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 04

모티브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겨우 집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서울. 그리고 누릴 일 없는 서울의 기억은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었지만 사실 그 둘의 구분은 너무나도 쉬웠다.

"아빠, 연락도 없이 늦었잖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나를 마주하는 혜연이의 얼굴에서 경찰이 된 혜연이의 얼굴을 보았다. 아빠의 죽음에 대해 알고 싶다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던 얼굴. 진중한 얼굴, 굳은 목소리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돌아오지 않은 아빠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그러면서도 얼마나 보고 싶어했을까. 내 자신의 죽음은 나의 선택이었지만, 내 죽음으로 인해 뻗어나가는 일들은 감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양시백이와의 만남에서 불러일으켜진 격정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북받쳐 올라와 혜연이를 부둥켜 안았다.

"..아빠가..정말 미안해. 미안해, 혜연아."

"왜 갑자기 울고 그래, 아빠..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큰일이라도 난 거야? 응?"

"약속, 지키지 못 해서..미안해. 정말, 미안해..."

혜연이는 묻던 것을 그만 둔 채 내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 위로에 눈물이 더 샘솟았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지켜지지 못한 약속. 나에게도, 혜연이에게도 한으로 남아버린 그 약속. 이 서울에 있는 나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단 둘뿐이던 집은 지금까지 쭉 단 둘뿐인 집으로 존재했고, 한참 전에 지나버린 약속을 상기시킬 필요도 없었다. 내가 없는 서울의 혜연이는 나를 기다리는 바람조차 거절되었는데.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거기에 대한 비통함을 품속의 혜연이에게 쏟아붓는 나라는 사람은 어찌나 어리석은가.

혜연이를 안은 채 한참을 울다가 겨우 울음을 그치곤 다시 한 번 사과한 뒤 일찍 잔다는 핑계를 대고 방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혜연이의 기색을 살필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지리멸렬하게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흐르듯 가고 잠 이루지 못 할 밤이 물씬 다가왔다.

***

새벽에 까무룩 잠들었다가 깨니 늦지 않은 아침이었다. 조금의 잠이었지만 어제의 감정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효과가 뛰어났다. 눈이 잘 떠지지 않는 것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퉁퉁 부어있다는 게 확 느껴졌다. 방을 나오자 거실 테이블 위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계란 토스트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접시 아래에는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아빠도 너무 마음 쓰지 마.

오늘 하루도 힘내고!

쪽지를 내려놓고 토스트를 집어 한 입 물었다.

보드랍고 촉촉한 계란, 구워져 바삭한 식빵이 부서졌다. 마른 입에 우겨넣은 다음에는 비척거리며 주방으로 가 냉수를 한 잔 들이켰다. 오랜 시간 비어있어 허기조차 희미했던 뱃속은 음식물이 들어가자 맹렬하게 호소했지만 입이 급격히 짧아진 듯 식욕이 당기지는 않았다.

입가를 훔친 뒤에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섰다.

엉망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차디찬 물을 연거푸 끼얹었다. 씻은 뒤 옷을 입는데 옷장에 걸린 새하얀 점퍼가 눈에 띄었다. 검은 바지, 줄무늬 넥타이, 하얀 털점퍼. 순경이 된 혜연이의 복장과 꼭 비슷해서 실없는 웃음이 짧게 튀어나왔다.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는 시기적으로는 아주 오래되어 조금 빛 바랜 노란 코트를 집어들었다.

이미 한 번 일어났던 참혹한 일들을 한꺼번에 기억해내게 되면서 어쩔줄 모르고 슬퍼했다. 지금 역시 그 슬픔을 달랠 길이 없었지만 마냥 시간만 놀리며 슬퍼할 수도 없었다. 청년, 양시백이 이 서울을 위해서 주저없이 자기 자신을 담보로 내 건 것처럼, 과정이야 어찌됐건 그것에 동조한 나는 그가 지녔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했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또한 자신을 찾지 말라던 양시백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전에 들었던 말 그대로, 권현석이라는 사람은 결코 희생되는 사람을 간과할 수 없었다. 지금의 서울이 평화로운 일상을 계속 이어나갈지, 아니면 처음으로 되돌려짐으로서 바로잡히는 것으로 끝날지.

이제는 알았다. 어떤 끝이라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양시백을 만나야한다는 것을.

찾자. 찾아서 내 의견을 전하고, 끝을 맞이하자.

결론을 내리자 끊임없이 맥동하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푹했던 주말을 딛고 찾아온 월요일은 싸늘한 한기를 담은 바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

사무실에 들어서자 몇 자리가 드문드문 비어있는 게 보였는데, 재호가 쪼르르 다가와 인사했다.

"현석 형님, 이제 오셨....아니,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많이 이상해?"

"눈은 퉁퉁 부었고, 얼굴은 헬쓱하고..못 본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어쩌다가..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닙니까..?"

"아냐, 잠을 조금 못 자서 그래. 괜찮아."

"그..그래요?"

재호는 뻘쭘한 표정으로 몇 마디를 주억거리다 제 자리에 돌아갔다. 들어오는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팀원들은 그 때마다 재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애써 웃어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팀원들이 모두 출근해 아침 브리핑 준비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서 중앙에 섰다.

"다들 주목. 이번에 국제범죄대책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나 그 이전에 귀빈 경호 및 현장 경비, 주변 교통 통제 등으로 온 서울 경찰이 차출된 동안 범죄율이 급격히 상승한 것으로 집계되어서 특별한 지시가 내려지지 않는다면 지원을 요청하는 주변 경찰서의 일을 돕거나, 그간 알차게 밀려있던 보고서 작성에 힘써야 할 거야. 자,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난 국장님께 다녀올 테니, 다들 일 시작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팀원들이 앉은 책상을 휘 둘러본 뒤 근태 형이 있는 국장실로 향했다.

***

이경환, 고상만, 조용호.

양시백이 아는 바로는 -그 양시백 역시 준혁이와 재호, 재석이에게 전해들은 것이지만- 서대문 인질극 이후 근태 형을 도와 상일이의 누명을 씌운 세 사람이었다. 11월의 어느 날이 오지 않은 지금 그들은 어찌 되었을까 싶어 아침 일찍 인사과를 통해 조사해 보았는데, 위증죄와 증거 조작 등으로 면직됨과 동시에 처벌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11월의 날에 죽어나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에 대한 의문은 접어둘 수 있었다. 국장실에 도착해 노크 뒤 들어갔다.

"근태 형."

"얼굴이..왜 그렇지? 낯빛도 안 좋은 것 같은데."

"...라면 먹고 잤거든."

"흠?"

"아냐. 아무 것도. 팀원들에게 오늘 업무 간단히 지시해놨어. 형 얼굴도 보고..뭔가 더 지시할 사항이 있나 해서."

"아직까지 별다른 건 없어. 지금으로서는 보고서 만들어 결재 올리고 받는 게 일이겠지."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쉰 여섯의 국회의원 박근태와 눈앞의 근태 형은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 눈앞의 형은 나를, 상일이를 배신하지 않은 근태 형. 언제까지나 자랑스러운 형 그 자체였다. 내 믿음에 배신당하던 기억조차 선명하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바라보기만 해도 소중할 터였다.

"..형, 지금 말이야, 행복한 거지?"

"실없는 물음 던지기는..행복한 게 당연하잖나."

"형수랑 설희랑 아주 사이가 좋아보이더라고."

"엊그제 만났다고 들었는데, 언제 와서 같이 식사도 하고 그러자고."

"지난주처럼 둘 다 시간 괜찮으면 생각해 볼게. 전달사항 있으면 전화해주고.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국장님."

현 시점에서 기억하지 못 하는 일로 감정을 토해내는 것은 혜연이에게 매달렸던 것으로 충분했다. 내색하지 말자. 내색하지 말자. 그렇게 속으로 외면서도 가시지 않고 얹히는 답답함에 끊었던 담배가 그리워져 국장실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현관 앞 흡연구역으로 훌쩍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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