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이성적

전력도시 / 회색도시 / 키워드 '가을' / 배준혁, 준혁지연

창문을 열자 이른 새벽 공기가 들어온다. 도시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고요하기만 하다. 배준혁은 창틀에 기대 그 풍경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다.

이 시간에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보통 이른 출근을 하거나, 늦은 퇴근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오늘은 한적하다. 가로등 없이도 밝았던 골목이 이제는 가로등이 유일한 불빛이었고 그 불빛조차 옅은 곳은 더 인적이 드물었다. 일출 시각에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좀 더 늦장을 부리며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이로써 우리는 태양, 햇빛이 사람 생활의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대략 관찰 할 수 있다. 사람은 빛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조명의 불빛과 차원이 다른, 세계를 밝히는 태양의 존재.

“태양….”

배준혁은 숨을 내뱉었다. 아직 입김이 나올 정도로 기온이 낮아지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제 겨우 가을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하루아침에 기온이 뚝 떨어지고, 다들 부랴부랴 긴팔이나 겉옷을 꺼내입었지만, 체온이 높은 사람은 아직도 반팔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온도.

이것도 오래 가진 않겠지.

한 달, 두 달, 다음 달만 되어도 이제 거리는 코트와 두터운 스웨터 차림의 사람들로 빼곡할 테고 다음 달이 저물 무렵엔 이미 동물들의 털로 꽉꽉 채워 넣은 아우터를 입은 사람들로 가득해질 테다. 시간은 그렇게 빠르다. 사람은 따라서 갈 수 없을 정도로 무심히.

그는 이런 서늘한 온기를 품은 계절이 되면 그 사람을 떠올리곤 했다. 이제 만질 수도, 볼 수도 없고 이름조차 불러보기 힘든 다정한 사람을. …어째서일까. 손끝이 꽁꽁 얼 정도로 추운 계절에 처음 만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사람이 이 계절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 사람의 온기가 얼마나 따듯한지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 어째서 가을을 닮았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배준혁은 잠시 고민에 빠진다.

“물론 봄 같이 부드러운 느낌의 계절도 그 사람에겐 충분히 어울렸을 겁니다.”

사람들이 흔히 계절에 가지는 이미지를 그 역시도 알고 있다. 손을 뻗어 아직 온기를 품은 찻잔을 쥐고 커피를 한 모금 목뒤로 넘겼다. 뜨겁게 내렸지만, 서늘한 공기에 벌써 살짝 식어가는 커피의 그 향이 입안에 맴돌고 그래도 품은 미약한 온기로 목과 몸 안쪽을 데웠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삶은 봄처럼 따듯하기만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고 겨울처럼 꽁꽁 얼어있지만도 않았다. 그 사람은 참으로 따듯하고 다정한 마음씨를 끝까지 잃지 않은,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배준혁은 가을을 떠올렸다.

“가을은 흔히 불리는 이름이 많죠. 식욕의 계절, 독서의 계절, …또한 1년 동안 이어진 농사의 결과물을 수확하는, 추수의 계절이라는 이미지도 큽니다.”

곡물과 과일 등, 종에 따라서 수확시기가 다르지만 밥을 중요시했던 과거의 사람들에겐 벼를 수확하여 곡식을 저장하고, 내년을 준비한다는 의미가 큰 의미가 되어 추수의 계절이라고 불렸을 터였다.

“그래서 가을은 다른 계절들보다 많은 것을 품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답지 않게 감성적인 이유다. 배준혁 자신도 100% 이해하고 정의할 순 없는 이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에게서 이런 감정들을 배웠으니까요.”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조차 납득하기 어려웠던 젊은 시절이 청년을 순식간에 사람의 감정으로 물들어 버렸던 그 사람. 그것은 청년에게 있어서 가을이라는 계절이었고, 강렬한 충격과 감정을 남겼다.

“…….”

그래서 그 계절이 저물고 찾아온 겨울이 더욱 혹독하고, 매섭고, 추웠는지도 모른다. 배준혁은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창 너머를 바라본다. 이제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창문을 한쪽만 닫았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배준혁의 겨울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청년은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그 역시도 사람이기 때문에 신체적인 노화를 천천히 받아들인 몸은 십여 년 전과는 다르다. 늘어난 주름과 거칠어진 피부. 필요 없었던 안경은 언제나 책상 서랍에 있었다. …그래. 배준혁의 계절은 여전히 겨울인데 신체의 수명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약 봉투에 시선이 머문다. 나날이 꺼져가는 수명을 사람의 언어로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생각보다 괴롭지 않았다. 의사의 조심스런 이야기에도 담담했다.

“그렇군요.”

오히려 그의 반응에 의사의 표정이 더 슬퍼보였다. 병원을 나선 뒤 사무실로 돌아가는 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저 유독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었고,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사라져가는 수명은 날로 갈수록 선명해졌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가을이라는 계절 한 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남자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계절은 천천히 흐를 테고,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미안합니다.”

누군가에게 향했을지 모를 사과를 배준혁은 허공을 향해 중얼거린다.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는 무언가 결심을 한 사람의 빛을 띠고 있었다. 비장하고, 혹은 슬픔에 잠긴 듯한…. 그는 곧 책장에서 서류철을 꺼내 한 장씩 넘겨 살피기 시작한다.

가을을 품고, 가을을 두르고 있는 남자는 그렇게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반쯤 열린 창문으론 여전히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가을이다. 아직, 가을이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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