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주정재, 누구도 아닌 남자 / 정재누아
처서가 지나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낮엔 여전히 땡볕 같은 더위가 이어지는데 해가 지기만 하면 쌀쌀해지는 기온 차에 옷 입기 참 애매하다고 생각하며 주정재는 옷장을 열었다. 유행이 한철 지나간 칙칙한 색상의 옷이 한가득이었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걸린 옷을 뒤적거리고 있으려니 뒤에서 남자가 말했다.
"…쥐새끼야?"
회색, 아니면 검은색 밖에 없는 상의들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주정재가 기가 찬다는 듯 들고 있던 옷을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야, 그러는 너는 임마. 맨날 첫날 깡패도 아니고 검은 정장만 입고 다니면서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가 되냐?"
"너보단 낫지."
"짜식이 패션을 모르네, 패션을. 어?"
남자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패션? 하고 되묻는 것 같았다. 그러던가 말던가 주정재는 입으로 꿍얼거리며 주옷더미 속에서 반팔을 하나 꺼내 침대 위로 던졌다. 행거에 걸린 자켓들을 훑어보다 사용감이 많은 라이더 자켓을 꺼내 그것도 침대 위로 던졌다. 옷장 서랍에선 무릎이 다 찢어진 청바지를 꺼냈다. 남자가 침대 위로 던져진 옷들을 훑어봤다. 진심인가? 진짜 이렇게 입고 나갈 건가? 장난인가? 하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주정재는 배를 벅벅 긁으며 입고 있던 옷을 대충 벗어 바닥에 던져두곤 팬티 바람으로 욕실로 향했다.
"형님 씻고 나온다~."
콧노래 흥얼거리며 사라지는 뒷모습을 덩그러니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내가 대체 이게 뭐 하고 있는 짓이냐. 의미 없는 한숨을 내뱉곤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선 빨래통에 넣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언제부터였던가. 밖에서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주정재의 집에서 준비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 예정에도 없던 시간이 늘어났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됐다.
남자는 불편했다.
주정재 답지 않게 자꾸 선을 넘으려고 하는 듯한 낌새가 보였다. 어디까지나 조력자와 그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선을 긋고 벽을 세웠던 건 주정재가 먼저였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계속 의심해야 했다. 그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했을 가능성부터 시작해서…. 생각해보면 옛날의 주정재는 원래 이런 녀석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까지.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겹쳐 놓은 옷을 쳐다봤다. 패션은 솔직히 남자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저건 뭔가 아니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10년 전에 멈춰있는 옷 취향과 센스를 패션이라고 뻔뻔스레 구는 녀석의 태도도 정말 질렸다. 남자는 옷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다시 열었다. 촌스러운 싸구려 방향제 향이 났다. 참 주정재 취향다웠다.
회색, 줄무늬, 흰색…인데 뭐가 많이 묻었고, 이건 목이 늘어졌고.
미간사이를 엄지로 눌렀다. 쓰레기를 왜 옷장에 넣어뒀지? 남자는 쓰레기들을 하나씩 꺼냈다. 쓸데없이 꽉 차 있던 옷장이 많이 여유로워졌다. 서랍을 열자 분류 되어있지 않은 양말들이 엉망으로 뒤섞여있었다. 남자는 검지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형광의 긴 양말이 한짝만 있는 걸 보고 고민했다. 대체 이건 왜? 그것도 한 짝만? 좀 더 뒤지니 다른 형광의 양말이 한짝 더 나왔다. 그건 길이가 더 짧았다. 더 혼란스러웠다. 검은 봉투가 얼마 넣지도 않았는데 꽉 차고 넘쳤다.
욕실 있는 곳을 힐끔 바라봤다.
아직도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꺼내놓은 쓰레기들을 현관 쪽에 던져두고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째깍째깍 시끄러웠다. 소리에 예민한 남자의 집엔 초침 시계가 없었다. 이 집에서만 듣는 거슬리는 소리였다. 대체 왜 안 나와? 기다리다 욕실 문을 두드리며 재촉이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욕실 문이 열렸다. 주정재가 머리에 수건만 걸친 채 나왔다. 입었던 속옷은 손에 쥐고, 아래엔 아무것도 안 입고.
"어으, 시원하다. 아직 시간 안 늦, 악─!"
남자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주변에 있던 휴지 곽을 쥐어 주정재에게 던졌다. 깔끔하게 그의 얼굴을 맞추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왜 시비야!"
"미친놈."
"내가 보기엔 네가 더 미친 것 같아. 하여간 성질은."
"속옷은 왜 안 입고 나와?"
"왜, 부끄러워? 같은 남자끼리인데 뭐 어때서 그러냐. 샌님도 아니고. 아니면 형님의 거시기가 부럽, …시발!"
리모콘을 던졌다. 이번엔 피했다. 남자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주정재는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책상에 다시 올려뒀다.
"손버릇은 존나게 고약해요. 자기야, 성질부리지 말고 서랍에서 팬티나 좀 꺼내주지."
"애초에 네가 들고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남자는 서랍을 열었다. …팬티 취향도 참. 색색의 팬티 중에 아무거나 꺼내 던져줬다. 주정재가 허공에서 받아 들고 팬티를 펼쳤다.
"정열의 빨강이 취향인가 보네. 그래그래, 형님이 한번 입어준다."
"닥치고 빨리 준비하기나 해. 늦는다고."
어유, 마누라 잔소리는. 주정재는 속옷을 챙겨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드라이기 위잉 소리가 잠깐 들리고 방호복을 꺼내 입은 후 그 위로 아까 꺼내두었던 옷을 마저 걸쳤다. 남자는 방호복을 가만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주정재가 문득 거울을 봤다.
"내가 아까 이 티를 꺼냈던가. 다른 거 였던 것 같은데."
남자가 바꿔놨다.
"어, 그거 맞아."
"그랬나? 아씨, 뭔가 안 맞는 것 같은데. 뽀대가 안 나잖냐."
별 차이 없다.
주정재가 쓰읍, 하고 거울을 이리저리 보다가 뭐 됐어. 하면서 머리를 왁스로 한 번 넘겨서야 겨우 준비가 끝났다. 남자는 시간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벽에 걸어둔 차키를 남자가 챙기고, 주정재는 불을 껐다. 자연스럽게 운전석으로 향하는 남자와 조수석에 오르는 주정재는 그렇게 도시 사이로 사라졌다.
두사람이 나간 방안엔 시계 초침 소리만 계속 이어졌다. 째깍, 째깍, 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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