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글

김주황+허건오

옛날 생각이란 참 쓸데없는 걸로 불러일으켜졌다.

이게 다 그놈의 고릴라가 가족이 있네 없네 꼬치꼬치 캐물은 탓이다.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이제는 얼굴도 흐릿하게 기억나는 엄마였지만 가장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건 형이었다.

형은 상냥하거나 다정한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형이었다. 손찌검, 심하면 발로 차는 등의 숱한 폭력에도 언젠가는 마음을 고쳐먹을 거라며 그저 의붓아버지만 싸고 도는 엄마보다는 조금이나마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의붓아버지의 주 폭력 대상이 나와 엄마였기에 형은 대체로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 적어서 나는 비죽비죽 험한 말과 함께 그런 반감을 표했고, 그 때마다 형은 입을 다문 채 약이 든 상자를 내 쪽에 두고 갈 뿐이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형에 대한 생각을 단순한 질투와 분노로만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의붓아버지가 죽던 날 말이다.

-..헉...헉..

극도로 긴장해 손가락이 새하얗게 되도록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는 형. 그리고 돌아보는 얼이 나간 얼굴. 제대로 된 가장 노릇도 못 하는 주제에 그 머릿속이 오로지 폭력으로만 가득 찬 의붓아버지 따위 죽여버리고 싶다고, 언젠가 죽여버릴 거라고 말한 적은 있었지만 조금 전까지 숨 쉬고 움직이던 사람이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것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음에도. 허나 그보다 더 소름끼치는 것은, 형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보다도 그동안의 폭력에 체념하거나 방관했던 것과는 달리 처음으로 제 의지를 보였고 그것이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내가 한 거야. 얘긴 끝났어..

"..내가 미쳤다고 나댔지."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건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형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이었다. 엄마는 폭력을 감내했고, 나는 반발할수록 돌아오는 것에 훗날을 기약하며 굴종했다. 형은 내가 그러는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던 것인지 내게도 말하지 않았던 해묵은 증오가 터져나왔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단지, 형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에 내가 포함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래서.

"난 기분 더럽게 빚 지면 못 사는 성격이라 그래."

귀에 걸린 이어폰을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렸다. 받았을 때는 나름 신제품이었는데 이제는 영 구식이 다 되어있었다.

***

빵에서 푹푹 썩다가 형을 다시 보게 된 건, 출소일이었다. 솔직히 면회 한 번 없었고 -심지어는 엄마가 찾아와 의붓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원망하거나 저주를 퍼붓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출소해도 집에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기에 갑작스러운 형의 등장에 몹시 놀랐다.

"...뭐야. 안 하던 짓이나 하고. 여긴 왜 왔어? 엄마가 보내서 온 것도 아닐 테고."

"그래. 나 혼자 왔어."

"두부 하나쯤 사 오는 센스도 없다니까. 그래서. 뭐 볼일 있어?"

"가져."

"뭐야, 이게?"

"MP3. 갖고 싶어했었지."

"나참, 출소하는 거 자랑한다고 돈지랄은 다 하네."

이어폰과 연결된 납작한 직사각형의 MP3.

일단 주는 것은 곱게 받았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찾아온 것이 반가워 얼굴을 살펴보았다. 키가 더 크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 외에 눈에 띄는 변화는 얼굴에 썩 사람다운 감이 싹 가셔보였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도 유약한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면이 조금 보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목석인 양 보였다. 내가 변했듯 형 역시도 심경에 변화가 크게 있었던 모양이다.

형은 말없이 길을 걸었고, 나도 말없이 뒤를 따랐다. 침묵속에 밥을 먹고, 새 옷을 사 입었다. 거절할수도 있었지만 이 순간이 형과의 마지막 순간임을 알기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절실한 문제이기도 했고.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해."

초저녁에 이르러 형이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연락처를 받아 점퍼 안쪽에 마구잡이로 구겨넣으며 말했다.

"그래. 가끔 할게. 대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우리는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

"애송이, 뭘 그렇게 중얼거려?"

"......"

"어이!"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이어폰이 가볍게 잡아당겨져 귀에서 쑥 빠지자 흐르던 노랫소리가 반토막이 남과 동시에 고릴라가 어느새 바로 옆에 다가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와, 씨, 깜짝 놀랐잖아, 고릴라!"

"날도 추운데 담배 피러 나간단 놈이 안 돌아와서 담배를 만들어 피나 해서 나와봤다, 왜?"

"들어갈 거였거든, 쳇.."

"그 이어폰, 좀 덜렁덜렁 거리는데 바꾸는 게 어떻냐? 애송이."

"아, 양쪽 다 잘 들리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사 줄 거 아니면."

"내려오기나 해라. 저녁 먹어야 할 거 아냐."

"혼자 먹어. 기분 다 잡쳤으니까."

"괜히 성질내기는..네 마음대로 해라."

고릴라는 몇 차례 투덜거리며 옥상 아래로 내려갔다. 괜히 성질 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괜시리 화가 났다.

"아오, 이놈의 성질머리.."

결국 담배를 하나 더 꺼내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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