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 05

모티브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몇 개의 담배를 한없이 하늘거리며 흩어지는 연기로 만든 뒤 코트를 벗어 소리나게 몇 번 털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을 들인 순간 막 나오는 사람이 보여 한 발자국 물러나 지나온 바깥의 경치에 시선을 주었다.

"권현석 경감."

어느새 발걸음 소리는 멈춰있었다.

"국장님..!"

"..현석이. 그 자리에서 물러난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까지 직함으로 부르나?"

하성철 국장님은 흰 머리가 드문드문 는 점을 제외한다면 10년 전과 거의 비슷했다. 지병으로 괴로워하던 시절보다도 건강해 보였고, 아마도 실제로도 건강할 터였다. 누명을 쓰고 몰락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과거는 내가 간직한 과거였다. 애써 웃어보이며 말했다.

"근태 형처럼 형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아, 그런 건 아닐세. 바람도 쐴 겸, 태성이가 두고 간 것을 전해줄 겸해서 잠깐 들렀다 가는 길이야."

"그 아이도 국장님처럼 훌륭한 경찰이 될 겁니다."

"그런 말 말게. 나는 나고, 태성이는 태성이야. 자기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부끄럼 없이 살아가라는 것 외에 바리는 것은 없어. 그리고 그 점은 지금도 아주 잘 지켜지고 있다네."

"..그렇군요."

태성이. 하태성.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던 어린 상주는 10년 후에 어떤 결말을 맞았던가. 하지만 이 곳에서 쌓아올려진 반대급부의 기억이 물 밀 듯 밀려들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광역수사대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태성이. 그 속에서 하성철 국장님은 물기 어린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고 주변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런데..자네는 아침부터 농땡이인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유능한 팀원들에게 일거리를 분담시키고 농땡이를 피운 셈이 되었네요."

"자네가 농땡이 피울 때도 있고..근태에게 말하면 놀라겠군."

"아직 30분도 안 지났으니 이 정도는 좀 봐주겠죠 뭘."

호록 머금은 믹스 커피는 첫 맛은 달았고 끝맛은 입 안을 살짝 마르게 하는 끝맛을 남겼다.

"고민이 있는 게지."

"예?"

"지금 자네 말이야."

"..예. 고민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고민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어 있거나 결론이 나와있는 건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있지만 잡념이 불쑥 고개를 들어서 마음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 잡념이라는 것도 말이야 잡념이지 사실은 부정하기 힘든 것이기도 하고요."

"현석이. 그건 누구를 위한 고민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없어선 안 되는 사람이 누락되어있고,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나를 포함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기묘한 서울. 양시백 본인이 원한 희생이었다고 해도,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희생을 바탕으로 쌓아올려진 44살의 권현석이라는 사람의 인생은 행복했다. 딸을 남겨두고 죽지 않음으로서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눈앞의 국장님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 역시 과거와는 정반대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죽지 않고, 헤어지지 않고, 상처 입지 않는 행복. 이 서울은 양시백의 기억속 서울과는 전혀 달랐지만 환상 아닌 현실이었다. 나는 결론 자체는 오래 전에 내렸지만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아 현실로 되돌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허덕였다. 이 고민은 결국 양시백에 대한 생각 이전에 그 죄책감에 대한 것,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저를 위한 거지요. 그게 쭉 마음에 걸려서."

"현석이. 과거 잠입요원 작전 발효 당시를 기억하나?"

"어떤.."

"희생은 크고 작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을 가리지 않아. 우리는 장기화 된 작전과 그 속에서 죽어나가는 요원들과 정보원들을 애도하고, 희생시킨데에 대한 용서를 빌면서도 수없이 사과하면서도 작전을 중단할 수는 없었지. 그리하면 선진화파를 막을 수 없게 된다는 점 외에도 치러진 기존의 희생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

"그렇다고 유의미한 희생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네만...이거 비유법이 잘못된 것 같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단 말이지."

"..예. 어떤 말씀이신지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확실히, 빨리 맞는 게 좋겠어요."

겨울바람에 식어버린 커피를 모두 마셨다.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농땡이는 끝이로군?"

"농땡이 아니라니까요. 들어가서 제가 할 일을 하고..빠른 매를 찾으러 가야겠어요."

"그래. 나도 들어가보겠네."

"들어가십시오, 국장님."

짧은 대화는 마냥 홀가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양시백을 만나서 해 줄 말은 서서히 구체화 되고 있었다.

***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퇴근할 즈음엔 양시백을 처음 만났던 곳, 양지 태권도장 앞에 도착했다.

-...혹시, 양 사범님, 저희 혜연이 또래 아들이 있지 않았나요?

-아들이요?

-예, 제가 인사를 못 했던 것 같아서요. 그, 사범 보조로 도장 일을 도와준다고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경감님이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예상은 했지만, 마음이 아프다.

양시백은 양 사범님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착각한 모양이라며 말을 흐리고는 어제의 일을 애둘러 설명한 다음에야 도장을 나왔다. 도장과 슈퍼마켓, 길 건너 편의점, 근처 골목, 한 때 임대건물이었던 고층 건물까지 쭉 살펴보았다. 홈 그라운드나 마찬가지니 혹시 다시 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미 내게 마크되었기 때문인지 양시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서울에 대해 모든 것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은 양시백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추측됐다- 어딘가에 있을 양시백이 이 서울을 떠나지는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현재 유령같은 형태를 취하는 양시백은 언제 어느 곳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폭을 좁히는 데에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양시백의 기억속에서 강렬한 장소는 크게 네 가지였다. 다른 형태로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직업 소개소와 양지 태권도장, 동훈 빌딩, 백석 빌딩의 펜트하우스.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양시백의 '은인' 과 관계가 있는 곳이었다. 내가 이 점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이 네 장소를 의도적으로 피하게 된다면, 추측만으로 온 서울을 뒤지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혜연이에게는 퇴근길에 전화해서 한동안 귀가가 늦을 것이라고 일러둔 터였다.

"..일단, 혹시 모르니 효제동 근처를 더 살펴볼까."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추가태그
#생존if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