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한잔

이룰 수 없다면

검은방 준용혜진

왜 안경을 자꾸 만지고 있어요.

서준용이 장혜진에게 물었다.

그냥.

장혜진이 들고 있던 안경을 그에게 돌려줬다. 서준용이 읽다 멈춘 책을 덮곤 안경을 썼다.

혜진씨는 제 안경을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요.

별로 그렇진 않은데, 왠지… 그냥 부적 같아.

제 안경이요?

응.

고개를 끄덕인 장혜진은 안경 너머 연인의 눈을 바라보다 그대로 옆으로 누웠다. 서준용은 기꺼이 그녀에게 허벅지를 내어줬고 눕기 편하도록 자리를 좀 더 옆으로 옮겼다.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선 타이타닉이 한창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었다. 거센 비바람 속, 침몰하는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

너는 어떻게 생각해.

영화요?

그냥 다. 저 상황도 그렇고.

으, 애초에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래도 한 번 생각해봐.

서준용이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며칠 전에 염색한 그녀의 머리색은 원래의 색보다 훨씬 밝아지고 얇아졌다. 염색하기 전도 예뻤는데, 조금 상한 그녀의 머리카락이 좀 아쉬웠다. 장혜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와 같이 배를 탔는데 배가 침몰 할 지도 모르는 거야. 배 위에 갇힌 거지. 비는 계속 오고… 그녀의 목소리 따라서 바깥에선 빗방울이 창가를 톡톡 두드렸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평소보다 가라앉은 그녀의 분위기에 서준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혜진은 가끔 서준용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회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표정은 대게 자신을 향해있을 때가 많아서 이유를 물어보고 싶지만 그 눈을 마주할 때면 결국 자세히 물어볼 수 없었다.

으응, 별로. 그냥 영화를 보고 있으려니 궁금해서.

그의 연인은 어려운 사람이다. 같이 있음에도 어딘가 외로워하고, 그걸 드러내지 않는 사람. 하지만 그 이유를 굳이 캐묻곤 싶지 않았다.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온다면 이야기 해줄 테니까. 서준용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꼬며 화면을 바라봤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어렴풋이 들어봤을 법한 OST가 흘러나왔다.

글쎄요, 배가 가라앉고 있는 걸 안다면... 그래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탈출하려고 하겠죠. 저는 손재주가 좋으니까 쓸모는 있을 거예요. 힘을 쓰는 건… 누가 대신 해주겠죠.

서준용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혜진씨와 같이 있다면, 아마 당신만이라도 구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애썼을 거예요.

만약 내가 그곳에서 처음 만난 타인이었다고 해도?

음,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

왜?

장혜진의 눈동자가 서준용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고 서준용은 수줍게 입꼬리를 올렸다.

첫눈에 반했을 테니까.

… …너.

붉어지는 장혜진의 귀를 모른 척 하며 서준용은 크레딧이 올라가는 화면을 바라봤다. 출연진, 각본가 등의 텍스트가 빠르게 올라갔다.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두고 그는 마저 말을 이었다.

아니여도 혜진씨를 죽게 두진 않을 거예요.

네가 죽게 된다고 해도 구해줄 거야?

그녀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서준용은 이제껏 그녀가 드러내지 않았던 속의 일부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바보야?

대답을 들은 장혜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네 목숨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지!

네?

몸도 비실비실한 게, 자기 몸 챙길 생각은 않고 네가 죽을 것 같으면 남을 도와주지 마!

서준용이 멍청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그녀가 어디서 화가 난 지 알 수 없었다. 장혜진이 시선을 피하지 말라며 그의 옷깃을 잡고 자신을 향해 당겼다. 시선이 한결 가까워졌다.

… 대답해 줘. 그러겠다고.

서준용은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팔을 뻗어 장혜진을 품에 끌어안았다. 옷을 잡아 당겼던 힘에 비해 저항 없이 그의 품에 안긴 장혜진을 서준용은 천천히 도닥였다. 장혜진이 그의 품에 파고들며 들려오는 심장 소리에 귀를 바짝 붙여 귀 기울였다.

대답해 줘. 준용아.

그 목소리조차 불안하고 떨려 보여서, 그는 그녀를 좀 더 품에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쉽게 안 죽을게요.

거짓말.

정말. 약속해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혜진씨가 날 붙잡아 주면 되잖아요.

장혜진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서준용이 미소를 지었다. 대답 없던 그녀는 그렇게 한참 그의 품에서 오랫동안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규칙적으로 쿵, 쿵 울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장혜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신을 달래주는 다정한 연인의 배려 속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소리를 속에서 삼켰다. 일어나지 않은 일.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 망상 같고 한낱 꿈인 것 같지만 생생한 기억들. 서준용에겐 없는 기억들. 오늘도 그녀는 혼자만의 불안을 삼키고, 또 삼키며 연인의 숨을 느끼고, 살아있음에 안도했다. 그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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