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두번째 단추

김성식 x 정은창; 동갑도시 / 단문

이제 봄이다. 봄이 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해가 뜬 낮엔 햇볕이 꽤 따스해졌다. 쌀쌀한 온도는 변치 않았지만 머지않아 두터운 겉옷을 입지 않아도 될 계절이 금방 찾아올 것이다. 봄은 겨울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 하곤 했으니까.

정은창은 빈 교실을 둘러봤다. 텅 빈 교실은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많은 것들이 빠져있었다. 책상의 서랍은 텅텅 비었고, 손에 잡히는대로 사물함을 막 열어도 아무것도 없었다. 뒤의 게시판엔 채 떼어내지 않은 안내문이나 학기 초에 꾸민다고 붙어둔 색색의 종이들이 남아있었다. 괜히 사물함들을 툭 툭 치며 칠판을 바라봤다.

판서 칠판은 졸업식(卒業式)이라는 글자가 단정하게 적혀있고 그 아래에 아이들이 적어놓은 글이 잔뜩 적혀있었다. 졸업하고도 연락하자, 3년간 고생했어, 또 만나자. 그런 사소한 문장들 속에서 익숙한 글씨체를 찾으려고 눈을 굴렸다. 그 녀석의 것은 없었다. 당연하지. 이런 거, 뭐 걔가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아쉬움을 애써 누르고 손에는 졸업장을 쥐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다시 들여다보는 교실은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정은창은 자신의 삶에서 학교란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졸업식도 마찬가지였다. 쥐고 있던 졸업장을 내려다봤다. 정은창이라고 또렷하게 적힌 글자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고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 녀석이 없었다면 이런 거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생각은 도돌이표 마냥 그 아이로 끝이 났다.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정은창의 발소리만 들렸다.

계단을 내려와, 중앙현관으로 나오자 이미 인파가 많이 빠져 썰렁한 교문이 보였다. 바닥엔 꽃다발에서 떨어졌을 법한 꽃잎들이 곳곳에 흩어져있었다. 찾는 사람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고, 괜히 교문에 기대 땅만 툭툭 치고 있으려니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은창!"

고개를 들자 낯익은 사람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었다.

"아직도 안 가고 뭐해. 졸업도 한 녀석이."

머쩍은 듯 정은창은 볼을 긁적였다.

"걔 기다려요."

"아, 성식이? 걔도 참 대단하다. 문학 선생님이 또 붙잡으셨지? 꽤 아껴 하셨으니까."

담임은 그렇게 이야기 하곤 정은창을 바라봤다. 시선의 끝은 그의 손에 쥐어진 졸업장이었다.

"어휴~ 난 네가 진짜 졸업 못할까 봐 걱정 많이 했는데 말이야."

"하하…."

"어때, 학교 계속 다니길 잘했지?"

정은창은 대답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려던 것을 말리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정은창의 사정을 알고 도와준 '어른'이기도 했다.

"이제 졸업하니까 하는 말이지만, 네가 그만둔다고 했을 때 김성식이 먼저 찾아왔었어. 반도 다른 녀석이, 어? 너 좀 말려달라고 하는데. 너 학교 그만두면 걔가 너 쥐어팰 것 같아서라도 말려야겠더라고."

농담인거 알지? 하고 웃는 목소리에도 정은창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 그 새끼 성질이라면…. 담임의 예상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졸업 축하한다. 은창아."

"감사합니다."

먼저 자리를 떠난 것은 담임이었다. 정은창은 다시 혼자가 되어 그를 기다렸다. 개미가 줄을 지어 기어간다. 하나, 둘, 셋, 넷. 그렇게 하나씩 세고 있을 때 즘에 시야에 낯익은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김성식이 있었다. 그의 품엔 화려한 꽃다발이 있었다.

"뭐야, 그건?"

"문학이 주던데."

김성식은 꽃다발을 정은창에게 넘겼다.

"이걸 왜 날 줘?"

"너 해."

"귀찮다고 날 주냐?"

"은서 주던가. 좋아하잖아, 꽃."

"그건, 그렇다만. 그럼 너는"

김성식은 정은창을 위아래로 훑었다. 손을 뻗어선 정은창의 자켓을 잡고 당겼다.

"뭐, 뭐야!"

"나는 이거면 돼."

헐렁하던 단추가 톡 하고 떨어졌다. 교복 자켓의 두 번째 단추가 김성식의 손에 있었다.

"뭐 가져가도 그런 걸... 네 교복에도 있는 거잖아."

"멍청한 놈."

"뭐?"

"책 좀 읽으라고."

김성식이 정은창을 두고 걸음을 옮겼다. 뭔데. 눈을 껌벅이던 정은창은 뒤늦게 그 뒤를 쫓았다. 두사람은 투닥거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 뒤로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같은 길이의 그림자는 천천히 길어졌다 짧아진다. 언젠가 다른 길로 가게 될 그림자가 지금만큼은 같은 길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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