠와 바지를 챙겨 입고 거울 앞에 선 정은창은 아까부터 울렁거리던 속이 목 아래까지 올라옴을 느꼈다.

"욱…!"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었다. 변기를 한참 붙잡고 있어도 나오는 것은 위액 뿐이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어디서 왔는지 정은창은 그때야 깨닫는다.

살아있어봤자 쓸모도 없는 목숨을 가지고 여름까지 멀쩡하게 붙잡고 살아있는 자신에 대한 혐오였다.

아직도 끝내지 못한 복수가 목뒤로 걸린다. 거울 속 번득한 옷차림을 한 자신이 끊임없이 되묻는다. 어째서 왜 아직도 살아있냐고 되묻는다. 왜! 왜 살아 숨 쉬고 있냐고. 김성식이 왜 살아있도록 내버려 두고 있냐고. 그의 숨통을 끊지 않고 왜, 왜 새로운 계절을 또 맞이하고 있냐고.

너는 계속 겨울이어야 하고, 여름을 맞이해선 안 되는데. 네게서 여름이란 있어선 안 되는데 왜 이 계절을 준비하고 있냐고 정은창이 정은창에게 되묻는다.

아,

속이 울렁거린다. 삶에 대한 거부, 자신에 대한 혐오.

은서가 묻는다.

오빠, 나는 이제 여름을 볼 수 없는데 왜 오빠만 그래?

아니다. 은서는 그런 이야길 하던 아이가 아니다.

주머니를 가득 채웠던 더러운 돈의 무게가 이게 목에 매달린 그 아래에 또 달린다. 숨이 막힌다. 바닥을 긁고 머리를 내려쳐도 깨닫는다. 이것은 습관이다. 해결 되는 것 하나 없는.

김성식의 돈으로 채워진 옷장 문을 닫는다. 김성식 때문에 여전히 붙여놓은 목숨 줄. 새로운 계절이 싫다고 쉬이 끊어놓을 순 없다. 묶고, 또 묶어 버텨야 한다. 김성식에게 쉬운 죽음을 내려줄 순 없으며 그의 삶의 쉽게 끊어질 순 없다. 그의 잘못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열하고, 또 나열하여 죄를 벌하여야 한다. 계절이 몇번을 뒤바뀌더라도 그걸 위해 정은창은 살아야 했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는 더위에 강했다. 그러니 이번 여름도 버틸 수 있었다. 여름에 저물지 않기 위해 정은창은 차가운 물에 얼굴을 씻어내렸다.

여름이 저물고, 또 다시 찾아올 겨울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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