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 02

모티브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일요일 아침이 밝은 뒤 식사하면서 혜연이에게 같이 양지 태권도장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는데, 혜연이는 아직 일을 마무리 짓지 못 해 다음에 제가 찾아가보겠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미완된 일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말했지만 한 번 선택했으니 만족스러울 때까지 붙잡고 있을 것이 눈에 훤했다. 결국 오늘도 혼자 집을 나오게 되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빈 손이면 섭섭해서 선물용 주스 세트와 보려는 사람이 그토록 좋아하는 라면을 골랐다. 주말이니 깜짝 놀래켜 줄 요량으로 연락하지 않고 찾아왔는데 혹시나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도장 문 앞에 섰을 때에야 들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맥이 빠지더라도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노크를 하고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열려있는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도장 안에 들어가자 바닥에 깔린 매트와 관장실의 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누구..아, 팀장님!"

"재석이, 오랜만이야."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 아주."

"휴대폰이 고장났는지 연락 온 줄도 몰랐지 뭐야. 미안해. 오늘은 모처럼 휴일이고 무료하기도 해서 잊어버리지 말고 찾아왔지. 자, 선물."

"아유, 뭘 이런 걸 다..감사합니다. 누추하지만 앉으세요."

"그럼 사양않고. 그래, 도장에는 별일없지?"

"예. 별일이 있나요.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고 삽니다."

"라면 국물 칠이 아니고?"

"이거 한 방 먹었네요. 예, 뭐..맞습니다."

"그런데..사범님은 어디 가셨고?"

재석이가 막 대답하려는 순간 도장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날카로운 눈매와 나이를 잊게 하는 다부진 몸. 양 사범님은 장을 보고 온 듯 커다란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범님."

"예, 오랜만입니다. 재석이 녀석 보러 오셨습니까?"

"사범님도 잘 계시나 궁금해 했습니다. 하하.."

"..잘 지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 사범님과도 알게 된 지 시간이 지났건만 영 거리감을 좁히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과묵한 타입이라는 점, 속내가 깊고 아이들에게 상냥하다는 것을 익히 전해들은지라 옅은 웃음을 짓는 얼굴이 친근하게 보였다.

"장보기 당번이어서 보냈더니 이제 왔네."

"세일한다길래 한 바퀴 돌아보고 왔으니까."

"사범님이 장보기 담당이면, 식사 준비 담당은 재석이 담당인가?"

"아뇨. 평일은 정확하게 딱딱 나누는데, 아저씨가 요리 실력이 끝내줘서, 주말에는 좀 조르죠. 군대 있었을 때 취사병이 아니었을까 의심된다니까요?"

"아니었다."

"알지, 알지!"

"..줄창 라면 먹는 것보다는 나아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도맡고 있습니다."

"하하..고생이시네요."

"먼저 얘기들 나누세요."

양 사범님은 장 본 것들을 풀러 작은 냉장고가 있는 구석으로 걸어갔다.

"도장 열었을 때 축하해 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아주 테가 나, 재석이."

"벌써 10년째라니..시간 참 빠르다니까요."

"네가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잘 가르칠 수 있을까, 걱정했었지."

"아이들이 울지는 않을까, 하는 거요?"

"당연..히, 아니지."

"농담입니다."

"..짓궂기는."

"아이들 가르치면서 경감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누군가를 지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달았고, 경감님의 느꼈을 많은 고충이 와닿더라니까요."

"칭찬은 고맙지만, 나도 그렇게 좋은 팀장은 아니었어서..부끄러운데."

정말이었다.

선진화파 진압작전의 이면에는 재석이를 비롯한 수많은 잠입 요원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었고, 그 희생에는 목숨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지워진 자신의 옛 신분에 대한 갈망과 언제 탄로나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고, 진압작전 이후 무사히 신분전환을 마친 요원들은 초기 인원의 절반 이하. 재석이는 작전의 후유증으로 신분 전환 직후 경찰을 그만 두었다. 장기화 되는 작전 과정에서 자신의 무력감을 체감하고 속으로 삭였다. 지금까지 경찰에 몸담으면서 그 때 느낀 감정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전 말이죠, 경감님 만큼 좋은 사람을 이제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

"물론, 아저씨도 좋은 사람이지. 이 최재석이가 보증한다니까?"

"재석이, 혹시 몰라 말하지만 내가 보증 서 달라고 해도 서 주면 안 된다."

"에이, 제가 죽으면 죽었지 빚 보증 서달라고 할 사람인가요."

그럴 사람이 아닌 건 알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 나와 양 사범님은 돌아가면서 보증의 위험성을 되새겼고, 졸지에 잔소리가 두 배가 된 재석이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두 손을 돌고 항복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

그 뒤로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 뒤 간식거리를 얻어먹은 다음에야 도장을 나왔다.

"즐거워보여 다행이야."

도장 안은 따스하지 않았지만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정통으로 불어와서 꽤 추웠다.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는데, 길 오른편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 청년이었다. 야상 안의 도복은 내가 막 뒤로 한 양지 태권도장의 것이어서 주말반을 강습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는데 잘 보니 청년의 몸은 반투명해서 그 뒤로 주변이 훤히 비쳐보였다. 결코 강습생이나 지나가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해가 새파랗게 떠 있는 대낮에 유령이라고 겁부터 집어먹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았다.

모른 척 등 돌려 돌아가면 그만인데도, 어쩐지 청년에게 이끌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몇 걸음 앞두고 가까이 다가섰을 때에는 그 반투명한 얼굴, 제 몸만큼이나 흐릿하고 옅은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 얼굴은 방금 전 인사하며 헤어진 사람을 빼다 박은 것처럼 닮아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부는 바람에 흔들림 한 점 없는 청년의 야상에 손을 뻗었다. 손은 시원스럽게 그 형체를 뚫고 지나갔다. 빛이 바랬지만 말갛게 보이는 연한 눈동자는 둥글게 휘어지며 닫혔다가 열렸다. 반투명한 발을 들어 한 발자국 물러난 청년이 제 머리칼을 멋쩍은 듯이 긁적였다.

나는 이 청년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면대면으로 마주하기 전까지 그 이름도, 모습도, 목소리도 몰랐다.

-안녕하세요.

아니. 아니다.

나는 이 청년을 알고 있다.

-저는..

"너는, 네 이름은..."

그저 저도 모르는 새 잊어버렸을 뿐.

-양시백이라고 합니다.

"..양시백이라고 하지."

나는 청년, 양시백이 자신을 소개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이름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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