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떠나는 사람들 - 06
모티브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준혁이."
"예."
"경찰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준혁이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약간 곤혹스러워 하는 빛을 보였다.
"...아주 예전 일입니다. 서대문 인질극 사건 당시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장 아이를 구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무력하기만 한 자신에게 화가 났고, 혹여 아이를 구하지 못 했다면 지리멸렬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가 그만두었을지 모른다고..."
"..수정이 생각을 했던 거구나."
"..예. 지연 씨가 수정이를 임신하고 있던 중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경감님, 갑자기 왜...?"
"아. 아니야. 그냥..문득 궁금해져서. 실례되는 질문이었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혹시 고민이 되는 문제가 있으면 다음에는 말해달라고 이야기 하는 것으로 준혁이와의 대화를 끝냈다. 준혁이는 어리둥절한 듯 했으나 곧 제 자리로 돌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미정 형사와 재호, 준혁이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조금씩 들려왔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내용은 요즘 내가 이상하다는 것이 쟁점이었다. 그 이상하다는 건 방금의 대화와 비슷한 맥락에서였으리라. 그런 대화의 틈바구니에서 이상함이 아니라 기시감을 느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위이잉-
책상 한 켠에 올려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불이 들어온 액정을 확인해보니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정은창이었다.
매일 저녁부터 새벽에 가까운 시간까지 양시백을 찾는데 쓰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누군가와 약속을 잡지는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혜연이 역시 포함되었다- 정은창의 경우는 부탁해 둔 것도 있어서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괜찮아. 저녁 식사하면서 이야기 할 정도는 돼.
-평소처럼 집에서 먹자는 말 없는 거 보니..많이 바쁜가 봐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부탁한 건 조사해뒀어요.
-고마워. 퇴근하고 연락할게. 만약에 오늘 못 만나게 되면 내일 중으로 찾아가도록 할게.
-아뇨. 내일까지 미뤄지면 제가 찾아갈게요.
-그래주겠어?
-무척 바빠보이시니까, 제가 맞춰드릴 수밖에요.
-고마워, 정은창.
문자를 주고 받는 것을 끝낸 뒤 잠시 책상에 결재 준비로 맡아둔 국제범죄방지대책회의 관련 보고서를 쭉 훑어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국회의원이 된 근태 형이 이 행사의 기조연설을 맡기로 되어있었고, 펜트하우스에서 총격이 발생하게 되면서 그 연설이 기사화 되는 일은 없었다. 현재는 큰일 없이 -교통 통제 및 소음 피해로는 말이 많았지만- 행사가 잘 마무리 되었다. 기조 연설자 및 귀빈 리스트를 보는데 귀빈 중에는 백석 그룹의 장희준 회장이 있었다.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곧 보고서 자체의 내용에 관심을 돌렸고, 문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결재란에 서명을 했다. 검토하고 부족한 부분을 나름대로 보강하거나 재작성을 부탁하는 것으로 시간이 흘러가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 경감님."
"어, 미정 형사. 무슨 일이야?"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뭘 좀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말해봐."
"그..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죠?"
"있다고 하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없나 해서요. 그동안 잠자코 있었지만 걱정도 되고..다른 팀원들도 같은 생각이에요."
"피곤하고 일이 막중하긴 하지만 그건 사무실의 누구나 다 그렇고, 금전적인 문제도 아니고, 혜연이랑 싸운 것도 아니야. 그냥..불혹의 시기를 맞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진 것 뿐이야."
"정말요?"
"그럼. 그러니까 지금은 각자의 일에나 집중하자고."
과장스레 어깨를 으쓱했지만 미정 형사는 내 얼굴을 짧고도 길게 빤히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하고 대답한 순간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지난 주말 내가 그랬듯 양손에 편의점 마크가 찍힌 비닐봉투를 든 상일이가 웃으며 들어왔다.
"다들 출출한데 간식 먹고 합시다!"
"저거 먹고."
***
나왔을 때에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저녁이라기보다는 밤에 가까웠다. 정은창과의 약속은 내일로 미뤄야 할까 잠시 고민하는데 정문으로 나올 때 벽에 기대어 있는 정은창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번호를 누르던 것을 멈추었다.
"좀 늦었어요."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괜찮아요. 일단 오기는 했지만..시간 낼 수 있겠어요?"
"조금 늦었지만..괜찮아.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이 근처 죄다 백반집, 고기집, 포장마차 뿐이잖아요. 그게 그거지."
"그럼 자주 가던 집으로 갈까."
정은창을 몇 걸음 앞서보내고 그 뒤를 따라갔다.
장난스레 말했지만 눈물지으며 유언을 고하던 순간이 생각나 마음 한 켠이 종이에 베인듯 깊게 아렸다. 지금의 정은창은 제 죗값을 치르고 새 삶을 살아가고 있었고, 그 곁에는 여동생 은서도 함께였다. 파국을 맞아버린 과거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 미래이자 현재인가.
"경감님. 왜 이렇게 뒤쳐져 있어요?"
"아, 생각 좀 하느라.."
"얼굴빛이 안 좋아요. 혹시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이 정도 바쁜 건 예전에 비하면 바쁜 축에도 못 끼지."
"경감님도 나이를 먹잖아요. 이제는 슬슬 나이를 생각하셔야지."
"나 아직 그런 말 들을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정은창 너도 나와 4살밖에 차이 안 날 텐데."
"알았어요. 취소하면 되잖아요."
식당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는 부대찌개 2인분을 주문했다. 잔반찬이 나오고 찌개거리가 든 냄비가 오기까지 한 10분쯤 흐른 뒤에야 정은창은 제 가방속에서 서류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부탁하신 거예요."
"고마워. 고생 많았지?"
"별걸요. 근데 이걸 부탁한 이유는..백석의 덜미를 잡기 위해서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조사를 부탁한 두 곳이 워낙 공교로워야죠. 직접 봐 보세요."
내가 정은창에게 부탁한 것은 두 장소에 대한 것이었다. 백석 빌딩의 펜트하우스, 11층의 존재와 직업 소개소. 직업 소개소는 사유지였지만 양시백이 겪었던 일 -어린 청년들이 소모품 마냥 취급되고 착취되던- 때문인지 대외적으로는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겨있었다. 조사 내용에 따르면 현재는 사유지도 아니어서 직접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벼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네게 부탁하는 일은 없었겠지."
"..그럼 됐어요. 말씀하신 11층의 존재는 저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펜트하우스란 게 비상시에나 칩거하는 공간이라 아무 일 없는 현재로서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밖에 알 수 없었어요."
"..외부인이 출입할 순 없겠지?"
"반듯한 체포 영장이 없다면요."
"일하는 건 괜찮아?"
"소개받아서 들어간 걸요. 아저씨 대타라는 거나 그 회장님 밑이라는 게 좀 많이 찜찜하지만..이렇게 경감님도 도울 수 있으니, 괜찮아요."
나는,
식사하는 와중에 그 얼굴을 보면서 몇 번이고 울컥 올라오는 것을 끝끝내 가라앉혀야만 했다.
***
정은창과 헤어졌을 즈음에는 시간이 11시가 다 되어갈 즈음이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직업 소개소가 있던 곳이었다. 정은창의 조사에 따르면 폐공장이었던 부지는 매각하기 전 싹 밀어버림으로서 휑한 공터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고, 이후 오랫동안 주인이 생기질 않았는데 -정은창도,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각이 껍데기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했다- 조만간 매입 계약이 성립될 예정이라고 했다.
양시백에게는 첫 은인의 손길이 미쳤던 곳이었지만 과연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숨을 만큼 애착이 있느냐고 한다면 아닐 거라고 생각되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 그리고 혹시나 하는 의문에 한 번 가 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다. 식당 공용 주차장에 주차해 둔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대로로 빠져나왔다. 액셀을 밟아 속도를 높이며 고속도로로 향하며 의문을 곱씹었다.
양시백이 서울을 벗어나지 못 할 것이라 가정한다면, 그와 비슷한 처지인 나 역시 서울을 벗어나지 못 하는 걸까 하는 의문. 내가 서울을 벗어나지 못 한다면 금방 돌아오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사며, 왕복하는데에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 의문의 답이 어느 것이건, 착잡하기는 매한가지일 터였고.
조금 열어둔 창문 사이로 세찬 바람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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