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신뢰의거리

스왑/연반 준혁시백준혁 배준혁 양시백

: 배준혁x양시백, 스왑연반앤솔로지 수록했던 글

양시백 - 백석의 양성소 출신 히트맨. 연상. 일상을 선망하고 여전히 정이 많다.  

배준혁 - 흥신소 직원, 주로 뒷골목의 일을 하는 아이. 연하. 타인의 감정에 흥미를 가진 적이 없지만, 어쩐지 양시백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관심이 간다.

배준혁은 고개를 들었다. 펼쳐진 우산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여름의 한 가운데, 어제부터 시작된 장마는 세상을 고요하게 만들고 색색의 우산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나날이 높아진다던 기온은 한풀 꺾였지만 습해진 공기가 폐까지 찝찝하게 만들었다. 빗방울이 아스팔트 바닥에 부서지고 튀어 올라 바지 밑단을 적셔갔다.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다리는 더 무거워졌다. 배준혁이 서 있던 곳의 반대 가게에 점원이 그를 힐끔 쳐다보는 횟수가 늘었다. 그럴 법도 했다. 장마라고 해도 재난경보가 울려댈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그런 날 웬 남자가 빗속에서 몇 시간이고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신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하늘이 흐려 시간의 흐름 또한 제대로 짐작해 볼 수 없었으나 배준혁에게 있어서 그 사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그래서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그만뒀다.

그 뒤로도 시간이 흐르고, 눈이 뻑뻑해진 기분에 눈을 깜빡이고 있을 무렵, 기다리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배준혁씨.”

배준혁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해서 삐거덕거리는 몸의 아우성을 애써 무시했다. 은은한 담배 향이 맡아졌다. 배준혁은 담배 냄새에 대해서 썩 좋은 인상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그가 피우는 담배 향만큼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와 무척이나 닮은 향이었다.

“선생님.”

그를 부르는 음성이 단정했다. 조금 올라간 입꼬리는 누가 봐도 기쁨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금 전 까지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던 남자라고 제대로 매치하기 어려울 정도로 배준혁의 분위기가 남자의 등장으로 온순해졌다. 그런 느낌이었다.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호칭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 남자는 그에게 제 이름을 다시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양시백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이야기해도 황소고집인 저 이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쩌자고 이 빗속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으려고 하신 겁니까?”

질타의 목소리에 숨기려는 걱정이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배준혁은 눈을 굴리다가 우산을 기울였다. 고여 있던 빗물이 흘러 떨어졌다.

“기다린다고, 말씀을 드렸으니까요.”

숨김이라고는 없는 대답에 양시백의 얼굴이 구겨졌다.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 … ….”

양시백은 할 말을 잃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곤함이 올라왔다. 자신 앞에 있는 이 사내와 대화를 할 때면 자신이 말려 들어 가곤 했다. 어딘가 모르게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 같은 남자.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양시백에게 있어서 배준혁이라는 남자는.

몇 시간 전에도 그랬다.

아니, 며칠 전에도, 몇 달 전에도 그랬나. 양시백은 또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왠지 모르게 늙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이를 앞에 두고 더 늙어가는 기분이 드는 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도 고집을 더 피울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연장자라는 사실도 있지만, 이미 시야에 들어온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양시백이라는 사람의 인간성 탓도 있었다. 오랜 시간을 빗속에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있다 해도 언제 나올지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며 서 있던 이의 옷은 우산을 써도 막을 수 없는 비에 한껏 젖어있었고 머리카락도 엉망이다. 손이나, 얼굴에도 핏기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푸르게 변한 입술을 보고 양시백은 챙겨왔던 수건을 그에게 건넸다.

“일단 들어오세요. 이러다가 경찰 오겠네.”

힐끔 뒤를 보니 건너편의 가게 직원이 자신들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배준혁은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뒤쫓았다. 받아든 수건은 자신과 다르게 뽀송뽀송한 촉감이 부드러웠다. 이걸로 물기를 닦아내기 아까울 정도로.

“들어가도, 됩니까?”

“…안에서, 이야기해요.”

배준혁은 웃음을 지었다. 선의 안으로 뒤를 뒤쫓았다.

 

 백석의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구린 일을 했다. 깨끗하고 정의로운 기업이라는 간판 뒤로는 온갖 더럽고 추잡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배준혁은 그런 일을 대신 해 주는 사람이었고, 양시백은 그런 일로 사용되기 위해 키워진 사람이었다. 시작점부터 다른 두 사람은 모든 게 달랐다. 그런 사람 둘이 만났다.

그리고보면 그날도 금방 비가 쏟아질 것처럼 흐린 날이었다.

“…하?”

양시백은 현장에서 마주한 남자를, 배준혁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잔뜩 구겼다. 안 그래도 사나운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약속장소에 나타난 배준혁이, 너무 어려 보인 것이 이유였다. 자신의 파트너로 쓸 만한 이를 보낸다는 전달은 이미 진즉에 받았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린 이를 보낸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어린애와는 작업하지 않는다고, 분명 이야기했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배준혁입니다.”

양시백은 내민 손을 내려다봤다. 대꾸는 하지 않았다.

생채기도 별로 없는 매끈한 손이었다. 얇아 보였고, 유독 길어 보이는 손가락은 누가 봐도 펜쟁이의 손이었다. 우습게라도 칼질 노름했다는 놈들의 손에 비하면 말끔해 보였고, 손가락 특정 부분에 박힌 굳은살은 펜을 오래 잡아 생긴 것이었다. 중지만 옆으로 휜 그 손을 보고 양시백은 배준혁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보다 키는 크나 체격이 다부진 이는 아니었으나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목의 뼈대가 굵었다. 옷 아래로 감춰진 뼈대에까지 생각에 이르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가요.”

양시백은 관찰을 거기까지 하고 몸을 돌렸다. 배준혁이 내민 손을 보기만 보고, 그대로 무시한 것이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 이와 굳이 악수 따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네, 그럽시다.”

배준혁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두었다. 그 과정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악수를 위해 손을 내민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밀었던 호의가 머쓱할 법도 한데 그런 낯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동빛의 눈동자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는 양시백의 뒤를 쫓다가 더 멀어지기 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배준혁은 자신을 경계하는 짐승에게 적당한 거리를 가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양시백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눈으로 재며 뒤를 따랐다.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배준혁은 불과 몇 분전의 일임에도 회상하고야 말았다. 자신을 보자마자 구겨졌던 얼굴,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 억양. 낯선 이를 훑어보던 경계 어린 시선. 결국 아직도 이름 하나 듣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간략하게 들은 게 있었다.

 양시백, 백석의 말.

 그렇게 유명한 이는 아니고, 백석과 관련된 일에 하나 정도 엮인 말에 불가하다고 했다. 사납게 생겨선, 사람과 교류를 하려는 낌새도 없이 자신의 할 일만 하고 사라져버린다고 씹어대던 이를 떠올렸다. 별로 친해져서 좋을 게 없을걸. 마치 자신이 하는 일은 깨끗하다고 구는 그게 진짜 밥맛 떨어진다니까.

지가 무슨 양반이야?

낯익다고 하기 뭐한 단어를 듣고 양시백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만난 양시백은, 신기할 정도로 온 감정이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과 다르게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며 산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공감할 수 없을 뿐,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생각을 뒤로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중요하게 생각할 부분은 아니었다. 당장은 이 경계심 많은 짐승의 벽을 조금이라도 허물어야 했으니까. 라고 생각 했던 것도 잠시.

‘그런 고민이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군.’

손목이 욱신거렸다. 흉기 따위를 들고 오지도 않았고, 사전에 현장에 있는 것만을 사용하기로 이야기했던 터라 배준혁은 눈에 보이는 칼을 쥐었다. 칼을 고른 까닭은 익숙해서도, 편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흉기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썩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을 몇 번을 쥐어도 어딘가 어색하다고 느끼며 이리저리 고쳐 쥐다 결국 아무렇게 잡고 칼을 휘둘렀다. 고기를 자르는 것과 사람을 자르는 감각은 당연히 달라야 한다. 그게 배준혁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지는 칼은 날카로운 금속음을 흘리며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피가 튀어 지저분해진 손을 털며 눈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기 때문에 손을 뻗어 근방 근처에 있던 것을 둔기 삼아 휘둘러 숨을 돌렸지만 거친 숨소리와 둔탁한 소리가 이어지던 복도에서 금속음은 유독 크게 들릴 수밖에 없었겠지. 아까부터 뒤통수가 따가웠다. 한숨을 푹 쉬며 휘두른 둔기를 놓고 다시 칼을 주웠다. 어쩐지 손목이 더 뻐근해지는 것 같아 만지고 있을 무렵, 근처에서 사납게 노려보기만 하던 양시백이 배준혁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강하게 쥐니까 칼을 놓치지. 손목 나가요.”

말하는 이도 스스로 어색하다고 느낄 만큼 서툰 억양이었다. 양시백의 손이 배준혁의 손 위를 덮듯이 겹쳤다. 배준혁은 자신의 손 위의 온기를 바라봤다. 거친 손이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움직였다. 따듯하다. 배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묘하게 힘이 들어갔던 부분이 서서히 긴장을 풀 듯, 아까보다 조금 더 느슨하게 칼을 쥐었다. 양시백은 그제야 손을 뗐다. 손에 닿는 것은 금속 따위임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는 온기에 정신이 팔렸다. 배준혁은 그의 눈에서 감정의 조각을 읽었다. 이것은 걱정이라고 알고 있었다. 낯설다. 어색하다. 왠지 더는 칼을 놓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쓸었다.

“다 끝냈나요, 준혁씨.”

사정없이 구겨진 얼굴로 양시백은 그를 바라봤다. 이런 일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양시백은 잠깐의 허비 없이 주변을 정리해나갔다. 배준혁은, …감탄했다. 일말의 자비도 없이 숨을 꺼트리는 모습은 진득한 인간의 감정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전혀 아닌 척 하면서 막상 세워놓은 벽 너머로 감정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배준혁은 그의 감정을 곱씹었다. 후회? 안타까움, 혐오. 무엇을 향하는 감정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끝없이 바닥을 더럽힐 정도로 지저분한, 가라앉는 것들. 만약 이게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라면 조금 안타까울 거라고 배준혁은 생각했다. 

동시에 본인을 향한 감정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한없이 깊은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숨어있지 않고 피어오른다. 배준혁이 양시백에게 의문이 많았다. 문득 사람의 목에 꽂힌 칼을 바라봤다. 조금 전 까지 자신이 들고 있던 칼이었고, 그가 내어달라고 하여 내어준 칼이었다. 저렇게 쉽게 사람의 목을 뚫을 정도로 날카롭던 칼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야 만다.

“선생님.”

가만히 있던 배준혁의 입에서 단정한 불음이 이어졌다. 그의 시선이 의아함으로 물들고는 주변을 한번 훑었다. ‘선생님’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 사진 등을 찾는 듯한 행동이었다. 자신을 향한 불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리 불릴 만한 것이 주변에 없는 것을 알고 저요? 하고 되물으려는 찰나, 배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라고, 불러도 됩니까?”

양시백은 잠깐 텀을 두고 대답했다.

“아니요.”

당연하게도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제가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

양시백은 이때 처음으로 배준혁이라는 사내의 고집스러운 면을 보았다. 더 구겨지지 않을 것 같던 얼굴이 더 왕창 구겨졌다. 무덤덤한 배준혁의 표정이 절대 무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황당하기도 했다.

“저는 그런 호칭으로, 불릴 사람이 아니에요.”

어떻게 자신이 감히 선생님이라고 불리나. 제대로 선생님이라는 사람의 밑에서 있었던 적도 없었거니 선생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보살피는 존재라 들었다. 양시백은 자신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결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자신의 앞에 있는 이가 훨씬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삐거덕거리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겉모습은 이렇게 번듯하지 않은가.

“이미 제게 가르쳐주셨잖습니까. 칼 쥐는 법을.”

그런 양시백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배준혁이 대답했다. 낙엽 빛의 눈동자가 피로 얼룩진 칼로 향했다. 양 시백은 이걸 가르쳐줬다고 선생님이라 불릴 정도면 이 바닥 판은 다 선생님이지 않겠나. 여러 생각이 몰려왔지만 피곤함이 몰려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제대로 이야기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포기의 선언이자 허락의 언어였다. 배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네, 선생님. 하고 대답하는 음성이 무척이나 단정했다. 양시백은 시계를 보았고, 배준혁도 벽에 달린 시계로 옮겼다. 시곗바늘이 열심히 움직이고 예정된 시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장을 벗어나야 할 때였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고 들어왔을 때와 다르게 더 조용히, 조심스럽게 둘은 흔적을 지우며 밖으로 향했다. 볼일은 끝났다.

“…….”

밖은 여전히 밤이었고, 새벽이었다. 어둡고 검었던 하늘이 조금 밝아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고, 폐에 차오르는 공기가 상쾌했다. 새벽이기에 맡을 수 있는 그 가라앉은 공기. 약간의 서늘함과 같이 오는 그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길을 걸으며 두사람은 말이 없었다. 일정한 걸음 소리가 제일 큰 소리였다. 몇 없는 가로등이 몇 번이고 깜빡이다가 환하게 빛을 낸다. 그림자가 흐려졌다가 선명해진다.

“아.”

양시백이 걸음을 멈췄다.

배준혁이 따라 멈추며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양시백은 맞은편에 불이 켜진 편의점을 보고 있었다. 24시 편의점인지 골목길에서 제일 환하게 간판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저는 편의점 들렀다 가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배준혁씨.”

“편의점, 말입니까.”

마침 저도 살 게 있어서, 같이 들렀다가 가죠. 이제 당연히 헤어질 줄 알았던 양시백은 움찔하더니 썩 내키지 않은 어조로 긍정의 대답을 내뱉었다. 그의 오른손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불편함을 완전히 드러내는 그의 모습이 그대로 배준혁의 시야에 담겼다. 느리게 움직이던 두사람의 걸음은 결국 헤어지지 않고 편의점을 향했다. 유리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들렸고 졸았던 모양인지 한 박자 늦게 직원의 인사 소리가 이어졌다. 어서 오세요. 목소리에 졸음과 피곤함이 노골적으로 묻어있다. 양시백은 즉석식품 코너 쪽으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배준혁은 천천히 편의점 내부를 훑어봤다.

…사실, 사려던 것 따위 없었다.

배준혁은 편의점 이용 자체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급하게 무언가를 사야 하는 때도 없었고, 그에게 있어서 편의점은 그저 길에 무수히 많이 분포되어있는 편의시설이었다. 그런 그가 굳이 거짓말 따위를 하면서 편의점까지 온 이유는 하나였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런 표현이 제일 맞을 거라고 배준혁은 생각했다. 아쉬워? 하고 의문이 따라붙긴 했지만 느끼는 감정은 분명 아쉬움이었다. 

양시백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만약 드러내는 감정에 색이 있다면 양시백의 감정들은 분명 밝고 강렬한 색임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표현을 표정, 어투, 행동에 그대로 드러냈다.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 감정들은 그야말로 원색이었다. 감추지 않으려고 해서 드러나는 게 아닌, 감추지는 법을 모르기에 드러난 감정들은 그 어떠한 것들보다 맑고, 투명했다. 배준혁은 자신에 대한 결여를 알고 있었고 남들과 자신 사이의 괴리감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동시에 알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적 반응은 언제나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양시백은 왠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저 풍부한 감정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자신의 행동에 돌아올 다른 감정을 보고 싶었다. 

어떻게 웃을까, 어떻게 울지? 저 얼굴을 어떻게 일그러트리고, 색을 칠해낼까. 한 번도 가진 적 없던 감정은 썰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냉장고에서 음료를 고르는 그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녹 빛이 느리게 움직였다. 배준혁은 아직 깨닫지 못한 자신의 감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뭐 살 거 있다고 했었잖아요, 없었어요?”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주전부리를 내려놓으며 양시백은 제 앞에 선 배준혁을 바라봤다. 라면이랑 음료수랑 이것저것 바구니에 담을 동안 멀뚱히 서 있더니 결국 빈손으로 제 옆에 서던 그의 행동은 의아하기만 했다.

“찾아보니 없더군요. 어쩔 수 없죠. 급한 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양시백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사지 않아 빈 그의 손을 바라보다 뜯지 않은 과자를 흔들었다.

“이거라도,”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배준혁의 시선이 유독 자신의 얼굴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뭐 묻었나 싶어서 양시백은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의자에 앉았다. 안줏거리로 산 오징어를 뜯으며 아직도 서 있는 그를 힐끔댔다.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던 그가 불편했다. 앉던가 가던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어디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배준혁의 주머니에서 나는 소리였다. 길게 이어지는 거 보니 문자는 아니고, 전화인 거 같았다.

“…이런, 아무래도 저 먼저 실례해야겠군요.”

“아, 예. 뭐…, 조심히 들어가세요.”

휴대폰 화면을 보던 배준혁은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양시백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편의점 앞에서 헤어지려고 했던 게 좀 길어졌을 뿐이었다. 배준혁은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뵙겠습니다. …선생님.”

배준혁은 깔끔하게 인사를 하곤 멀어져갔다.

그 뒤를 바라보던 양시백은 생각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아.

 그리 생각하고 날이 바뀐 며칠 뒤.

“어째서, ….”

양시백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빈 테이블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있었다는 걸 이야기하듯 두 사람분의 유리잔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깔끔하게 비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한 모금 겨우 마셨나 싶을 정도로 음료가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 양시백의 컵이었다.

“아 맞아, 형씨. 요새 조심히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거 별 건 아닌데 그쪽을 찾는다는 이가 있어. 알 놈들은 잔잔하게 알고 있을 정도로 이곳저곳 헤집고 다닌다나 봐. 영 구린 놈들부터 해서 백석 끄나풀 놈들은 다 찔러보니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지.”

꺼림직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취를 옮길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꼬리를 내미는 꼴이었다. 어차피 이곳을 아는 놈은, 빡빡이나 칼잡이 꼬맹이밖에 없었다. 주위에도 준 것이 빡빡이 그놈이니까 한동안 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블라인드를 내렸다. 뜨겁게 내리쬐던 햇볕이 가려지고 서늘한 그늘이 내려앉았다. 양시백은 조용히 휴대폰 전원을 껐다. 숨어지내야 할 때였다.

“젠장, ….”

자신을 찾는 이가 있다. 그 뒤에 붙는 이야기는 좋을 수 없다. 뒤 구린 이들을 찾는 놈들이라고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반대로 이야기 하면 좋은 일로 만날 사람이 없는 것 뿐이었다. 짭새나, 웬수 놈들이야 자신 같은 놈을 찾아주지 그도 아닌 이들이 자신을 찾을 리가 없다. 없지. 훈련소 출신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직업 훈련소, 버린 말로 쓰기 위한 놈들을 키우기 위한 훈련소. 백석의 버린 말의 집합소. 그 속에 섞여 있던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양시백이었다. 지긋지긋한 삶이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곳이었다. 바로 방금 전까지 같이 밥을 먹던 친구를 찌르고, 지난 밤 같은 방에서 자던 친구를 찌르고, 다친 상처를 치료해주던 아이를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그러지 못하면 죽는 것은 자신. 총을 쏘다 어깨가 나가도 이로 칼을 물고 휘두를 줄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던 곳.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하루가 이어지고 도망이라도 치려고 하면 바로 코앞에서 붙잡혀 몇 날 며칠을 맞고, 또 맞고, 죽도록 맞고 굴복할 수밖에 없던 삶. 

그 삶에서 결국 버티고 살아남아 백석이 던져주는 일거리라면 무슨 짓이든 했다. 졸업 따위를 하고 얻은 것은 이름이었다. 숫자의 나열을 버리고, 양시백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여전히 백석이 시키는 일이라면 하는 개새끼지만, 양시백은 자신의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살아있고, 이름이 있고. …이 정도면.

“그러니까 잃을 수 없어.”

중얼거리듯 내뱉어지는 말은 한숨과도 같았다. 양시백은 블라인드 사이를 벌려 밖을 바라봤다. 도시라고 불리기엔 조금 많이 한적하고, 낮은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낡은 건물들이 많았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썩 많이 보이진 않았다. 확실한 건,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 평화.

평화로웠다. 이 동네는 평화로웠다. 바닥질 하면서 손에 쥐여주는 몇 푼의 돈을 모으고 모아 거처를 구했다. 이곳은 양시백의 꿈이고, 바램이었다. 지긋지긋한 삶 속에서 그가 진정으로 바라는, 평화.

“어이고, 태권도장 윗집 청년 아녀.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와! 또 라면만 먹고 있는 거 아니여? 으이구, 사양허지 말고, 어여 이거 챙겨가!”

작은 슈퍼의 아주머니가 양시백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며 검은 봉다리를 그의 손에 쥐여줬다. 슈퍼에서 팔만한 것들이 아닌, 반찬 통에 담긴 먹거리였다. 평상에 앉아 부채질하던 영감님이 혀를 찼다.

“뭐 먹고 싶음 언제든 저기, 저 와. 사람이 밥을 먹고 댕겨야지. 비쩍 말라서 사내놈이 우얄라고. 하여간 젊은 놈들은….”

양시백은 마르지 않았다. 영감님의 눈엔 다른 듯했다. 부채로 건너편 가게를 가리키던 영감님은 다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건너편 가게는 영감님의 자식들이 하는 작은 식당이었다. 양시백은 이 거리를 걷는 게 좋았다. 자라며 느끼지 못했던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동네였다. 좋은 사람만 있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다정한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가 그를 태권도장 윗집 청년이라 부르곤 했다. 양시백이 지내는 방이 그 윗집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양시백은 이 곳에서 계속 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과거를 버리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

 비가 올 듯 말 듯, 먹구름만 가득 낀 밤이었다. 장마가 시작 될 것처럼 온종일 날이 흐려 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혀를 차며 관절을 만지고 허리를 두드리던 날이었다. 양시백이 일을 받지 않고 잠적을 탄 지 두어 달이 지난날이었다. 양시백은 창가에 앉아 보이지 않는 달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잠이 들 시간일 법도 한데 움직임이 줄어든 만큼 피곤함이 없어 잠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무방비하게 앉아있던 양시백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훑으며 흉기로 쥘 만한 것을 살폈다. 그의 시야에 과일을 깎다 내버려 둔 과도가 들어왔다. 이걸로 해결이 될 상대일까. 그러한 생각 따위를 하면서도 이미 손은 과도를 쥐고 있었다.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잠시 멎은 상태였다. 양시백은 조용히 문으로 향했다. 누구지? 자신을 해하려는 목적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은밀하게 들어와 제 목을 노렸어야 했다. 불투명한 유리에 사람의 그림자가 그대로 비쳤다.

“선,…….”

목소리가 들렸다.

“…….”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선생, 님. …….”

도와주세요.

양시백은 기억 저 멀리 묻어뒀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손에 쥔 과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숨을 골랐다. 반대 손으로 천천히 문을 열었다. 기름칠하지 않아 나는 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다. 날이 밝는 대로 손을 봐야겠다고, 평소에 신경 쓰지도 않았던 점을 굳이 생각하고야 만다. 열린 문 사이로 그를 반기는 것은 피비린내였다. 기분 나쁘고 습한 것이 양시백의 발목을 잡았다. 틈새로 주변을 살폈다. 꼼꼼하게 살필 필요도 없었다.

“─배준혁씨!”

양시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벽에 누군가 기대어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낙엽 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배준혁. 고집스럽게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던 그 이의 이름은 그랬다. 그러나 양시백이 기억하던 그와는 상태가 많이 달랐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엉망이었고, 온 몸이 먼지투성이에, …바닥에 고여 있는 피라던가. 양시백은 과도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빈손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고 이내 과도는 다시 테이블 위로 돌아갔다.

“이봐요, 배준혁씨. 정신 있어요?”

“…….”

아이씨…. 대답은 없었다.

숨이 멎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양시백은 한숨을 푹 쉬며 몸을 숙였다. 몸에 꽂고 있는 금속 따위가 없는 것을 확인 하고 나서야 손을 뻗어 배준혁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가볍지 않을 무게임에도 불구하고 거뜬히 들어 올린 양시백은 곧 그를 자신의 침대 위로 눕혔다. 깨끗한 이불이 먼지와 피로 더럽혀졌다.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어떻게 여기를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집 앞에서 비명횡사할 생각 하지 마세요. 양시백은 이를 악물고 거추장스러운 그의 옷가지를 벗겨냈다. 넝마가 된 옷을 바닥 구석에 던져두고 깨끗한 수건에 물을 묻혀 먼지를 닦아냈다. 소독약으로 한 번 더 닦아 낸 뒤에야 몇 번 꺼낸 적 없는 구급상자를 꺼내 그의 상처를 살폈다. 세심하다고 할 수 없는 손길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새벽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고 달은 천천히 기울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을 때는 새벽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시각이 되었다. 한껏 지친 양시백은 아까에 비하면 고르게 숨을 내쉬는 배준혁을 바라보다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설마 눈을 뜨고 나면 도망가고 없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몰려오는 잠의 수마에 빠져들었다.

너무 깊게 잠들었다.

양시백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눈을 번쩍 떴다. 팔다리가 허공을 휘젓다가 시야에 환해진 주변이 들어왔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스했다. 잠에서 덜 깬 상태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라 벽에 등을 부딪쳤다.

“…배준혁씨.”

깨어난 그와 그대로 눈이 마주쳐 깜짝 놀란 것이다. 누워있거나 비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침대에, 그가 상체를 반쯤 일으켜 침대의 머리 판에 등을 기대고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 했던 양시백은 놀란 것이 머쓱한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선생님.”

가라앉은 목소리. 양시백은 삐거덕거리는 몸을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히 다가가 배준혁을 시야로 살폈다.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진 않고, 얼굴은 핼쑥하지만 피를 그렇게 흘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크게 나빠진 것이 없어 보여 안심을 하고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배준혁은 아무 말 않고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뭐라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양시백이 생각하는 순간, 먼저 입을 연 것은 배준혁이엇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는 양시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찾아올 예정이 아니었는데. ……생각나는 사람이 선생님 밖에 없었습니다. 저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저는 늘 선생님께 도움만 받는 군요. 그렇게 덧붙이는 배준혁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의 손이 붕대 위를 맴돌았다. 양시백이 끙끙거리면서 치료해 놓은 부분이었다.

“여긴, 어떻게 아셨어요.”

물어볼 게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목 안에서 맴돌다 결국 내뱉은 것은 하나의 물음이었다. 양시백은 자신이 한 명의 사람에게 이렇게 약해질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의 표정 때문인가? 힘없이 말을 내뱉는 그에게 도저히 몰아치듯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여길 알게 된 건 정말,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물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만, 그날 이후 선생님을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선생님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이 하나도 없더군요. 수소문을 해봤지만, 선생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이 동네에서 선생님을 먼치에서 보고, 이곳에서 지내고 계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가 아니라…….”

제대로 준비해서,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배준혁의 말은 느렸고 동시에 확실히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말을 끝맺을 즘에는 양시백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또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양시백은 그의 말에서 하나를 알 수 있었다. 빡빡이가 자신에게 언질 줬던 경고. 누군가 자신을 찾는다는 당사자가 앞에 앉아있는 배준혁이라는 것을. 허탈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진작 알았다면 그동안 그렇게 조심히, 예민하게 지낼 필요가 없었을 텐데. 하는 감정과 그래도 큰일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감정이었다.

“그쪽이 왜 저를, 아니 그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 좀 안 하시면…….”

표정에 불편함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적혀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했다. 그의 불음엔 묵직한 무게가 있었다. 선생님이라 부르는 목소리는 어딘가 간지러웠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저를 두 번이나 도와주신 분인걸요. 제겐 은인과 다름없습니다.”

“두 번?”

배준혁은 손을 뻗어 양시백의 손 위로 겹쳤다. 햇볕에 탄 피부 위로 겹친 손이 유독 하얘 보였다. 배준혁의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였다.

“그때 선생님께서 제게 칼을.”

마치 양시백이 그날, 배준혁의 손을 고쳐 잡아주었던 것처럼.

“쥐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죽었을 테니까요.”

그날 이던, 아니던.

양시백은 입을 다물었다. 떨쳐내듯 손을 빼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뒤를 돌았다.

“됐고, 괜찮아지면 바로 나가요.”

목소리에 찬바람이 분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뒤돈 그의 귀 끝이 조금은 붉어진 것 같아, 배준혁은 그를 가만 바라봤다. 배준혁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방을 나선 그의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크게 났다. 방에 혼자남은 배준혁은 제 손을 바라봤다.

“매정하시군요.”

아무도 듣지 못 할 말이 허공에 맴돌았다. 이곳저곳에서 양시백의 향이 났다. 어쩐지 햇살과도 같은 포근함.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다정한 공기가, 이 집에는 가득 넘실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대답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굳이 단어를 내뱉어 봤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호칭이라고 그렇게 불리기가 싫어하는지, 배준혁은 알 수 없었지만 그런 그의 모습도 꽤 감정적이라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며칠 뒤.

배준혁은 한결 나아진 몸으로 그의 집을 나섰다. 현관에서 양시백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고 싶지 않다는, 그런 감정을 낯설게 느끼며 양시백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뵙겠습니다. 양시백은 대놓고 질색은 못 하고 빨리 가라고 손짓을 해 보일 뿐이었다. 이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왜 또 왔어요?”

새 수건을 몇 장이고 배준혁에게 쥐여줬다. 뚝뚝 흐르는 빗물에 바닥에 한 장, 머리 위쪽으로 한 장, 손에 한 장. 그러고도 부족해 보여 양시백은 한숨을 푹 쉬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습관처럼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던 양시백의 귓가에 들려온 것은 단정한 불음이었다. ‘선생님.’ 그것만으로도 문밖에 누가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양시백은 한숨을 푹 쉬고는 집에 없는 척 아무런 대꾸도 소리도 내지 않았다. 두어번 노크를 하던 배준혁은 여전히 단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1층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바깥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거셌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양시백은 한숨을 푹 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곧 검은 우산이 보였다. 시커먼 우산 아래 그의 베이지색 코트가 보였다. 금방 가겠지. 그런 생각으로 그렇게 밖을 바라봤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우산은 그 자리 그대로였다. 결국 양시백은 수건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걸음은 무거운 걸음이었다.

양시백은 물기를 닦아내는 배준혁을 바라보다 부엌으로 향했다. 내려가기 전에 올려두었던 주전자는 어느새 끊어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불을 끄고 머그잔에 물을 부었다. 따듯한 김이 솟아 올라왔다.

“…드세요.”

녹차 티백이 컵 옆에 걸려있었다. 배준혁은 수건을 팔 위로 걸치며 컵을 받아들였다. 한 모금 마시니 차갑게 식었던 몸이 한결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목부터 시작해서 온기가 퍼져나갔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뭘요. 배준혁씨가 입을 옷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잠시만 기다려요. 거기 가만히 계세요.”

몇 번이고 당부하던 양시백은 금방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발밑으로 젖어가는 수건을 두고 움직이지 못한 채 배준혁은 차를 홀짝였다. 그의 날 선 경계가 조금씩 뭉개지기 시작했다. 배준혁을 향한 양시백의 경계가 한 꺼풀 얇아졌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신을 거리낌 없이 자신의 공간에 들여보낸 것도 모자라 내보이는 친절은, 호의였고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이 향하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은 생전 느끼지 못한 만족감을 가지게 해주었다. 손에서부터 몸 전체로 퍼져가는 온기는 기분이 좋았다. 양시백의 집은 그 주인과 닮아있어 조금 어수선하지만 온기가 곳곳에 퍼져있는 집이었다.

“이건, 좀 크려나.”

양시백은 안 입는 옷을 들며 배준혁의 체격을 떠올렸다. 저번에 들어 올렸을 때나 서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상대적으로 얇았다. 상처를 입고 제집에 들어왔을 때도 옷을 갈아입혔을 때도 꽤 폼이 넉넉했던 걸로 기억했다. 그래도 꼴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니까 괜찮…겠지. 옷장 안에 듬성듬성 채워진 옷 중에서 그나마 깔끔한 옷을 꺼내 들었다. 정말 귀찮은 사람이었다. 배준혁은. 동시에 이상한 사람이었다. 양시백은 사이를 봤다.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딘가 어긋난 그의 선을 볼 수 있었다. 가만 보고 있으면 보통이라는 범주와 조금 다른 그의 행동과 어조가 그를 알 수 있게 했다. 부족하다는 단어와는 차이가 있는 배준혁이라는 사람. 나쁜 사람인가, 라는 부분에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해를 끼칠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양시백의 감각이 이야기했다. 그래서 더 갈팡질팡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사이즈가 괜찮을지 모르겠네, 저쪽에 욕실 있어요. 거기서 갈아입고 나오면 돼요. 다 쓴 수건은 주세요. 아, 컵도.”

배준혁은 양시백이 주는 것을 얌전히 받아서 들고, 들고 있던 것을 얌전히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번에도 폐를 끼치는군요.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던 그는 양시백이 가리켰던 욕실로 조심히 걸음을 움직였다. 다 닦아 내진 물방울이 한둘씩 그 걸음 뒤로 떨어졌다. 욕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서야 양시백은 바닥에 널브러진 수건을 줍고 주변을 정리했다. 정리할 것도 별로 없었다.

비가 지겹도록 내렸다. 창문 밖은 여전히 눅눅했고, 오히려 빗줄기가 더 굵어진 것 같았다. 양시백은 자신이 뭘 하면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배준혁에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하지만 막상 물으려고 생각하니 제대로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묻고 싶은 것은,

왜 나에게 자꾸 다가오려고 하는가.

양시백은 사람을 밀어낼 줄 몰랐다.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밀어내본 적도 없었다. 사람 간의 관계를 제대로 쌓는 법도 몰랐다. 그래서 배준혁이 자신에게 행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늘 혼자였던 사람이기에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따듯한 김이 올라오던 컵은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내용물을 버리고 새로 물을 끓이는 것보다 양시백은 보일러를 키기로 했다. 공기는 느리게 따듯해질 터였다.

“옷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욕실 문이 다시 열렸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그는 평소와 무척 달라 보였다. 무엇보다 양시백이 입는 캐주얼한-옷을 입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순식간에 둥그레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낙엽색을 주로 입던 이가 검은 옷을 입고 있으려니 한결 차분해 보이고 더 어려 보이기도 했다. 흐트러진 머리도 한몫했다. 반듯하고 단정하게 입던 사람이 편하게 입고 있으려니 이것도 보기 좋았다.

보, 보기 좋다니.

양시백은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를 배준혁이 의아하게 보지만 양시백은 눈치채지 못했다. 편해진 분위기로 배준혁은 양시백의 앞에 앉았다.

“옷, 사이즈는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보기에 괜찮습니까? 이런 옷을 잘 입지 않아서 조금 어색하군요.”

배준혁이 목덜미를 쓸었다. 왠지 집에서도 슈트 차림으로 있을 것 같은 이미지긴 했다. 양시백은 그 모습을 상상하다 짧게 웃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에요. 느닷없이.”

상처를 입고 들이닥쳤던 날로 일주일이 조금 지났다. 양시백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자신의 집에 올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는 그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음에 또 뵙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에….”

“무엇보다 선생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뭐어…. 예? 에? 양시백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날 그렇게 도와주신 것에 대한 보답도 못 해 드렸고, 근처에 올 일이 있어서 선생님이 생각나 무턱대고 찾아와버렸군요.”

배준혁은 근처에 올 일 따위 없었다. 순전히 양시백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였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면 부담스러워할 그를 알기 때문에 내뱉는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전부 거짓말도 아니니 괜찮지 않나. 배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보답은, 괜찮습니다. 뭐…. 그런 걸 바라고 한 일도 아니고.”

“혹시 제가 필요한 일은 없으십니까. 선생님의 옆에서 돕게 해주십시오. 선생님.”

선생님, 그렇게 부르는 어조가 유독 부드럽다고 느껴졌다. 양시백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곧은 눈동자가 양시백을 향했다.

“제가 누군가의 손이 필요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어딘가 쓸모 있을 겁니다. 이래 보여도.”

“어째서 배준혁씨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죠?”

양시백이 이해하지 못한 어조로 물었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선의도, 말하는 의미도. 자신이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횟수로 치면 겨우 세 번째 만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배준혁은 이렇게 다가왔다. 자신의 곁에서 돕게 해달라고 한다. 그것에 어떠한 의미가 있기에?

“선생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습니다.”

배준혁은 그렇게 대답했다. 더 알고 싶었다. 양시백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사람의 감정을 버리지 않은 채, 이 일을 하는 당신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고 그것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양시백의 감정이 궁금했고, 그다음으로는 양시백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졌다.

“왜 라면 밖에 없습니까.”

하지만 이런 걸 알고 싶진 않았는데.

양시백이 시선을 피했다. 찬장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내뱉은 배준혁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가라앉아있는 착각이 들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양시백은 자신도 모르게 앉아있던 자세가 공손해졌다. 배준혁은 집 어디를 봐도 라면 외의 제대로 된 음식 재료를 찾아볼 수 없는 것에 뭐라고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예, 예?”

딴청을 피워보지만 배준혁의 날선 시선마저 피할 수 없었다. 라면만 있는 게 뭐가 그리 문제라고, …. 그렇게 불만을 떠올려보지만 생각은 금방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탁! 찬장이 닫히는 소리가 매서웠다. 이어진 배준혁의 한숨 소리가 주변 온도를 더 낮게 만들었다. 양시백은 억울했다. 뜬금없이 배준혁 그가 양시백의 부엌을 뒤적거리고 있는 상황에 큰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직설적으로 자신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그의 말에 양시백은 어물쩍거리며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피했다. 그러곤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부담스럽다는 걸 써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수선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은 시계였고, 시간은 우연하게도 저녁을 앞두고 있었다. “이제 슬슬 저녁 준비해야겠네요.”라는 말로 둘러서 이 자리를 끝내자고 이야기하는 양시백에게 배준혁은 뻔뻔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양시백이 기대하는 말은 그게 아니었다. 실례했습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런 예의 바르고 곧바른 말이 당연히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배준혁은 말릴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을 향해 휙휙 걸어갔다. 막상 냉장고를 열어보니 순 생수통뿐이었고, 찬장에는 라면. 아래에는 깡통 햄 따위가 그를 반겼다. ……배준혁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잠깐 앞에 다녀오겠습니다.”

“예, 에?”

양시백이 눈을 껌뻑이며 배준혁을 쫓았다. 어느새 배준혁은 겉옷을 걸치고 지갑을 챙기고 있었다. 지갑을 쥔 손의 반대는 우산을 잡았다.

“장을 봐야 뭔가를 먹지 않겠습니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양시백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뒤를 시선으로 쫓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내뱉지 못해 다녀오세요, 라는 말이 흐리게 이어졌다. 배준혁은 빠르게 나섰고, 돌아오는 것은 조금 걸렸다. 양손 한가득도 부족하다 못해 슈퍼집 둘째 아들이 쌀 한 포대를 짊어지고 뒤에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어우, 이 정도로 뭘요. 그런 대화가 오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야, 시백씨에게 이렇게 훤칠한 지인이 있을 거라 생각도 못 했지 뭡니까! 갑자기 가게 안에 이 동네에는 있을 수 없는 미남분이 들어오셔서 어머니도 얼마나 놀라셨는지!”

시원한 웃음소리가 한참을 들렸다. 어머니가 이것도 전해드리래요. 하면서 언제나 쥐여주시는 반찬이 담긴 비닐을 바닥에 둔 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나갔다. 양시백은 멍하니 서 있었다.

“제가 냉장고에 넣어두겠습니다.”

배준혁은 비닐을 주워들었고 부엌으로 향했다.

“저, 저, 제가 하겠……!”

“괜찮습니다. 쉬고 계셔도 됩니다.”

양시백의 손이 허공을 저었다가 내려갔다. 집 주인과 손님의 입장이 정반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차마 편하게 있지도 못하고 그는 부엌의 끄트머리에서 눈을 굴리며 배준혁을 쫓았다. 소매를 걷은 배준혁은 잘 쓰지 않았던 밥솥을 꺼내 쌀을 씻고 밥을 안쳤다. 어디서 샀는지, 아니면 받은 건지 모를 커다란 통에 남은 쌀을 부어 정리하고는 비닐에 들어있는 것들도 하나씩 정리하는 모습이 꽤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양시백은 식탁에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통통통, 가벼운 칼질 소리가 도마를 두드렸다. 양시백은 자기 집에 도마가 있는 줄도 몰랐다. 경쾌한 소리가 이어지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는 소리, 물이 끓는 소리 등이 조용히 들렸다. 괜히 고개를 기웃거리던 양시백이 눈치를 봤다.

“도와 드릴까요……?”

“다 되어갑니다. 아니면 접시 좀 꺼내주시겠습니까.”

단정한 음성에 양시백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그릇은 괜찮았지만 다른 음식을 담을 여유 그릇이 없어 일회용 접시를 주섬주섬 꺼냈다. 수저도 마저 꺼내며 배준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잠깐 다녀오겠다고 나갔을 땐 화가 난 줄 알았다. 막상 장을 보고 돌아왔을 때 자신도 모르게 안도를 했다. 뒤늦게 그 감정에 당황했고 여전히 당황스러웠다. 멋대로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무뢰한이나 다름없는데.-물론 문은 양시백이 열어줬지만.-

양시백은 어정쩡한 감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모르겠다.’

차려진 음식은, 따듯하고 포근했다. 상다리가 휘어지겠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닐까 생각도 했다. 먹을 사람은 겨우 두 명인데 배준혁이 만든 반찬과 수퍼 아주머니께서 주신 반찬이 모두 올라가니까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었다. 찌개에, 고기반찬에, 나물 반찬에, 심지어 생선도 있고. 이런 식탁은 처음이었다.

“…잘 먹겠, 습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양시백은 쉬이 젓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젓가락은 허공을 집었다가 애꿎은 흰 쌀밥을 집었다. 그를 지켜보던 배준혁이 근처의 반찬을 집에 그의 밥그릇 위에 얹어주었다.

“반찬이 서운해 합니다.”

예? 하고 무심결에 되물은 양시백은 이내 소리 내어 작게 웃었다. 농담도 하실 줄 아시네요. 느리게 말을 이은 양시백은 아까보다 조금 더 편하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반찬은 느리지만 천천히 줄어갔고, 식사는 느리게 끝났다. 뒷정리하는 것은 양시백이었다. 다시 일어나려는 배준혁을 극구 말리고선 빈 그릇과 반찬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끝내니 아홉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를 바라보다 손을 닦고 맞은편에 앉았다.

“잘 먹었습니다. 준혁씨.”

“잘 드셔서 기분이 좋군요.”

창가를 바라보던 그는 바로 양시백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정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색한 호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정한 식탁을 보았고, 언제나 자신에게 기이한 감정을 보여주는 이를 앞에 두고 양시백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점점 모르게만 되었다.

“언제든 또 해드리겠습니다.”

배준혁은 방금 전의 식탁을 떠올렸다. 유독 빨리 줄어든 반찬이 있었고, 깨작거리며 줄어들지 않는 반찬도 있었다. 그래도 골고루 잘 먹는 편이었던 그의 식성을 떠올렸다. …물론, 그가 허락한다 면의 이야기였다. 배준혁은 조용히 양시백을 살폈다.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부드러워진 경계선이 보였다. 배를 채운 뒤라 그런지 그의 표정도 한결 풀려있었다.

…왠지 자신도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주시려고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양시백이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끝나지 않은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양시백은 손톱 끝을 눌렀다. 관리하지 않아 깨지고 짧게 깎은 끝은 거칠었다. 잠시 숨을 돌렸다. 배준혁은 아직 대답하지 않은 채였다.

“제가 궁금하다고, 준혁씨가 그러셨죠. 하지만 저는 알 만한 게 없는 사람입니다. ……할 줄 아는 게 사람을 해하는 일밖에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담담하게 이어지는 말은 생각보다 침착하게 나왔다. 다만 배준혁을 바로 보지 못하고 그를 조금 비껴본 채 이어지는 말이었다.

“저는 궁금합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많이. 다른 사람은 상관없습니다. 선생님, 제가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감정이 궁금하고, 곁에서 보고 싶습니다. …곁에 있게 해주시면, 안됩니까?”

배준혁이 양시백의 손을 잡아 왔다. 화들짝 놀란 양시백은 손을 떨쳐낼 생각도 못 하고 배준혁을 바라봤다. 곧은 낙엽 빛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에 무게가 있다면 이미 진즉에 질식해버렸을 것 같았다. 이 모든 말이 진심과 진실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이게 만약 꾸민 감정이라면 그야말로 속아 넘어간 자신이 멍청한 이가 되겠지. 심장이 쿵쾅대는 것이 느껴졌다. 닿은 손은 따듯했고 생각보다 온기가 있었다. 한 번도 자신만을 향한 감정을, 그것도 긍정적인 감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양시백은 감정의 강에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배준혁이라는 사람에게, …….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양시백은 빼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버려 둔 손을 꼼지락거렸다.

“……마음대로 해요.”

먼저 지쳐 떠나갈 거면 시작하고 싶지 않다. 이런 호의에 적응하다 그가 떠나가면 이후에 밀려올 감정은 오로지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데. 끝까지 자신을 말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물려두고 양시백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맛본 긍정적인 선의는, 선악과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배준혁이 웃었다.

말 그대로 웃었다. 그것도 무척,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양시백은 저도 모르게 그 웃음에 시선을 빼앗겼다. 무덤덤한 표정을 내내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변하는 순간, 양시백의 심장은 더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쿵쾅거림을 그는 잘 몰랐다. 배준혁은 아름다웠다. 그렇게 무심코 생각해버린 양시백은 조금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기뻐하기도 했다.

배준혁은 창문을 열었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먼지가 날리고, 끼익 거리는 소리가 귀를 거슬리게 했다. 창문틀을 손끝으로 쓸다가 밖을 바라봤다. 아직 세상은 어둑어둑했다. 낡은 가로등도 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끔 깜빡이며 빛을 앗아가곤 했다. 건물도, 길도, 주변도 다 낡아 빠진 동네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지도 모른다. 낡아 빠진 만큼, 평화로웠으니까. 그가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가장 원하는 것은 이것이겠지. 평화. 창가에 기대어 아무도 없는 거리를 시야에 담았다. 이제 겨우 새벽 4시가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끼익, 낡은, 문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발소리는 그가 부러 두텁게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준혁씨.”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님.”

잠긴 목소리가 자신을 부른다. 그에 답하는 제 목소리가 허공에 내려진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 앞에 난로가 켜진 지 얼마 안 되어 얕은 열기를 품어내고 있어 부러 그 자리에 앉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생각보다 그는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양시백은 자신의 기호를 결코 말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그의 행동에서 생각이 다 드러나,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난로 불빛에 은은한 빛이 맴도는 그의 녹빛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는 유독 더 깊고 어둡게 보였다. 눈동자에 불그스름한 열기가 스쳐 간다.

배준혁이 양시백의 집에서 지내게 된 지 몇 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여름의 한 가운데 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겨울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배준혁은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부엌으로 향했다. 양시백에게 커피를 내려주기 위해서였다. 텅 비어있던 냉장고나 식기들은 어느새 꽤 늘었다. 일회용기들은 이제 웬만하면 찾아볼 수 없었고 단정하고 깔끔한 자기의 식기들이 찬장에 놓여 있었다. 식탁 옆엔 커피 머신이 생겼다. 양시백은 커피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배준혁이 즐기는 편이라는 걸 알고 둘이 상의해서 들여놓은 것이었다. 양시백의 커피에는 우유가 들어갔다. 이것 저것 넣어 그가 제일 선호하는 것이 결국 우유였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렇게 뼈가 튼튼하신 거냐고, 양시백의 팔목을 만지며 장난스럽게 이야기가 나온 적도 있었다.

“여기, 커피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두니 양시백이 손을 뻗어 잔을 쥐었다. 서늘한 공기가 남아있는지 온기를 품은 잔을 두 손으로 쥐는 게 귀여웠다. 그의 손에서 머그잔도 꽤 작아 보였는데 양손으로 쥐니 더 작아 보였다. 배준혁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새벽의 어둠은 천천히 물러갔고 햇빛이 천천히 방안에 들어왔다. 두사람 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가는 대화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게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편한 사이였다. 

양시백은 창가 너머의 풍경을 바라봤다. 원래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편은 아니었는데 배준혁이 일찍 일어나다 보니 자신도 저절로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같이 사는 사람에 맞춰 생활패턴이 바뀐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침의 맑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옆을 봤다. 피곤했는지 얕은 잠이 든 그가 있었다. 유독 숨소리가 작다 싶더니 까닭이 있었다. 언제나 옆을 보면 배준혁이 자신을 보고 있어 부러 옆을 안 보게 된 습관도 생겼다. 그의 시선이 부끄러울 정도로 곧아서, …양시백은 그게 간지러웠다. 고른 숨소리에 그는 제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배준혁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시간이 흘러도 양시백을 향한 배준혁의 호의와 감정은 여전했다. 

배준혁은 무엇이든 늘 양시백을 우선시했고 그에게 선택을 맡겼다. 심지어 일에 대해서도 그랬다. 둘이 같이 지내게 된다고 해서 하는 일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양시백이 타인의 피로 옷을 버려 온 적도 있었고, 배준혁이 상처를 안고 들어온 적도 많았다. 둘이 같은 일로 나가게 된 일도 있었고, ……윤리와 도덕적인 것을 문제 삼기엔 양시백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고 배준혁은, 모르겠다. 양시백은 고개를 저었다. 손끝에서 만져지는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배준혁이 처음, 이 집에 들어왔던 날. 알고 보니 그 상처들은 고의로 만든 상처라고 했을 때 양시백이 얼마나 황당한 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술기운이 들어간 날, 양시백의 손을 상처 부위였던 곳에 부러 올려놓으며 당신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동정이라도 받고 싶었다. 다친 자신을 무시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서. 그렇게 떠드는 그를 결국 때리지 못하고 부들부들 주먹을 떨었던 밤도 있었다.

“자잘한 일도 많았지.”

고작 몇 달이 지났을 뿐임에도 나쁘지 않은 기억이 많았다. 그게 다 배준혁이 자신을 배려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만지던 머리카락을 놓고 손을 내렸다. 그 손을 배준혁이 잡아 왔다.

“……안, 잤어요?”

깜짝 놀랬다.

“선생님이, 잠든 제게 무슨 짓을 할까 궁금해서.”

잠기운을 쫓아내지 못한 배준혁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양시백의 얼굴이 금방 빨개졌다. 그, 그, 그게, 그런 단말마만 내뱉다가 결국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엉덩이를 옆으로 슬쩍 옮겨 그와 조금 더 떨어졌다. 양시백은 늘 배준혁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 갔다. 조금 따사로운 햇살이 두 사람의 사이로 내리쬈다. 배준혁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주변이 가라앉았다.

양시백이 멈칫했다. 갑작스럽게 나온 말은 평상시에 그가 자신에게 하는 어투와 똑같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고개를 다시 옆으로 돌렸다. 배준혁은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못 들은 거로,”

“안 됩니다.”

“어째서,”

“선생님이 못 들은 걸로 하셔도, 저는 계속 이야기 할 거니까요.”

 좋아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양시백의 표정은 엉망이었다. 찡그리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배준혁을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말은 배준혁 다웠다. 양시백에게 있어 배준혁은 늘 갑작스러운 사람이었다. 양시백의 발걸음에 맞춰주면서도 이렇게 멋대로 뛰어오곤 했다. 양시백은 말을 어물쩍거렸다.

“꼭, 이래야만 했던 겁니까. 나는….”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몰랐다. 굳이 부정적인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그가 떠나버릴까 봐. 자신에게 보여주는 웃음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춰버릴까 봐. 그의 흔적이 남은 이 집에 혼자 남겨질까 봐.

“괜찮습니다. 천천히 다가오셔도.”

배준혁이 양시백의 손을 잡아왔다. 그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또 다정해서 그가 천천히 하려고 하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배준혁이라는 이는, 언제나 이렇게 늘 어른스러워서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이기적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앞에서만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배준혁이 어찌나 얄미운지 모른다. 양시백의 손이 작게 떨렸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기엔 양시백은 겁쟁이었고, 겁이 많았다. 배준혁이 쥔 손을 더 꽉 잡아 왔다.

“…치사해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따듯한 체온이 천천히 전해졌다. 그의 온기가 자신에게 옮겨온다. 양시백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배준혁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선생님, 제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깍지 낀 손이 자신을 벗어날 수 없게 한다. 무너지는 몸이, 제게 닿는 인간의 감정으로 더럽혀진 시선이, 전신을 옭아맸다. 숨을 뱉었다.

  

아. 거미줄에 걸렸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