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

눈을 뜬 양시백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저 멀리서 면도하는 서재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날 밤 수염 따가워요. 라고 말한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면도 중인 모습에 괜히 놀려주고 싶은 느낌이었다.

"아저씨, 면도 자주 안 하죠?"

"어허이, 무슨 그런 섭한 말을?"

"볼에 닿으면 따갑다고요. 아차하면 산적 수염처럼 되고."

"이렇게 싹싹 밀어도 퇴근할 때 즈음엔 쑥쑥 자라있는 게 수염이란 거지."

수염을 맨들하게 깎은 서재호의 모습에 양시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새 벌떡 일어나 앉아있는 것은 물론이었다. 넘긴 머리며 웃고, 울고, 화내고, 짜증을 내거나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살풋 펴지거나 깊어지는 주름과, 뒤로 넘겼음에도 헝클어진 머리는 여전했지만 드문드문 있었던 수염이 면도칼의 날에 자취도 남기지 않고 매끈하게 밀리자 사람이 달라보이다 못해 공연히 아쉬울 정도였다.

"되게...젊어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아저씨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10살은 젊어보인다는 말을 듣고 싶었건만, 실패군, 실패야."

"오늘 아저씨 얼굴 보는 사람들마다 놀랄 걸요."

"이 얼굴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어쩐 일이냐고 할 걸?"

양시백에게는 새로운 얼굴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오랜만에 어쩐 일이냐, 정도라니 왠지 아직도 서재호를 알아가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어 괜시리 꽁해졌다. 서재호는 흐늘거리는 셔츠 위에 점퍼를 걸치고, 이전보다 더 멀끔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먼저 가보지. 있다가 퇴근하고 보자고."

"있다 봐요, 아저씨."

"꼭 보자고."

"저 아저씨 왜 저래?"

집주인이 자길 보내버리는 말을 장난스레 하는 것에, 양시백은 꽁해하던 것도 잠시 걸려온 농을 농으로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도 슬슬 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도 시간이 지나 봄으로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양시백은 해야 할 일들을 헤아렸다. 하태성을 찾는 것, 백석 그룹에 얽힌 일들을 주시해야 하는 건 최우선 목적이었지만 소득이 없는 이상 언젠가 돌아갈 집도 소중히 여겨줘야 했다. 얼마 되지 않는 옷도 정리하고 봄옷도 꺼내놓아야 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감이나 기술이 녹슬지 않도록 자체적으로 훈련도 해야 했다. 모든 일이 해결 되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다면 도장을 다시 열 준비도 해야 했다.

아직 차가운 감이 있었지만 바람이 휙 불어와 양시백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양시백은 딴생각을 했다.

'관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재호 아저씨랑 사귄다고 말했을 떄 크게 놀라셨을까?'

이게 무슨 일이냐, 양시! 나이차가 너무 많이 나는 거 아니냐?

물론 사랑엔 성별, 나이, 국경도 없다지만...하지만...! 아니, 서로 좋다는데 내가 뭔 말을 하겠냐마는...

깜짝 놀라하는 얼굴, 당황한 얼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달달 볶는 모습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 서재호도 최재석도 배준혁을 알았고, 유상일을 알았다. 살아있었다면 두 사람이 얼큰하게 술잔을 맞부딪쳤을지도 모른다. 생각의 줄기를 뻗어나갈수록 쓸쓸하고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가정이었지만 양시백은 그 상상속의 자신과 서재호의 모습이 썩 괜찮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이전처럼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지 않았다. 정말로 시간이 약이 되어 양시백의 통증을 덜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시간보다는...'

***

"아빠 왔다~!"

서재호는 거의 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양시백보다 퇴근 시간이 늦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장 문을 열어젖히며 한 대사에 양시백이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애도 없으신 분이 아빠는..."

"양시백이, 오늘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뇨. 별 일 없었어요."

"크~ 도장 한 번 반짝반짝하고만. 청소를 열심히 했어."

"계속 TV만 보기도 질려서 아저씨 오기 전에 싸악 했죠. 이 정도면 도장 당장 열어도 손색 없다니까요?"

"보기보다 깔끔해."

"체, 아저씨야말로 저한테 뭐 섭한 거 있어요?"

"그럴 리가. 진실과 친해보이는 인상답게, 늘 솔직한 거 알잖아?"

"모르는데요."

"핏!"

두 사람은 선 채로 오늘은 이러저러했네, 내일은 이럴 예정이네 얘기를 나눈 뒤 저녁 메뉴를 정하고 채비를 했다. 양시백은 서재호가 선물한 셔츠를 걸치고 자주 입던 야상을 꿰어입었다. 그러고서 서재호의 얼굴을 마주하는데, 아침과는 다른 점을 조금 느리게 알아챘다.

"수염, 진짜 그새 자랐네요."

"아무렴."

"면도..자주 하시는구나."

"안 그럼 양시백이가 말한 것처럼 아차하는 순간 산적 수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

의외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지금까지 적절하게 조절해 면도해왔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서재호가 그렇게 안 보일지라도 퍽 세심하다는 결론을 빠르게 도출했다. 아니, 그는 늘 세심한 면이 있었다. 모르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좋아져서 양시백은 서재호 앞으로 성큼 다가섰고 고개를 숙여 볼에 뽀뽀했다.

"매끈한 얼굴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수염 조금 있어야 아저씨다워요."

"그렇지? 양시백이가 그 매력 포인트를 알아 줄거라고 생각했지~"

서재호 역시 양시백의 볼에 짧게 입먖추고 잠시 바라보다가 양시백의 손을 맞잡고 도장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다시 한 번 휘익 불었다.

봄바람이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막 밖으로 나선 두 사람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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