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if / 원작과 뒤지고 뒤지게 다른 이야기
'중학생 시백이랑 혜연이랑 태성이로 등굣길'이라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쓴 글입니다. 원작에서 뒤지고 뒤지게 다른 if 이야기로 원작과 상이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시백아, 일어나야지.”
낮은 목소리가 잠을 깨운다. 베개에 고개를 묻고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에게 그는 한 번 더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시백아. 그제야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어서 일어나. 개학이잖아.”
“네에, 흐아아암, 일어날게요….”
똑 닮았지만 자기 새끼라고 귀여워 보이는지 양태수는 흐트러진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주곤 방을 나왔다.
“양시는 일어났어?”
수저랑 젓가락을 막 내려놓던 최재석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 위를 채우는 것들이라고 해도 구운 스팸과 계란, 김치 등의 소박한 것들이 전부였지만 따듯한 온기를 품은 음식들이 채워졌다.
“요새 애들은 참 개학도 빨라.”
“그래도 체육관은 이제 좀 낮에 한가해지겠어.”
“대신 저녁에 바빠야지, 아! 양시! 어서 앉아 숟가락 들어. 이러다 늦겠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체격도 좋은 세 남정네들이 식탁에 모여 앉는 것만으로도 가득 채워졌다. 젖은 머리칼을 말리던 수건을 의자에 걸어놓은 양시백은 숟가락을 들어 아직 뜨끈한 쌀밥 위로 계란을 잘라 얹었다. 짭조름하게 간이 된 프라이와 밥을 야무지게 씹다 보면 옆에서 스팸을 작게 잘라 그의 숟가락 위로 올라간다. 한 숟가락 다시 비면 이번엔 김치가 쑥 하고 올라와 양시백은 볼 빵빵해지도록 가득 우물거렸다.
“제, 제가 알아서 먹는다니까요!”
“더 팍팍 먹어야지.”
“맞아, 너무 말랐어.”
“제가요!? 같은 반에선 제가 제일 큰데요!?”
억울하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보호자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그릇을 비워내면 아주 깨끗했다. 싹싹 깔끔히 청소 된 그릇은 싱크대로 들어가고 양치까지 하고 나면 멀끔한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 갈 준비를 끝냈다.
“…오랜만에 교복 입혀 놓으니 감회가 새롭네!”
“아이, 관장님. 저 중3인데요. 이것도 벌써 3년째에요.”
“허리까지 안 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때는 저 알지도 않으셨잖아요!”
“그랬던가?”
와하하 웃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웃던 양태수가 아이의 등을 살짝 밀었다.
“학교 가야지.”
“아, 맞다.”
차키를 챙기는 아버지를 따라 현관을 나서는 아이 뒤로 최재석이 손나팔을 만들며 쩌렁 외쳤다.
“잘 다녀와라!”
“다녀오겠습니다!”
이미 입추도 지나고 8월 중순이 지났는데도 햇볕은 쨍쨍 뜨거웠다. 하늘을 바라보면 가을하늘답게 좀 높아졌나 싶다가도 여전히 똑같은 하늘색이다. 햇볕 아래에서 뜨끈하게 데워진 차에 급히 에어컨을 틀고 시동을 걸면 침묵은 라디오가 채워주었다.
“그리고 보니 같은 반에 아버지가 경찰인 애가 있다고 했지?”
“아, 맞아요. 두 명 있어요.”
“두 명이나?”
드문 일이었다.
“둘 다 경찰이 될 거랬어요. 반에서 1, 2등 하는 애들인데… 둘이 초등학교도 같은 곳 나왔댔나?”
“드문 일이네. 다른 더 좋은 중학교도 있을 텐데.”
“엄청 똑똑하고 좋은 애들이에요.”
라디오 노래 따라 고개를 까닥이던 양시백은 학교 근처로 바뀐 창문 너머로 보다 낯익은 모습을 보고 아! 하고 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저 여기서 걸어갈게요.”
“음? 벌써?”
“저기 아까 그 있어요. 반에서 1, 2등 하는 친구.”
양태수는 아이가 가리키던 방향을 바라봤다. 짧은 단발의 여자아이였다. 음, 어쩐지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며 갓길에 차를 채운 양태수가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다녀오고.”
“네, 아버지도 다녀오세요.”
차에서 내려선 아까 본 여자아이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시백이의 귀가 약간 붉어지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아.”
아.
양태수가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좋을 때구나. 아들의 청춘은 보기 좋은 법이었다. 정차 되었던 차는 금방 부드럽게 다시 도로를 밟는다. 백석의 경호실장님의 바쁜 하루는 지금부터였다.
“혜연아!”
“어, 안녕! 방학 잘 보냈어?”
밝은 목소리가 기운차게 들렸다.
“우와, 시백이 너 또 키 더 컸어?”
“어, 어?”
발 맞춰 걸어가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야 차이에 권혜연이 팔을 쭉 뻗었다. 비슷했던 것 같은데 방학 전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시뻘게진 그의 귀는 뒷전이고 손가락을 쫙 펴서 한 뼘 정도 차이가 나나? 고개를 갸웃거리다 팔을 내렸다.
“부럽다, 남자애들은 쑥쑥 커서. 나도 한 5cm만이라도 더 컸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작지 않잖아.”
“적어도 조금은 더 크고 싶은걸.”
권혜연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주변을 쭉 둘러봤다. 등교하는 아이들을 가볍게만 훑어봐도 충분하다. 이제 막 성장기에 들어선 아이들은 키가 들쭉날쭉했다. 150cm를 겨우 넘는 남자애가 있으면 그 사이에서도 우뚝 선 여자애도 있다.
“딱 저 정도만 크고 싶다.”
한 10cm 차이가 날까? 옆에 있던 양시백과 어렴풋이 비슷한 것같아 둘을 번갈아보다 이내 어깨를 내렸다. 부러워.
“시백이 너는 아버지가 키가 크시댔지? 분명 지금보다 훨씬 더 클 거야.”
“그, 정도는 아닌데. 평균 아닌가. 왜 그렇게 키가 크고 싶어?”
“그거야 키가 크면 유리하잖아!”
허공에 주먹을 휙휙 휘두르는 시늉을 하던 그녀는 금방 헤헤, 작게 웃는다.
“싸우려는 거 아니다, 경찰이 되려면 뭐든 하나라도 유리한 게 많으면 좋잖아.”
“경찰도 다 큰 건 아니던데.”
“그건 그렇지만, ~~사실 더 클 거라고 많이 기대는 안 해. 아빠가 그랬거든, 나 엄마랑 똑 닮았다고. 엄마도 키가 작댔어.”
이미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부터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던 그녀는 3년 동안 고작 1cm밖에 자라지 않았다. 머리 높이에 맞춰 벽지 위로 그어두었던 선들은 제자리걸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걔보단 크고 싶은데!”
“걔?”
걸음을 멈추고 팔을 쭉 뻗은 권혜연을 불쑥 튀어나온 팔이 그녀를 툭 밀었다.
“시끄러워. 교실 문을 막고 서지마.”
“아.”
얘 이야기구나. 양시백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 때부터 유명하도록 밝은 머리색을 가진, 우리 반의 또 다른 명물. 하태성이었다. 500m 밖에서 봐도 모범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모습에 한걸음 물러났다.
“그렇다고 밀 건 없잖아. 안녕!”
“안녕.”
아버지들이 같은 팀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탓에,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어울려 지냈다고 했다. 양시백은 삐죽 튀어나오는 입술을 애써 감췄다. 친하지 않은 듯, 또 친한 두사람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의자를 밀고 엉덩이를 붙여 앉는다. 키 순서대로 앉는 탓에 그의 자리는 꽤 뒤쪽이고, 권혜연은 앞에서 두 번째 줄, 그 뒷줄이 하태성이었다. 조례가 시작되고 선생님이 아침 인사를 하는 중에도 하태성의 뒤만 빤히 바라봤다.
‘쟤보단 혜연이가 더 크지 않을까.’
이제 막 쭉쭉 자라기 시작할 소년의 사정을 모른 채 마음속으로만 하태성의 머리를 꾹꾹 눌러 그 키를 줄였다. 혜연이보다 크지 말고 그대로 있어 줬으면 했다. 그러면 혜연이도 기뻐하지 않을까, 같은 흐름이었다. 상상 속에서 멋대로 그의 키를 줄이고 누르고 있는 걸 느낀 걸까, 하태성이 고개를 휙 돌렸다.
-뭘 봐.
입모양으로 소리 없이 말하는 그 아이의 행동에 고개를 교과서 사이로 푹 숙였다. 조용히 눈치 보며 고개를 들었을 땐 하태성도 다시 앞을 보고 있는 상태였다.
재수없을 정도로 똑똑한 모범생. 반에서 혜연이와 1, 2등을 다투고 언제나 반장을 하는 녀석. 심지어 올해는 전교 회장도 맡았으니 양시백은 어디 비빌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 책상 서랍과 가방에 꽉꽉 채워진 문제집과 노트들을 생각하면 사실 불평도 없었다.
저마다의 노력으로 미래를 쌓아가는 애들을 향한 감정은 가끔 시기 질투일 수도 있으나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달으면 그것은 어쩌다 동경으로 바뀌기도 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조금만 더 싹싹하게 굴지. 더 친해지고 싶은데.
“잘 가! 내일 봐!”
떠나는 뒷모습에 ‘응, 내일 봐.’라고 중얼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집에 가는 길은 혼자 걸어가는 시간이었다. 지는 그림자의 반대로 걸음을 옮겨 집에 가면 옷부터 갈아입고 향하는 곳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환기되지 못한 땀내에 코를 훌쩍이며 멀리서 아이들을 보고 있는 관장님과 눈인사를 한 양시백은 초등부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몸을 풀었다. 자신은… 경찰이라던가 그런 똑똑한 사람은 될 수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을 자리에서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허리를 감싼 검은 띠가 선명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더위를 뒤로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체육관을 울렸다. 또박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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