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선도 : 먼저 先 / 길 道

양시백

- 회색도시1의 스포일러성의 내용이 있음


양시백은 고개를 들었다. 푸르게 맑은 하늘 위로 흘러가는 구름은 마치 솜사탕 같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또 지나 따듯해진 공기에, 눈을 한 번 더 껌벅이면 금세 여름 가운데 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삼키며 쭉 이어진 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어머, 선생님!"

그의 걸음 뒤로 반갑다는 듯이 걸어오는 목소리가 붙는다. 양시백은 걸음을 멈췄다, 

"아, 어머니. 안녕하세요. 오랜만… 입니다."

무의식 중에 인상이 구겨지지 않도록 양시백은 눈가에 힘을 풀었다. 양시! 눈에 힘 풀어라!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상냥하지 않은 인상 탓에 겁부터 먹는 원생들과 보호자들 때문에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던 그 그리운 목소리. 

"세상에, 소식 들었어요. 관장님 이야기는 들었어요. 힘드셨죠?"

아. 그는 리액션 할 타이밍을 놓치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괜찮…아요. 주변에서도 많이들 도와주셔서."

"어휴, 관장님 참 좋은 분이셨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희 아이도 학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두긴 했지만, 다시 태권도 하러 가고 싶다고 한동안 얼마나 고집을 피웠는지 몰라요."

턱을 괴고 푸념을 늘어놓는 목소리에 양시백은 그저 하하, 그랬나요.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정육점 들린다는 걸 깜박했네. 선생님, 붙잡아서 미안해요. …아, 이제는 선생님이 관장님으로 불러야겠다. 그렇죠?"

"…음, 편하신 쪽으로도 괜찮아요. 그보다! 어서 가보세요!"

아, 맞다! 다음에 또 인사해요! 라고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두고 급하게 떠난 뒷모습을 바라보다 양시백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관장 이름을 달게 된 것은 시간이 무색하게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하나 밖에 없을 그림자 옆에 다른 그림자가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떠들썩하게 들려올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양시백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 빈자리가 너무 컸다. 

골목길을 한참 걸어 굳게 닫아 둔 도장 문을 열었다. 아침에 싹 닦아 반짝이는 바닥을 밟고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너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던 공간은 언제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 세상에, 이게 대체 뭐에요! 일단 바닥에 있는 것부터 다 치워요!

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걸음 했던 이의 질색 어린 목소리가 선명했다. 으, 양시백은 갑자기 올라온 소름에 팔을 쓸어내렸다. 매섭게 노려보던 시선은, 정말 무서웠다. 옆에 나란히 서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질색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이들도… 그는 무서웠다. 그 뒤론 아침부터 청소부터 하는 부지런한 습관이 생겼으니 결과적으론 좋은 일이다. 

"관장님이 계셨을 때 보다…."

잘 해야지. 잘 해내야지. 양시백은 거울을 바라보며 가볍게 뺨을 두드렸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폈다. 늘 입었던 도복이 가끔 무거워지기도 했다. 도장 관리 일을 하며 언제나 정신 없던 그리운 사람을 떠올렸다. 곁에서 지켜볼 땐 별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직접 하게 되니 충분히 이해 하고 만다. 

"… …."

보고싶은 그리움은 어쩔 수 없다.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내다가도 이미 모든 곳에 스며들어있는 그 사람을, …가족을 떠올리게 된다. 책장에 단정히 세워져 있는 액자를 손 끝으로 쓸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최재석의 미소를 바라보며 그는 다시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너무 많은 것을 제게 이야기 해주지 않고 떠나간 당신을 원망하고 싶어도 원망 할 수 없어요. 관장님. 당신에게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감히 원망을 하나. 한다고 하면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고 말 없이 훌쩍 떠나버렸던 것이 가장 슬펐다.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나는 의지 할 수 없는 사람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약해질 때면 떠오르곤 했으니.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뭐든 제대로 이야기 해주지 않고 무작정 쥐여주었던 이 군번줄도, 가끔 자신을 보며 그리운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도, 당신이 자신을 거둬 들기로 결심한 그 까닭도, 모두… 언젠가는 이야기 해주겠거니 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영영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리셨으니. 

"…정말."

막상 당신을 저 아래로 떨어트린 사람도 마냥 원망 할 수 없어, 양시백은 그저 마음이 슬펐다. 양시백이 알지 못하는 과거에서부터 시작된 일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관장님과 선생님의 죽음도, 유상일과 박근태의 죽음도. 

빛 아래로 떠나버리던 그의 걸음도.

모든 것은 과거의 사람들이 걸어온 길의 연장선이었다. 이제는 현재의 사람들의 길이 되어갈 그 길. 양시백은 끝까지 지키겠다고, 이제 더는 누구도 잃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선 양시백도 결국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도장의 불을 모두 끄고, 문을 잠갔다. 

"시백씨."

"혜연씨."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쳤다. 굳게 굳은 그녀의 얼굴에서 양시백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시백씨는."

"당연히 괜찮고 말고요. 거기다 어떻게 혜연씨를 혼자 보내겠어요! 저를! 이 양시백을 믿어주십쇼!"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며 목소리를 높이던 양시백을 바라보며 권혜연은 미안함을 담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불이 꺼지고 굳게 닫힌 태권도장을 뒤로 하고 과거에서 시작된 현재의 두 사람은, 여전히 쭉 이어져 있는 무대로 향하는 길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불안하게 흔들린다. 긴장을, 걱정을 모두 덜어내고 지긋지긋한 과거를 모두 잘라내기 위해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그 뒤를 가만히 지켜본다. 무대에 다시 올라온 남자는 아직 이름을 가지지 못하고, 나약하기만 한 그 그림자 끝을 천천히 따라갔다. 아, 과거의 망령은 아직 남아있었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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