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7
최재석 생축글
-재석아, 오늘 시간 어때?
"요즘 기온이 워낙 오락가락해서 애들이 죄 감기에 걸려가지고 당분간은 휴무 상태지. 상일이 넌 왜, 점심 같이 먹자고?"
-나 오늘 비번인데, 아연이는 학교 갔거든. 혼자 먹기는 그래서 같이 먹자고 할 셈이었지. 벌써 시백이랑 먹었어?
"아니, 양시는 친구들 만나러 갔어."
-피차 잘 됐네. 그럼 1시까지 우리집 앞 사거리로 나와. 내가 살게.
"웬일이래?"
-내가 사고 싶으니까 그러지. 그럼 조금 있다가 보자.
"그래."
전화를 끊은 뒤 까치집 된 머리부터 감기 시작했다. 도장 벽에 기대 앉아 머리부터 탈탈탈 털고 있는데 창문을 통해 창밖에 멀끔하게 맑은 하늘과 뭉게구름이 잘게 떠 있는 게 보였다. 썩 좋은 날씨였다.
***
"야, 상일아!"
"어. 왔어?"
"어유, 며칠 안 본 건데 한 몇 달 안 봤다 보는 거 같네. 잘 지냈냐?"
"네 말마따나 며칠 새 뭔 일이 있었을라고. 자, 들어가자."
고기집이나 백반집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일이 녀석이 레스토랑 같은 곳으로 척척 들어가서 아주 조금 당황했다.
"얌마, 가볍게 먹지 점심부터.."
"괜찮다니까."
창가쪽 4인석으로 찬찬히 걸어가는데 안쪽에 두 사람이 더 앉아있었다.
"어라, 너희들까지 있었네."
"인사가 먼저 아니냐?"
"안녕."
"그래, 잘 지냈냐?"
"나야 잘 지냈지."
정은창과 주정재가 나란히 앉아있는 것에 얘네 이렇게 시간이 났던가? 하고 생각할 무렵 내가 반대편 안쪽에 않고 상일이가 그 옆에 앉았다.
상일이는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더니 '조금 전 주문한 대로 준비해 주세요.' 라고 말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근데, 너희들까지 이렇게 타이밍 좋게 시간이 비었을 리는 없고...무슨 일이라도 있냐?"
"...야, 얘 모르냐?"
"모르나 본데."
상일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하고 나를 보았다.
"생일 축하한다. 모처럼 달력 보는데 3월에 네 생일이 있던 게 생각나서 다같이 얼굴 보며 식사라도 하자고 자리를 마련한 거야."
"어이구, 이거 까맣게 몰랐네. 하하...뭣보다 나도 너희나 다른 사람들 생일을 잘 안 챙기다 보니...쑥쓰럽네."
"알면 이제부터 챙겨보자고. 우린 6월에 주정재는 8월이니까."
"각자 생일에 한 몫 회수하겄다는 원대한 계획의 초석이구만?"
"그래, 엉님 생일까지 돈 잘 모아두라고."
"넌 대체 얼마나 뜯어먹으려고 그래?"
"쟤넨 40 먹어도 똑같네."
"재석이 너도 똑같은데 뭐."
툭탁거리는 와중에 나온 요리는 놀랍게도 스테이크였다. (스프랑 꿀이랑 생크림에 찍어먹는 바게트 빵 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덩치 작지도 않은 남자 넷이서 점심에 스테이크를 썬다니 엄청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픈 배와 고기를 탐하는 손은 아주 진솔한지라 나이프와 포크로 스테이크를 빠르게 썰어 입에 털어넣었다.
"스테이크를 리필하고 싶은 마음이야..."
"아, 여기, 1회 한정으로 리필 돼."
"뭣이."
"네 식성을 안 지가 10년도 넘었는데 당연하지."
"상일님이 최고시네요."
"야, 누군 친구A, B고 걘 님! 이냐?"
"왜, 주정재 형사님."
"이거 맞는 말인데 열받네."
"주정재, 고기 잘 먹고 화내지 말라고. 아, 여기 1인분 씩 리필 좀 부탁드려요."
참 아무거나 다 리필되는 세상이다.
식사를 배불리 마치고 -다음부터 리필 안 할지도 모르겠다- 나오는데 여전히 날씨가 좋았다.
"난 이제 들어가 봐야 해."
"뭐, 형사님이니까. 너희 둘은?"
"난 아연이 올 때까진 자유로워서 너희 도장에나 놀러갈까 생각 중."
"나도 오늘은 딱히 별 일 없어서."
"그럼 도장으로 안내하지요. 친구님들."
"어이구, 닭살."
"그래, 생일 잘 보내라, 동생."
"우와, 주정재 완전 닭살!"
야유 비슷한 소리를 내며 농담을 하니 짧게 가운데 손가락으로 된 화답이 돌아왔다.
***
"요즘 애들은 다 핸드폰 갖고 있더라. 나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우리 시절엔 휴대폰 하면 팔뚝만한 거였으니.."
"난 가끔 휴대폰 신 기종 나오면 적응하기 어려워."
이것이 바로 세대 차이인가. 침묵도 잠시, 정은창이 툭 말했다.
"그래서 좋은 친구들 불러다가 하는 일이 고작 멸치 다듬는 일이야?"
"이렇게 좋은 날 일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나 혼자 콩나물 다듬고 멸치 똥 딸 만큼 심심했다는 거 아냐. 그리고 너희도 심심하니까 도와달라고 했잖아."
조금 지지직 거리는 텔레비전을 보며 우리는 방석을 하나씩 등에 끼고 깔아놓은 요 위에 앉아 수북한 멸치를 손질했다.
"재석이 너...혹시 이거 부업이냐?"
"우리 도장 부업할 정돈 아니거든? 금월 수강료 입금날도 얼마 안 됐고."
"요는, 멸치볶음으로 석 달 반찬 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멸치가 많냐는 거지."
"앞집 슈퍼마켓 아주머니가 잔뜩 주셨거든. 이게 바로 나의 듬직하고 정겨운 이미지메이킹의 성과지. 정겨움과 의리 빼면 이 최재석이는 시체니까!"
"뭐래."
"시체였나 봐."
"어쭈구리. 의리하면 최재석, 최재석 하면 의리 몰라?"
"모르는데."
"몰라."
정은창은 고개 숙여 멸치에 집중했고, 상일이는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들이 어쩐지 무지하게 웃겼다.
"푸흐, 크크크, 크흐흐흐흐!"
"흐..흐흐흐.."
"흐흐, 흐흐...흐흐흐...하하하!"
두 녀석도 내가 웃는 걸 보더니 실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어느 순간 평 터졌다. 한 사람이 겨우 웃음을 그치면 다른 두 사람이 웃음을 계속 흘리는 통에 전염된 양 멸치를 손에 꾹 쥔 채로 몇 번의 웃음소리가 기차놀이처럼 이어졌다.
"아, 배야...너흰 왜 그런 실없는 거에 웃어제끼는 거야?"
"먼저 웃은 게 누군데?"
"그만들 해. 멸치가 사방에 난장판이니까. 다들 줍자고."
정은창의 빠른 중재에 멸치들을 탁탁 털고 마지막으로 훅 불어 혹시 붙었을지 모르는 먼지를 훅 떼어냈다. 물론 먹기 전에 한 번 더 씻겠지만.
"멸치...너무 많은데 좀 가져갈래?"
"나, 멸치 안 좋아해서.."
"나도."
"너희 어른이 되어서 왜 멸치를 안 좋아하고 그래. 불쌍한 멸치..."
두 손으로 멸치가 든 대야를 꼬옥 안고 있다가 덧붙였다.
"사실 나도 멸치 싫어."
"......."
"......."
친구지만 참 알 수 없는 놈이다. 두 녀석은 입을 열지 않고 눈빛만으로 의지를 전하는 초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이런저런 소동 끝에 수북했던 멸치는 깔끔하게 손질이 완료됐고, 다들 멸치 냄새 밴 손을 깨끗이 씻고 드러누웠다.
"야 근데 그것도 일이라고 졸립다..."
"일 맞지..아주머니가 손이 크신지 한 주머니를 주셔서.."
"최재석, 이불 갖고 나와도 되냐?"
"..당장 갖고 나오자."
싼 맛에 쓰는 이불들이 있던지라 정은창과 함께 관장실에서 바닥에 크게 깔 것 하나와 넓게 펼칠 이불 두 개를 꺼내왔다.
식후의 적당한 노동으로 고된 몸이 졸음을 표하는 것에 크게 반하지 않고 이불을 깔고 얼른 드러누웠다.
"전에 없이 느긋하게 할 거 없는데다 생일날이라 그런가 되게 시간 안 간다..."
눈을 감은 채 상일이나 정은창과 몇 마디 나누다가 금세 잠들었다.
***
"응..흥크륵!"
몸은 가만히 있는데 절벽으로 확 떨어지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셋이 딱 붙어서 잤었는데 양 옆자리들이 휑했다. 바깥을 보니 그저 파랗던 하늘에 누런 기운이 스며들락 말락하는 게 보이는 게 낮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으로 보였다. 누웠던 자리를 정리하고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두 통 와 있었다.
아연이 올 때가 되어서 먼저 갈게. 깨우지 못 할 만큼 곤히 자더라. 생일 정말 축하하고.
시백이랑, 아버님하고도 남은 시간 즐겁게 보냈으면 좋겠네. 언제 또 다 같이 만나서 함께 시간 보내자.
아연이도 너 보고 싶어할 거야.
-유상일
평소처럼 기운차긴 한데 피곤한 일이 많았던 모양이지? 되게 잘 자더라. 세 가족 사이에 폭 끼어서 저녁 먹고 갈 생각은 없어서 적당히 시간 때우다 일어난다. 밥 먹고 멸치만 만진 거 같지만 그럭저럭 하루 보낸 거 나쁘지 않았어.
생일날 잘 보내고, 나중에 또 보자고.
-정은창
"쩝, 아유, 요 귀여운 녀석들."
나이 40쯤 먹으면 생일 같은 거 별로 특별하게 생각 안 하게 되는데 나만 그런가 보다.
얻어먹은 것도 있고 축하도 양껏 받았으니 다른 녀석들이나 양시, 아저씨 생일도 잘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찰칵- 철커럭-
상일이나 정은창이 도장 열쇠가 있어서 문을 잠그고 갔을리가 없으니 도장 문은 열려있었다. 문이 당연히 잠겨있을 줄 알고 열쇠를 돌렸으니 헛손질 할 수밖에. 아침에 감은 게 무색하게 도로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을 살짝 긁고 있자니 아는 얼굴, 그것도 서로 닮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이 도장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와, 양시, 그리고 아저씨."
"관장님, 밥 안 먹었죠?"
"점심이라면 먹었지만 저녁이라면 아직이지."
"흠, 잠깐만.."
아저씨는 잠깐 양해를 구하더니 짐을 들고 냉장고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갔다.
"양시, 재밌게 잘 놀고 왔냐?"
"그럼요."
"아저씨랑은 어떻게 만나서 왔어?"
"글쎄요. 그보다 관장님은 중간에 잠깐 들렀더니 없더니만요."
"둘이 약속들 있는 거 같길래 나도 친구들이랑 밥먹고 집안일 좀 하다가 눈 좀 잠깐 붙였어."
"피."
입을 삐죽이던 양시가 딴청을 피웠다.
도장 밖으로 다시 나온 아저씨는 작은 종이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내게 내밀었다.
"재석이."
"응."
"생일, 축하한다."
".....엉?"
"관장님, 생일 축하드려요."
애들을 만날 때까지는 새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 이후엔 별로 놀랍지도 않았는데 지금 건 좀 놀랬다. 오늘 내 생일인 거 정말 나만 몰랐구나, 하는 놀라움이었다.
"..나나 시백이 생일은 곧잘 챙겨주는데 네 생일엔 그냥저냥 넘어가는 것 같아서 시백이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와 보니까 없더라고. 그래서 꽁꽁 숨겨놨었지."
"......"
"관장님?"
"아니, 정말 고마워. 기뻐. 사실 오늘 만난 녀석들이 생일 축하를 미리 해줘서, 깜짝 놀랐지 뭐야. 회수할 껀덕지도 없는데 참 잘도 챙겨주지..케이크는 뭐 사 왔어?"
"아침에 주문해서 특별히 만든 거에요. 생크림에 블루베리!"
"야, 맛있겠는데?"
"좋아하니 다행이네."
"야, 이거 둘이 오기 전까지 멸치 똥만 따던 보람이 있었네."
"큰일 했네."
"그치?"
"그래."
양시는 옆에 앉아서 재잘거렸고 -관장님, 그래서 점심은 맛있는 거 먹었어요?- 아저씨도 밖에서 이것저것 사온 것을 정리한 뒤 내 옆에 앉았다.
전보단 못 하지만 나만큼 강건한 어깨에 슬쩍 머리를 기댔다.
"매일매일 오늘 같았으면 좋겠네."
"매일매일 생일인 것처럼요?"
"아, 아니. 오늘 잠 쏟아질 만큼 느긋한 기분이었거든. 생일인 거랑은 별개로."
"시백이 생일 지날 때까지 쭉 그러길 기도하지."
"오, 아저씨. 평소엔 게으름 피우면 못 쓴다고 하더니만 오늘은 말랑말랑하네. 이게 생일 효과라면 1년 365일 언제든 좋은데."
"..녀석."
"아빠 부끄러워 하는 소리 여기까지 들려요, 관장님."
"부끄러우라고 한 말인데?"
"참 사이도 좋아."
"나도 알아."
잠들기 전 상일이랑, 정은창이랑 꼭 붙어있을 때엔 익숙하지 않은 사람 온기에 응엉? 하다가 곧 적응하고 잠들었던 거 같은데 양시랑 아저씨랑 꼭 붙어 있는 건 숨쉬는 수준이어서 킥킥 웃음이 튀어나왔다.
눈을 감고 속으로 생각 하나를 더했다.
이렇게 축하 받았으니, 다들 섭섭찮게 챙겨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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