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 03

모티브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저는, 양시백이라고 합니다.

"네 이름은..양시백이라고 하지."

청년, 양시백은 내 말에 살짝 표정을 굳혔다.

이름 석 자를 시작으로 번쩍, 또 번쩍하며 많은 생각들이 우수수 자라나듯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금까지 내가 몰랐던 것들이. 내가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들이. 양시백. 스물 일곱. 양지 태권도장의 사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시설을 전전하다 직업 소개소에 잠시 머물렀고,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얼굴 모르는 은인에게 구해지고 다시 떠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석이에게 거둬져 함께 보조 사범으로서 도장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10년 뒤 재석이의 나이가 마흔 살이 되던 해의 11월에는.

양시백이 있던 그 서울에는 경찰이 된 혜연이, 흥신소 사무실을 꾸린 준혁이, 어릴 때의 꿈을 뒤늦게 이룬 재호, 아연이를 잃고 완전히 파멸한 상일이가 있었다. 양시백은 지금과는 180도 다른 서울에서 사건에 휘말려 칼날을 타듯 사람의 죽음을 마주했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 끝에서 은인들을 잃었다. 사건의 진실을 목도했으나 그 진실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은 상처로 뒤덮인 얼굴은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청년의 감정을 비롯한 기억, 지식, 경험.

그 모든 것들이 소름 끼칠 정도로 빠르게 범람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옭아맨 청년의 모든 정보는 공유라기보다는 너무나 선명한 간접 체험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난 뒤에야 나는 내 기억의 마지막, 지금의 서울에 도달하기 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목놓아 통곡하던 모습. 도와달라는 말. 바라는 대로 될 것이라는 말.

"...이제는 다 기억났어. 우리는 이미, 한 번 만났었구나."

-우연, 이었어요.

양시백은 딴청을 피우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떠도는 거야 예상한 대로지만 마주치게 될 줄도 몰랐고, 마주치자마자 아저...경감님이 다 기억해낼 줄도 몰랐거든요.

"..네가 바란 게, 이것이었니?"

-얘기 안 해도 어느 정도 아시겠지만..저는 경감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권혜연 씨나 준혁 선생님, 관장님, 재호 아저씨에게까지. 관장님이..죽고 나서 정말 많이 아팠고, 많이 울었습니다. 모두 그런 끝을 맞이하길 원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된 걸까 생각하다가..이름만 아는 아연이라는 아이가 살아있다면, 경감님이 살아있다면 다시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나라는 사람 대신, 네가 없는 서울이 만들어졌구나. 하지만 난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약속해 달라고 했던 말, 기억하세요?

어조가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연한 눈동자에 어려있던 쓸쓸한 기색이 사라져있었다. 약속해 달라고 했던 기억은 똑똑히 났지만 처음 접촉했던 당시에도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 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약속을 상기시키는 양시백의 물음에 이전에도 느꼈던 불길함이 배가 되었다.

"..약속해 달라고 했던 건 기억하지만."

-경감님과 마주치기 전까지 저는 제가 아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봐왔어요. 제가 알았던 때보다 더 행복하게 지내는지.

"......"

-슬퍼하는 사람 없이 모두 행복해 보였어요. 이 서울에서는 누구도 죽지 않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았으니까요. 복수와는 동떨어진 일상은 이렇게나...평화로웠어요.

"그 속에 네가 속할 수 없는 건?"

-경감님이 없고 내가 있던 서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시잖아요? 소중한 시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저는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제가 여기에 '없어도'.

있을 수 없는 사람.

없을 수 없는 사람.

두 사람은 마주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경감님이 제가 겪은 것을 아는 것처럼, 저도 경감님이 겪은 일을 알게 됐어요. 약속하고, 그 약속이 깨지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가, 용납할 수 없다면?"

-솔직히 저도 어떤 원리로 이렇게 되었는지 잘 몰라요. 이대로 영영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경감님은 행복을 누리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 거고...

"난 그런 걸 말하려는 게 아니야!"

-알아요. 직접 마주한 시간은 정말 짧았지만..경감님은 좋은 사람이니까. 나라는 사람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을 희생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행복해도 그 기반이 희생으로 마련된 것이라면 용납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그래서 마지막 바람에는 경감님이 저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어요.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나직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양시백은 조금 전의 내가 그랬듯 한 걸음 다가와 반투명한 손을 뻗어 내 눈가를 가볍게 쓸었다. 눈가에는 사람의 손길이 아닌 바람이 스치는 느낌만 났다. 혜연이 또래의 이 청년은 고작 아들 뻘이었다. 내가 알게 된 그의 과거는 외롭고 고됐으며, 그 뒤로도 되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것들에 슬픔, 자책, 무력감, 상실감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딛고 일어서기도 전에 지금에 이르렀다. 내가 느끼는 슬픔과 안타까움에도 아랑곳않는 그는 정말 평온해 보였는데, 나는 그 얼굴이 목놓아 우는 얼굴과 겹쳐보였다. 그래서 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저는 경감님과 다른 사람들이 이 서울에서 살아주시면 좋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진실을 알지 못 했다면 모르는 채로 일상을 살아갔을 것이다. 이제라도 알게 된 이상 모른 척 하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제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겠지만..경감님이라면 어떻게든 저를 설득하려고 하시겠죠?

"그래."

-..그럴 줄 알았어요.

활짝 웃는 얼굴은 나름대로 앳되어보였다.

반투명한 몸은 조금씩 천천히 투명해져 주위에 녹아들었다. 그 모습은 어제 보았던 이지러지던 해를 떠올리게 했다.

"잠깐...!"

...찾지 마세요.

움켜잡을 듯 손을 뻗어보았지만 당연히 잡히지 않았고,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양시백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고, 도장 문을 열고 나온 재석이와 양 사범님이 아직까지 집에 안 가고 있었냐고 묻는 것에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고 어찌어찌 핑계를 대고는 등 떠밀려 도망치듯 황급히 자리를 박찼다. 길거리를 내달리다 어느 순간 숨이 차서가 아니라 발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워졌기 때문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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