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30

3주년 기념

08:58:00

08: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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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님이 돌아오지 않은 지도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에 용역업체 직원이라는 어깨들이 관장님을 내놓으라며 우르르 몰려와 도장을 한바탕 뒤엎고 갔다. 걱정되는 마음, 정말로 10년 넘게 알아온 날 배신한 거냐는 마음. 어느 마음이 우위에 놓여있는지 분간도 하지 못 한 채 아침에 눈 뜨면 대충 끼니를 때우고 관장님을 찾아 헤맸다. 하루 이틀은 겨우 무마할 수 있었지만 임시변통에 불과했다. 관장님은 함흥차사였고 도장은 나갔다 들어오기만 하면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이런 상황에 애들을 가르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울어진 사물함을 바로 세우고 널브러진 호구와 짓밟힌 매트를 정리했다.

배신인가? 배신?

관장님과 10년 넘게 함께 지내면서 곱씹어본 적 없는 단어였다. 은혜를 입었고, 신뢰를 받았다. 그 사이에 이용의 낌새는 없었다. 고작 이 한 순간을 위해서 신뢰를 갈고 닦기엔 시간이라는 대가가 너무 비싸다. 사람이 변한 걸까? 변해버려서 이렇게 거하게 뒤통수를 후려치고 갔다고?

"..관장님,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내 안의 관장님을 믿자.

내가 아는 관장님을 믿자.

"..일단, 경찰에..신고부터 해야..."

더이상 깽판치지 못 하게 조치를 취해두려 수화기를 들어 112를 누르려다 멈칫했다. 얼마 전 관장님이 사라진 것에 대해 도움을 요청했었지만 그놈의 국제범죄회의인지 뭔지 때문에 눈코뜰새 없다며 실종자 이름이며 마지막으로 목격된 날짜와 시간 같은 걸 묻지도 않았었다.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을 것이다. 수화기를 도로 내련늫았다.

"..젠장."

전단지라도 작성해서 프린트로 뽑아보려다 하나뿐인 구식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가 예쁘게 뽑혀있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되는 거 하나 없는 하루였다.

***

"정재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말이냐?"

"국제범죄방지대책회의요. 오디토리움에서 열리는 거요."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가 있겠냐. 우리 같이 현장에서 뛰는 형사들과 위에서 범죄 방지를 위해 이야기하는 건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야. 혜연이 너, 괜히 가 볼 생각 말아라. 지금 우리가 이렇게 숨돌릴 새 없는 것도 그 날의 경호와 보안을 위해서야."

"아저씨, 누가 가 본다고 그래요?"

"얼굴에 다 쓰여있다. 가.고.싶.어.요."

"......"

"서의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 구하고 있는 거 다 안다. 하지만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야. 아무리 부탁하고 다녀도 일개 순경에게 손을 빌리고 싶어하진 않을 거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알겠어요."

정재 아저씨는 곧 정면에 놓인 노트북에 시선을 주었고, 나는 고개를 돌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근태 의원. 아빠의 옛 상관이었던 사람. 출소 직후 행적이 모호한 유상일과는 달리 국회의원으로서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 지위 때문에 유상일과는 다른 의미로 접촉하기 힘든 사람이지만 둘 모두 접촉해야만 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선거 운동 때를 노렸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운동 차량의 이동이 빠르고 인파가 몰리는 데다가 출마한 의원이 매번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허탕치기 일쑤였다. 가능성은 낮지만 만약 경찰 신분으로 국제범죄방지대책회의장 근처에라도 갈 수 있다면.

"순찰 다녀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알았어요."

***

상일 선배가 출소한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출소 직후 어떤 남자와 접촉해 사라진 것, 수정이를 유괴한 것 정도가 단서의 전부였다. 목표는 박근태 의원일 터였다.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내장을 죄듯 욱신거리는 통증에 약을 두어알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약기운은 빠르게 퍼져 뭉근하게 통증을 가라앉혔다.

"후우..."

이마, 손, 등줄기. 불쾌한 식은땀이 점점이 맺혀 주륵 흘렀다.

시간이 없다. 약으로 병마를 찍어누르는 데에도 점차 한계점이 올 것이다. 그 전에 상일 선배를 막고 수정이를 구해내야만 한다.

목표를 안다는 것은 그 목표에 접근하기 위한 수단을 대폭 좁힐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서울 지도를 펼치고 상일 선배가 복역했던 구치소의 위치와 백석 저택과 백석 빌딩을 체크하고 하나의 선으로 이어보았다. 박근태 의원 역시 수정이의 구출을 위해서 상일 선배의 동선을 유추해내려고 노력할 터. 저 근방에 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수정이를 유괴하는데 성공한 이상, 박근태 의원이 범죄방지대책회의의 기조연설을 할 때를 노리고 시간을 재서 끌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파멸, 파멸이었다.

'아빠!'

제대로 들어보지 못 한 말이 환청이 되어 귓가에 달라붙었다. 이제와 아이에게 아빠라고 밝힐 자격은 없었다. 그럴 필요성 역시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박근태 의원의 딸로서 아이가 생명을 위협받는다면 그런 필요성을 느끼고 느끼지 못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상일 선배는 언제고 움직일 것이다.

움직인다면 왜, 언제, 어디서, 무엇을.

지도를 쭉 살펴보다가 문득 시선을 한 점에 고정시켰다.

***

광역수사대로 선발됨으로서 경찰 내부에서 인정받았다는 것을 어머니께 알려드렸을 때, 경찰대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눈물을 글썽이시던 것이 아직까지 선명했다. 어머니의 바램이 큰 부분을 차지했지만, 경찰이 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그 일에는 보람이 있었고, 가정형편은 크게 넉넉치 못 했지만 두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썩 모자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보람도, 경찰이라는 작은 목표의 달성으로 얻은 성취감도 근신만 아니지 외따로 대기 상태로 발령나면서 끝이 났다. 어머니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스스로 저지른 잘못 때문이라면 원망하지 않고, 응당 털어놓고 감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 하는 아버지의 어떤 일로 간신히 얻은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때 어머니도, 나도 힘들어 했었다. 그 일을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역린이었다.

"태성아. 안색이 안 좋은데..혹시 밖에서 무슨 일 있었니?"

"아, 아니에요. 일은요. 요즘 일이 바빴어서..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어머니가 다가와 옅게 웃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토닥임을 받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가족일수록 힘든 것을 나누고 의지해야하지 않냐는 것,

사실대로 말히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냐는 것.

"어머니, 저녁 차리는 거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그 모든 생각들은 곧 등 떠밀리듯 밀려 한구석으로 사라졌다.

11:58:00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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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로운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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