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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정, 형사.

오미정이 형사라는 직업의 딱지를 뗀 지도 10년 째가 되던 어느 날이었다.

자신을 미정 형사라고 불러준 이는 몇 없었다. 그렇게 불러줄 이도 이제 거의 없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면. 오미정은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지만 잊혀진 울림을 떠올리듯 상대의 이름을 조심스레 입에 올렸다.

"..상일 경위님?"

수화기 너머는 거북한 침묵이 깔리고 있었지만 곧 긍정의 침묵이 되었다.

오미정은 수화기를 꼭 쥐었다. 상대방, 유상일의 말이 이어졌다.

-도움이 필요해. 미정 형사가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

출소한 유상일을 처음 본 오미정은 서글픔이 몰려와 말라 없어진 줄 알았던 눈물을 보일 뻔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수척해진 몸, 초췌함이 묻어나는 얼굴. 제가 옆에 있어주지 못하더라도 항상 행복하기만을 바랐던 눈동자가 깊이 패여 있었다. 유상일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오미정은 애써 감정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를 하고 싶다던 유상일은 정확히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는 제스처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오미정이 흔들리지 않고 곧게 바라보는 것에 마른 침을 삼키고 낮게 말했다.

"..계획에는 아이들이 필요해."

"..아이들이요?"

"박수정. 그리고 홍설희라는 아이야."

유상일은 두 아이를 어떻게 데려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좋은 수단일 리는 없었다. 낯선 이름이었지만 오미정은 곧 박수정에 대해 떠올려냈다. 박근태의 딸이었다. 유상일이 당한 것. 유상일의 딸 유아연이 당한 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기에는 원수의 딸을 타겟으로 삼아 되돌려 주는 것만큼 명확한 게 없었다. 더군다나 박수정은 박근태는 물론 백석 회장 장희준에게도 각별하기 그지없는 귀한 아이였다.

유괴에 이어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생각에는 반사적인 구역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처음의 통화에서의 침묵, 거기에 조금 전 유상일이 머뭇거리던 것이 겹쳐졌다. 박근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게 유쾌할 리 없었다. 죽은 아이의 복수를 위해 죄 없는 아이를 해한다는, 금기나 다름없는 일을 계획하는 것 역시도. 하지만 입에 담은 이상 그것을 어떻게든 실행할 것이다. 말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되려 복수할 마음조차 품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면 그게 더 비참했을지 모른다고 오미정은 생각했다. 아이들이 휘말리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복수 자체는 도울 수만 있다면 돕고 싶었다.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유상일 혼자 손을 더럽히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박수정은 알겠어요. 그런데 홍설희라는 아이는..?"

"박근태로 하여금 자신의 딸과 타인의 딸을 저울질하게 할 생각이야. 타협은 없다는 그 반듯한 기조를 굽혀 자신의 딸이 아닌 다른 아이를 구할지, 아니면 대외적인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아이를 먼저 구할지...궁금하지 않아?"

큰 그림을 되뇌던 박근태.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던 자가 유상일 앞에서 어떤 추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몰락을 맞을지 오미정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

오미정은 유상일과 접촉한 뒤 페이스북에 다소의 짤막한 기록들을 남겼다.

거기에는 누군가 말하지 못하는 진실도 있었고, 감았던 눈을 다시 떠 추악한 권력의 일면을 바라본 것에 대한 감상도 있었고, 옛 사랑, 10년을 넘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사랑의 잔재도 있었다. 그 기록은, 눈에 불을 켜고 출소한 유상일을 찾아 헤매게 될 박근태를 향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인터넷 상에 혼잣말 같은 것들을 기록하지 않았더라도 유상일과 접촉했을 -그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가능성이 높은 오미정을 어떻게든 찾아냈을 것이다.

유상일은 복수라는 이름의 큰 그림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찰을 그만 둔 뒤 큰 그림이라는 단어 자체에 히스테릭하게 반응했던 오미정이었으나 다른 누구도 아닌 유상일이 언급하는 것에는 거부감을 표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큰 그림이라는 이름 아래 철저히 파멸한 유상일이라면, 그들을 향한 복수의 여정을 큰 그림이라 말할 자격이 있었다.

기록을 남긴 것을 유상일이 안다면, 또 그것을 본다면 성급하다고 질책하기 보다는 침묵할 가능성이 높았다. 오미정의 바라는 것의 일부도 줄 수 없는 자신. 주지 않는 자신.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할뿐인 관계였기 때문에 이야기해줄 수 없는 것들에 그러하듯 침묵했을 것이다. 오미정은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유상일의 몫만큼 유상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10년 전 함께하지 못했던 나약했던 자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를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주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상일 경위님."

미용실 지하에 놓인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 오미정은 이 자리에 없는 유상일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국제범죄방지대책회의가 곧 열릴 예정이었다. 그에 발맞춰 유상일 역시 숨가쁘게 움직일 것이다. 홍설희와 박수정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종종 오던 유상일이었으나 박수정을 안전한 곳에 데려가는 날에는 그걸로 끝이었다. 오미정은 그의 큰 그림이 완성되기를 그 자신만큼 바랐으나, 한편으로는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유상일은 복수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박근태의 손에 목숨을 잃지 않더라도 삶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오미정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유상일을 도왔다는 지금의 시간들이 휘발되어 훌훌 날아갈 것만 같았다.

***

유상일이 박수정을 데려간 날, 오미정 역시 홍설희를 창살 안으로 밀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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