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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정 이야기

아빠. 아버지.

박수정에게 아버지는 인자한 -그러나 경호원과 사용인들이 어려워 하는 기색이 어김없이 느껴졌다- 할아버지보다 더 어려운 존재였다. 단순히 무뚝뚝하다거나 감정 표현이 서투른 게 아니다. 박수정이 그걸 깨달은 것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 했다던가, 하는 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내일은 학교 끝나고 엄마와 무엇을 할 예정이라고 말하는 것, 주말에는 모처럼 아빠가 같이 놀아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얘기할 때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정이는 부잣집이라 좋겠다! 그럼 집에서도 맘껏 뛰어놀 수 있어?'

마구잡이로 뛰어놀다가 사용인들이나 아버지에게 걸리면 크게 혼나곤 했다.

'수정이네 아버지는 예전에 경찰 일도 했었던 엄청 유명한 분이래! 우리 엄마 아빠가 그랬어. 자랑스러워 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분이라고!'

어머니는 돌아가신지 오래고, 그렇게 대단한 아버지는 대단한 만큼 박수정과 얼굴을 맞대기도 힘든 처지였다. 아니. 어쩌다 집에 돌아오는 날이 있다고 해도 그리 긴 시간을 할애해 주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주거나, 볼에 뽀뽀 해 주거나, 시간을 내어 놀아주기는 커녕 같이 식사를 한 것 조차 손에 꼽았다. 친구의 집에 놀러갔을 때 그 부모님이 친절하게 대해 준 것을 생각하면, 박수정은 아버지 박근태에게서 친구의 아빠보다도 못 한 친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형성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다. 박수정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부자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아버지이기 때문에?

다 싫었다.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터이고, 선생님에게 털어놓기는 싫었다. 아버지에게는 털어놓을 수조차 없다.

박수정이 이런 것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었다.

"..할아버지."

"그래, 수정이냐? 왜, 할아비가 보고 싶어서?"

"..물어볼 거..있어서요."

"그래, 뭘 물어보고 싶든?"

할아버지.

장희준 회장은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정이 앉을 수 있는 낮은 의자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천천히 걸어가 제 몫의 의자에 앉은 박수정이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아빠는..저를 사랑 안 하시는 걸까요?"

"우리 수정이는 왜..그렇게 생각하는데?"

"친구들은 엄마 아빠랑 어떻게 어떻게 지낸다고 말해줘요. 그런데 전 아빠 얼굴도 잊어버리겠다구요."

"수정아, 아빠는 큰 일을 하시느라 그런 거야. 우리 수정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시간 나는 대로 찾아가지 않니."

"....."

피아노 학원. 영어 학원. 수학 학원.

박수정은 학원에 자신을 입학시키던 박근태를 떠올렸다. 무얼 하고 싶은지, 친구들이 다니고 있는 학원은 어디고, 어떤 학원에 다니고 싶은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장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름 높은 학원에 등록을 했으니 빠지는 일 없이 열심히 다니라는 말 정도.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장희준이 박수정의 마음을 달래려고 애쓰는 것이 느껴졌던지라, 짧은 포옹을 나누고 자신의 방에 돌아가는 것으로 그 날의 짜증은 끝이 났다.

하지만 켜켜이 쌓여가는 짜증과 불만은 작은 머릿속에서 사라질 길이 없었다.

***

박수정의 하교는 경호원들에 의해 교문에서부터 백석 빌딩까지 간 뒤, 거기에서 책가방과 학원 가방을 교환하고 다시 차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고분고분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싫은 마음과 짜증을 억누르던 박수정은 열 살이 된 해에 그 감정을 조금씩 풀어놓는 것으로 자체적으로 해소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학원을 가지 않는 것이었다.

"아가씨!"

책가방을 벗으면서 내던지고 차가 주차된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은 의외로 효과적이었다. 따라붙는 빌딩 경비원과 경호원들을 요리조리 피하고 또 숨어서 벗어나서는 친구들에게 놀러가거나 주머니에 들어있는 지폐와 동전으로 오락실에 가는 등 시간을 때우곤 했었다.

하지만 앞에 있던 사람과 부딪히는 바람에 멈칫한 사이, 잦은 도주에 이력이 나 있던 경비원이 재빨리 나서서 멈춰선 박수정의 팔을 붙잡는 바람에 실패였다.

"싫어요! 재미없다구요! 놀게 해 줘요!"

"아가씨, 또 그러시면 어르신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

"진짜 싫단 말이예요..."

학원에 잘 다녀봤자, 칭찬 한 마디 없으면서!

이럴 때만, 이럴 때만! 박수정이 진심으로 분해 울먹이고 있는데 박수정과 부딪친 사람쪽에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뭐하는 사람이라고 끼어드쇼?"

"지나가다가 아이와 부딪친 사람이죠. 그, 아이가 말을 듣지 않나 보군요."

"거 신경 쓸 거 없수다!"

"지겨워요!"

신경 써 줬으면 좋겠어.

박수정은 진심을 담아서 허공에 외쳤다.

"어른이 곤란해 하시잖니."

"아빠도 아닌 걸요. 저하곤 상관없어요."

"그렇게 도망다니다 길을 잃거나 다치면 어쩌려고. 아빠가 걱정하실 거야."

"......"

정말, 걱정할까요? 박수정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냥해 보이는 중년 남자의 말에 박수정은 경비원의 뒤를 따라갔다.

짜증내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된 열 살이 되던 해.

혼나고 꾸지람 들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때. 그 순간순간 사이에서도 관심 받고 싶다고, 자기를 보아달라고 외치곤 했었다. 박수정은 그게 어떤 변화인지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

***

"...네가 수정이지?"

연말의 어느 겨울날, 하교와 함께 빌딩으로 향할 차를 기다리던 박수정의 뒤에서, 수염 난 중년 남자가 말을 걸었다. 박수정은 이 수상한 남자에게 긍정이건 부정이건 답하고 싶지 않았다. 무시하듯 팽 고개를 돌렸음에도 남자는 박수정의 등 뒤로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난 박근태 의원, 수정이의 아빠와는 오래된 친구 사이야. 유상일이라고 해. 삼촌이라고 불러도 좋아."

"......"

"수정이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널 먼저 보고 싶어서 며칠간 너를 지켜봐 왔어. 그런데, 거의 매일매일 학원에 가기 싫다고 도망다니거나 혼자서 놀곤 하더구나. 맞니?"

다시 침묵.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박수정은 고개를 돌렸다.

"수정이는, 아버지가 미운 거지?"

밉다. 누구도 박수정에게 아버지가 미운 거냐고 묻지 않았다. 할아버지인 장희준조차도.

혹여 참다 못 해 그렇게 말하고픈 상황이 닥치면 주변에서 자랑스러워 해야할 아버지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틀어막듯 말하기 바빴다. 그런데, 삼촌이라고 말하는 중년 남자의 입에서 그런 말들이 나오자 박수정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워요."

"..딸에게도 못 미덥게 대하는 모양이지. 자, 수정아. 함께 아버지를 골탕먹여보지 않을래?"

"..골탕요?"

"곧 겨울 방학을 한다는 걸로 안다. 며칠 동안만 삼촌이랑 지내면서 하고 싶은 걸 모두 하는 거야. 학교에도,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뛰어놀고 싶다면 그래도 돼. 그동안만은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유괴범 같다. 정말로. 아니, 정말 유괴범일지도 모른다.

삼촌이라고 말은 했지만 들어본 적 없었고, 진짜로 박수정의 아버지, 박근태를 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 유명한 국회의원 박근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까. 모두 다 홀리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지 말아라. 걱정시키지 마라. 이 아비를 실망시키지 마라.

친구의 아버지보다 더 차가운 말투로 하는 말들은 더욱 차가웠었다.

'-아빠가 걱정하실 거야.'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박수정은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진짜 유괴일지도 모른다는 찜찜한 생각이 주는 두려움은 가셔버린 뒤였다.

"좋아요. 데려가 주세요."

중년 남자는 손을 내밀었고, 박수정은 살짝 거친 손끝을 잡았다. 둘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교문을 떠났고, 박수정을 데려가기 위해 차를 몬 운전수가 창백하게 질려 경호실에 연락을 넣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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