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7

최재석 생축글

아이가, 양시백이 없었다.

직업소개소의 끝에 다다라 본 것은 나뒹구는 흉기와 그것을 들었을 소년에 가까운 청년들이었다. 방마다 혈투를 벌이고 전진하면서 양시백을 본 기억은 없었다. 당장 짜낼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저를 해하려 드는 자들을 쓰러뜨리고 한 발 먼저 직업소개소를 빠져나갔다. 그의 시체를 보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히 여겨야 할 일이었으나 지나온 길에 두고 온 양태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다음을 기약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정신 차려..!"

최재석은 양손으로 제 볼을 힘차게 갈겼다. 찾아야 한다. 이 지옥에서 탈출했다고 한들 백석에서 끝까지 찾아내 숨통을 끊으려 들 수 있었다. 양태수가 그랬던 것처럼 양시백을 찾아서 보호하는 수밖에. 지나온 길을 다시 되짚어 나간 최재석은 다시금 양태수와 마주했다. 멋대로 약속한 주제에 양시백을 구하지 못 했다. 양태수에게서 군번줄 목걸이를 풀어내 제 목에 건 뒤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북북 문질러 닦으며 그의 시신을 들쳐업었다. 처음 업어보는 그의 무게가 부축했을 때보다 가벼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정말, 미안해..그래도, 내가...내가, 아저씨 아들 꼭 찾아낼게. 반드시..반드시 찾아낼게."

***

최재석은 경찰을 그만 둔 뒤 도장을 여는 것조차 미루고 양시백을 찾는 일에 매진했다. 사람의 행적이 많은 곳부터 적은 곳, 거기에 건달이며 양아치들이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고, 돈을 갈취할 만한 으슥한 곳까지 곳곳을 쏘다녔다. 경찰서, 파출소 가리지 않고 찾아가 먼 친척 아이를 찾고 있으니 소식을 알게 되면 꼭 좀 연락달라고 애걸에 가까운 부탁도 번번이 했다. 허탕을 친 적도 많았지만 번번이 걸려오던 전화에 일말의 기대를 걸던 최재석이 그간의 행적의 마침표를 찍게 된 건, 제대로 챙긴 적 없었던 생일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즈음이었다.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찾아간 최재석은, 저 멀리 얌전히 앉아있으나 불규칙적으로 날카로운 눈을 치뜨며 주위를 둘러보는 양시백의 모습을 보고 함부로 눈물을 보이지 않도록 입술을 씹었다가 풀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상대가 요구하는 금액에 대해서 합의를 마친 뒤 양시백을 데리고 나왔다. 잠자코 나온 것이 용할 정도로 감출 수 없는 의심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드디어 그의 아들을 찾아냈다는 기쁨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노릇이었고 당장 마음을 열 수 없으리란 것도 이해했기 때문에 오면서 고르고 골랐던 말을 꺼냈다.

"난 최재석이라고 한다. 저기 경찰 아저씨한테 들었을지 모르지만 네 아버지의 먼 친척 되는 사람이지. 너한테는...그래, 삼촌이라고 하면 좋을까."

"..돈 내주신 건 감사한데, 못 믿겠는데요."

"아직 얘기도 다 안 했는데 믿을 수가 있겠냐? 나 같아도 못 믿지. 그보다 배고프지 않나? 밥이라도 한 그릇 먹고 이야기하자. 나도 너 찾았다는 소식 듣자마자 달려온 거라 밥 한 그릇 못 먹었다. 네가 잘 아는 곳으로 안내해줘도 되고."

"......"

양시백은 앞장 섰다. 그러나 그간 겪어온 일들이 험난했는지 조금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가는 최재석을 여러번 돌아보았다.

***

2인분 시킨 것을 3인분으로 정정했음에도 양시백은 몹시 잘 먹었는데, 키는 또래에 비해서 컸지만 많이 마른 몸을 갖고 있었다. 불규칙적인 식사, 거르기도 여러 번 걸렀을 것이다. 최재석도 유년기를 평탄히 보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생각이 미친다는 점에서 속이 적잖게 쓰렸다. 밥을 먹고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 도장으로 장소를 옮겼다.

"내가 먼저 얘기할까, 아니면 먼저 물어보겠냐?"

"정말 그쪽이 내 삼촌이 맞긴 해요?"

"난 네 아버지 친구니까, 따지자면 삼촌이 맞긴 하지."

"아버지는 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최재석에게 남은 양태수의 물건은 두 개였다. 그가 늘 하고 다녔던 닳아버린 군번줄과 세 가족이 찍힌 낡은 사진. 최재석은 사진이 더 닳을까 두려워 그것을 액자에 담아놓았다. 관장실에 놓여있던 그 작은 액자를 양시백에게 건넸다.

"널 안고 있는 분이 네 어머니고, 그 옆에 서 있는 분이 네 아버지셔. 이름은 양태수라고 해."

"......"

어머니를 기억하니?

최재석이 아는 건 아버지 양태수 뿐, 어머니에 대해서는 알지 못 했다.

양시백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까. 궁금했으나 함부로 물을 수는 없었다.

"..얘기하시는 거 들어보면 아버지가 지금은 안 계신 것 같은데, 맞나요?"

"..그래,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나랑 엄마를 버린 거예요?"

아버지와 엄마. 느껴지는 거리감에 최재석은 양시백이 흐릿하게든 또렷하게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최재석은 다시금 말을 골랐다.

"네 아버지는 병을 앓고 있었고, 가족들에게 해를 끼치게 될까봐 집을 나간 거야. 병을 추스르고 돌아왔을 땐 아내의 죽음과 시설로 갔다는 아들의 소식을 접했다고 해."

"그래서, 용서해 달라고요? 이제와서, 이제와서?"

"감히 용서해달라고 할 수 없겠지. 안다. 다만 나는 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키며 너를 꼭 찾아내겠다고 약속했고, 너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아니..최소한 네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 선택할 기반이 마련되기까지만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구나."

"제가 싫다고 하면요? 억지로 붙잡아둘 건가요?"

"..억지로 붙잡아 두면 더 나갈게 뻔하잖냐. 싫다고 한다면 딱 한 가지만 부탁하마."

"말해보세요."

"내 연락처를 주마. 이번처럼 싸움에 휘말리거나, 혹은 도움이 필요하면 꼭, 연락다오."

최재석은 연락처를 메모지에 적어 양시백에게 건넸다. 양시백은 말없이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이것도. 네...아버지의 유품이다."

"......"

양시백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의 의미였다.

최재석은 입을 작게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래, 그럼 네 생각이 바뀔 때까지 이 목걸이는 받아두마."

"..고마웠어요. 그럼."

떠나가는 아이의 등을 보며 최재석은 자신의 말재주 없음에 탄식했다.

***

한 번 끈을 만들어 두어서인지 경찰서나 파출소에 들르는 일이 생기면 최재석에게도 연락이 왔다.

최재석은 그때마다 값을 치른 뒤 양시백의 안부를 묻고 밥을 같이 먹었다. 지내는 곳이 마땅치 않으면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양시백이 마음을 열어줄 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 한 자리에서 기다리는 게 당장의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큭!"

그러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양시백은 길거리를 전전하며 끝나지 않는 싸움에 휘말렸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눈매로 온갖 시비가 걸렸고, 일 대 일이라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는 수준이었으나 한 명 이상이 될 경우 늘씬하게 얻어맞았다. 시비 걸리는 것도 서럽고 짜증나는데 얻어맞기까지 하면 악이 차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취객 중 절반은 질이 낮고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불행하게도 오늘 양시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취객은 일반인이 아니라 건달이라는 게 문제였다.

양시백이 주먹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눈에 별이 반짝거리거나 말거나 자세가 흐트러지자 몇 번 더 후려갈겼다. 취기에 이성을 잃은 건달은 기어코 쓰러진 양시백을 향해 발을 높게 쳐들었다. 짓밟히거나 걷어차인다. 얻어맞는 것에 익숙하다고 덜 아픈 게 아니었기에 양시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뻑.

그리고 무언가가 어떤 것을 굳세게 움켜잡아 벽으로 밀어붙이는 소리.

"켁...케흑."

짓눌린 신음소리였다. 그 소리가 조금 전까지 양시백을 몰아붙이던 건달의 소리가 틀림없어서 양시백은 감았던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 아래 거구의 남자가 건달을 완전히 제압한 뒤였다.

"술에 꼴아서도 저보다 어린 녀석한테 주먹을 휘두르고 싶냐?"

"켁, 사, 살려..."

"밤길 조심하면서 가라고. 알겠어?"

그 어느 때보다 낮게 말한 최재석은 더러운 것을 붙잡았던 것처럼 건달의 얼굴을 짓누르던 손을 풀었고, 그놈이 뒤통수를 어떻게 칠지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양시백에게 다가왔다. 살벌하게 뇌까리던 것과는 달리 몇 번 보아온 것처럼 온화한 기색을 띄운 뒤였다.

"...아저씨, 싸울 줄도 알았어요? 그보다 여긴 어떻게..."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아이고, 잘생긴 얼굴 깨지고 다치고 이게 뭐냐..같이 도장 가서 약이나 바르자."

"왜 이렇게 도와주는 건데요?"

"난 네 아버지 친구고, 너는 내 조카뻘이나 다름없어서 그런다. 길바닥에서 또 들려줘야 하냐?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린애가 얻어맞아서 다친 채로 널브러져 있는데 성인이 되어서 그냥 지나치겠냐? 자, 가자고. 부축해주랴?"

"됐어요, 혼자서 걸을 수 있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잠자코 최재석이 부축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

도장에 도착해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처치를 끝냈을 때 최재석은 구급 상자를 갈무리했다.

"양시백."

"네."

"태권도 할 줄 아냐? 단증은?"

"있긴 한데..왜요?"

"이제 준비도 끝나서 도장 열려고 하는데, 널 보조 사범으로 채용하고 싶다."

"그런 말을 뜬금없이 해요?"

"뜬금없는 거 아냐. 도장은 원래부터 준비하고 있었고, 너만 괜찮다면 처음부터 얘기하고 싶었어."

"들어와서 같이 살자는 말을 잘도 돌려서 말하시네요."

"허우대 멀쩡하고 다 큰 녀석이 얻어맞고 다니고 내가 가슴이 찢어진다. 가슴이. 내가 매번 구하러 출동할 수도 없잖냐. 내가 모르는 곳에서 해코지라도 당하면...."

양시백은 처음으로 진중하면서도 가볍게 보였던 사람, 죽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에게는 삼촌 뻘이라고 소개했던 최재석에게서 감출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자신이 크게 다치거나 더 나쁘게는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 섞인 떨림.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있을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재빠르게 낌새를 캐치해 달려오고,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말없이 기다려주는 모습들에서 진심을 느꼈다.

"..밥 먹고 생각, 해볼게요."

"엉?"

"배고프다고요. 밥 먹어요."

"그, 그럴까?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냐?"

"피자요."

"그래, 당장 시키자. 그러니까 피잣집 전단지가..."

허둥대며 전단지를 뒤적이는 최재석의 등을 바라보며, 양시백은 얼빠진 웃음을 지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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