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거꾸로 먹어도

먹는 것이 나이인데. 그저 김성식과 정은창의 연반도시(연령반전) / 성식은창

김정 연(령)반(전)도시 : 김성식과 정은창만 바뀐 세상.

- 김성식 : 스물여덟. 서울로 상경한 지 얼마 안 된 울산 촌놈 조폭. 온건파의 대가리들이 이해가 되지 않음. 충동적인 면모가 있으며 백석을 잡아먹고 조직을 더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경찰에게 울산 지부의 정보를 팔아먹은 끄나풀을 잡아 죽이고 상경했다. 코가 좋다. 쥐새끼 잡는 코가.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철거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것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 정은창: 마흔둘. 어릴 적 은서와 함께 황도진에게 거둬지고 은혜를 입은 선진화파 2인자이자 행동대장. 몇 년 전 은서를 잃고 나선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온건파. 선진화파를 어느 정도 큰 가족의 울타리로 넣었다. 김성식이 성가시다.

- 황도진: 선진화파 일인자. 울산 시절 배를 곯던 정남매를 주워 돌본 것을 인연으로 몇십년을 같이 보냈다. 정은서를 잃은 뒤로 정은창이 하는 일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다 막 상경한 애송이에게 휘둘리는 듯한 정은창의 모습이 재미있어 버릇없는 김성식의 언행을 봐주고 정은창에게 붙여두었다.

성식은창 기반 바탕의 김성식과 정은창 의불 글


똑똑.

노크 소리가 정갈하다.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 있던 정은창은 대답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노크소리가 다시 들렸다. 똑똑! 아까보다 좀 더 힘 있는 소리였다. 한쪽 눈만 뜨고 문을 바라보던 그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똑! 똑! 문을 뚫을 듯이 두드리는 소리에 아예 문으로 부터 등을 돌렸다. 대답이 없으면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는 데도 버릇없는 개새끼는 겁 없이 문손잡이를 철컥철컥 돌린다. 잠겨있지 않은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허! 계셨네?"

기가차다는 듯 올라가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기도 하다. 귀를 문지르던 정은창이 몸을 돌렸다.

"성식아. 넌 대체 언제 예의를 배울래?"

"예의는 무슨 예의요, 있는데 없는 척 하는 건 예의 있는 행동이요?"

말이라도 못하면 밉진 않지. 정은창은 찌푸려지는 미간을 누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성식의 앞에 서면 그의 곁에선 피 냄새가 진동을 했다. 멀끔한 가죽을 하고선 어디서 구르다 왔는지, 피 냄새를 지우고자 뒤덮은 향수 냄새가 오히려 더 역했다. 정은창은 손을 뻗어 김성식의 뺨을 쳤다.

"다시."

단조로운 목소리가 내려졌다. 김성식의 얼굴이 정면을 향하자 그의 손바닥이 다시 그의 뺨을 내려쳤다. 다시, 다시, 다시. 세 번, 네 번이 반복될 즘엔 김성식의 한쪽 뺨이 벌겋게 물들었다. 정은창은 손을 털어내며 책상에 기대섰다. 뒷짐을 지고 뺨을 맞은 김성식은 떨리는 주먹을 숨기며 정은창을 바라봤다.

"김성식, 형님이 왜 널 나한테 붙여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처신은 잘해야지. 네 버릇없음을 도진형님께서 봐주셨다고 해도 나까지 봐줘야겠냐."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김성식은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꺼내 그의 담배 앞에 가져다 댔다. 눈썹을 들썩거린 정은창은 그 불에 숨을 들이쉬며 불을 붙였고, 연기를 허공에 뱉어냈다.

"그래서 왜 왔어."

"... ...."

"말해."

"대체, 언제까지 백석의 뒷구멍을 닦아주기만 하시려고요?"

털어내지 않은 담뱃재가 타들어 가고 타들어 가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왜, 꼬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선진은 충분히 지금보다 더 높게 올라갈 수 있잖습니까. 그런데도 계속 백석 놈들 눈치만 슬슬 보고."

"더 해봐."

"...짭새놈들을 방치하는 것도. 뻔히 보이는 변질자놈들도 내버려 두시는 이유가 뭔데요. 압니까. 글쎄 저한테도 접근해오덥니다."

"권 경감 짓이겠네."

김성식이 입안을 깨물었다. 높낮이 없는 그의 대답이 답답했다. 정은창은 늘 그랬다. 잔혹한 듯하면서도 이상한 부분에서 묘하게 물렀다. 만약 자신이 정은창이었다면 이미 대가리에 구멍이 났을 놈들이 한 트럭이었다. 경찰 티를 벗어내지 못하고 피 좀 묻혔다고 다 깡패인 줄 아는 샌님들도, 감히 선진과 경찰을 저울질 해서 변질자가 된 배신자 새끼들도.

"선진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아랫놈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습니다. 큰형님은 활동을 줄이시고, 형님도 조용하시니까 오히려 불안해하고 이탈 하려고들 하는데 그걸 왜 내버려 두냐고요."

욱 하는 성질 죽이지도 못하고 김성식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자신이 몸담은 이상 선진은 더 높게 올라가야 했다. 백석의 뒤를 닦아주는 한낱 깡패소굴이 아니라 큰일을 하게 될 조직이 되어야 했다. 이러려고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챙겼던 서류를 책상 위에 펼쳤다. 조직원들 신원서류 중 일부였다. 손가락으로 한명씩 사진을 가리켰다. 얘도, 얘도, 또 이 녀석도.

"김성식, 너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그리고 또 성급해."

정은창은 타들어 간 담배 끝을 그 서류 위로 뭉갰다. 검은 잿더미가 그 위를 더럽혔다. 참지 못하고 욱 하는 모습을 숨기지 못한 김성식의 어깨를 툭 쳤다.

"한 마리, 두 마리씩 깨작깨작 없애선 한꺼번에 못 없애. 쥐새끼들은 한 곳에 몰아서 쓸어버려야지. 설마 나나 도진형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 놈들이 활보하게 돈 줄 알아?"

"하지만!"

"하지만?"

"... ..."

김성식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빛 바란 눈동자가 더 이상의 만용은 없을 거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정은창이 손을 뻗었다. 다시 뺨이라도 내려칠까 움찔하는 그의 반응과 다르게 정은창의 손은 벌겋게 붓기 시작하는 그 뺨을 조심히 만졌다가 떨어졌다. 담배 향이 난다. 화끈거렸다.

"김성식."

"... ..."

"대답해."

"예."

"네가 보기엔 내가 가족이 무너지게 둘 것 같냐?"

"...아닙니다."

가족을 무너지게 두지 않는 정은창.

서울에 올라오기 전, 김성식은 울산에서 정은창을 본 적 있었다. 그 당시의 정은창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고 깡패 같지 않았다. 그 옆에 데리고 있던 닮은 여자아이 때문일까. 평범했다. 그가 선진건설의 이인자라는 이야기에 의구심이 먼저 들 정도였다. 선진화파에 들어간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이런 놈이면 충분히 자신이 잡아먹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테스트야. 테스트. 겁 먹었나?"

서울에 상경하고 만난 핸들과 이어지던 추격전 끝에 다시 만난 정은창은 그때와 전혀 달라져 있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와 무덤덤한 표정. 소완국의 얼굴 가죽을 가진 채 죽은 이를 발로 툭 툭 치며 이야기하는 정은창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의 그림자가 김성식의 발 끝에 걸렸다.

"...내가 소형을 꽤 아꼈는데."

정은창이 몸을 숙여 두 구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이미 썩기 시작한 쪽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는 그가 본래의 소완국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 손길에서 김성식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묻어냈다.

"울산에서 왔다고 했지. 반갑다. 나는 정은창. 이름은 들어봤겠지."

"김성식, 입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벌써 3년이 지났다. 고작 3년이지만 정은창의 빛이 바래기 시작한 것은 그와 똑 닮았던 여자애, 여동생을 잃은 후라는 것도, 그가 생각보다 더 조직을 가족처럼 여긴다는 것도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뭐가 그렇게 불안하게 굴지?"

정은창의 음성이 상념에서 그를 깨웠다.

김성식은 묵묵하게 정은창을 바라봤다.

"내가 김성식, 네게 내 계획을 모두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해줘야 만족하겠냐? 왜. 아예 나도, 도진형님도 죽이고 네가 선진을 이끌어가지."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

정은창은 그의 눈동자에 담긴 욕망을 알았다. 그 그릇에 흘러넘치고 또 넘치는 욕망은 자신의 앞에 있을 때면 더 번지르르하게 빛을 냈다. 숨겼다고 숨겼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찌꺼기들. 한숨을 쉰 정은창은 손짓했다.

"됐고, 그만 들어가 봐."

"아직 안 끝, ..악!"

정은창의 손이 김성식의 복부를 꽉 쥐었다. 김성식이 복부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억지로 그의 멱살을 잡아 허리를 세우게 하곤 셔츠의 단추를 뜯었다. 복부를 감싼 하얀 붕대 위로 피가 물든 것이 보였다.

"이 꼴로 내 옆을 지킬 생각은 아니겠지."

눈치는 존나게 빨라선. 김성식은 밀려오는 통증에도 불만스러운 생각이 삐죽 튀어 올라왔다.

"개새끼가 뻘짓거리하다가 물려서 오기나 하고."

정은창의 목소리가 그를 못마땅해 했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에 움찔한 김성식은 벌어진 셔츠를 대충 닫았다.

"... ..."

할말이 없었다. 정은창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몇장을 김성식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일 출근하면 죽는다."

한쪽 뺨은 맞아서 붓고, 애써 감아놓은 상처를 헤집어놓은 사람이 하기엔 참 친절한 대사였다. 김성식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꾹 닫았다. 피로했다.

"적당히 굴어. 애먼 벌집 쑤시다가 먼저 부러지지 말고."

김성식은 알았다. 그것이 나름 정은창의 걱정이었고 그것은 김성식 또한 그의 가족 범주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라는 걸.

"나 죽이면 형님 성질머리는 누가 받아준다고요."

"뭐?"

정은창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김성식이 부러 문을 쾅! 하고 닫으며 방을 나갔다. 정은창은 건들지 말라고 했지만 그를 믿고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불현듯 소완국이었던 것을 쓰다듬던 그 손길과 눈길이 떠올랐다. 재수가 없다. 언젠가 자신의 것이 될 곳은 금도 가선 안됐다. 경비원 조차 세워두지 않은 복도를 거닐며 다시 아려오는 상처 위를 쓸었다. 하, 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복도가 비워진 것은 오늘 방문 자체가 정은창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눈치챈 김성식은 괜히 애꿎은 벽을 발로 찼다가 올라오는 통증에 욕을 읊조렸다. 빌어먹을 영감탱...

황도진이 죽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숨을 거둔 황도진의 시체를 앞에 두고 정은창은 울지 않았다. 그저 비가 내렸고, 원치 않게 선진화파의 일인자의 자리에 오른 정은창의 곁을 김성식이 지켰다. 그날을 기점으로 쥐새끼들의 입을 강제로 벌려 쥐약을 쑤셔놓고 변질자들을 강제로 바다에 밀어 넣었다. 몇 번이고 물갈이가 이어지고 그 앞엔 김성식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이제 이인자를 김성식이라고 불렀다. 가족을 또다시 잃은 정은창은 그의 행동을 묵인했다. 목줄은 이미 정은창의 손에 있었다.

정은창이 김성식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정은창은 눈을 감았다.

"김성식."

"예."

천쪼가리 하나 없이 닿은 체온은 미지근하고, 서늘했다.

"너는 죽지마라."

가슴 아래 열심히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정은창이 그렇게 이야기 했다.

김성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죽을 때 까지 넌 죽지 마."

김성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죽지 마."

김성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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